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에베소서 강해', 2권, 6장 세상을 향한 기독교 메시지 (김영희)

강대식 2021. 5. 24. 08:37

6 장 세상을 향한 기독교의 메시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2:4)

 

-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이 두 마디의 말을 통해서 기독교 메시지의 서론을 대하고 있으며,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고유하고 특별한 메시지를 소개받고 있는 것이다. 이 두 말 자체로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를 내포하고 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하셨음을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간섭을 말해 준다.

이제 이 두 어휘를 보편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해 보겠다. 그 이유는 첫째, 문맥 전체가 그렇게 하도록 만든다. 둘째, 기독교의 메시지를 향해서 제기되는 도전, 그것이 사람들이 처하여있는 직접적인 환경들과 아무런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비난이다. 다른 말로 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강해식 방식에 대해서 도전을 받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매일 처하여 있는 상황의 실상에 대해서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보임으로 그러하다. 그 도전이 전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싶다. 성경의 교리를 이해하고 믿고 적용시킬 때 성경만큼 현대의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없다.

 

복음이란 인간 전체를 다루며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의 삶 전체를 다룬다고 역설하였듯이, 우리는 우리가 처하여 있는 입장에 대해서 복음이 무엇을 말하며 어떤 관계를 갖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적인 방식을 생각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휴전기념일 같은 날에는 기독교회가 제네바 회의 -가능성들같은 정치가들이 해야 하는 주제를 천명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성경적 방식과 정반대가 되는 것이고 성경적인 방식에 대해서 전적으로 거짓된 것이다.

성경적인 방식은 하나님의 진리를 표방하고 그 진리와 어떤 주어진 상황과의 관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상황부터 시작하지 않고 맨 마지막에 상황을 다룬다. 성경은 세상과 사람들을 단순하게 살펴보는 것을 멈추게 하고, 하나님에 관한 진리에 비추어서 모든 것을 보지 않고서는 인생이나 사람이나 세상을 단순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만 직접적인 상황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이 에베소서 2장에 있는 처음 세 절을 통해 우리가 본질상 어떠한 존재들이며 세상이 본질상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인간에 관한 진리를 알지 않고는 인류의 모든 문제들을 풀어 나갈 수 없다. 분명히 우리의 모든 결론과 모든 제안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에 의해서 좌우되어 나갈 것이다.

먼저 이 교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죄 안에 있는 인간에게 무엇이 진리인가?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 마귀의 지배를 받는 영적인 세력들은 세상의 정신과 사고방식을 산출하고 통제한다. 그 결과 인간은 악한 권세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으며 죄와 허물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 현재 상황과 그 모든 것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1. 우리는 어째서 전쟁과 같은 것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오직 합당한 설명을 얻게 된다.

어째서 인간들은 이처럼 미치광이 짓을 하고 있는가? 오직 한 가지 대답만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사도가 묘사하는 바와 같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4:1) 그것이 전쟁의 원인이다. 그것이 타락한 조건 안에 있는 인간이다.

 

이것이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개인으로부터 나라에 이르기까지 또한 대륙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사회를 관통하여 작용하는 원리이다. 인간은 육체와 마음의 이러한 원하는 것들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 어떤 일이 옳으냐 그르냐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가 그것을 원하는 것이냐 또는 좋아하는 것이냐, 있어야 하는 것이냐는 사실에 흥미를 가진다. 인류를 지배하는 것은 이 욕심이다.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원리 안에서만 이 세상 일들이 어째서 그런 모양인가를 이해하고 합당하게 설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2. 인간이 계속해서 그처럼 지배를 받고 있는 한, 세상은 계속해서 역시 그러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세대에서 일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바로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감에 넘치는 자연인의 낙관주의와 부딪치게 되고 충돌하게 된다. 자연인은 앞서간 다른 모든 세대들은 그렇게 실패했지만 우리는 교육도 받았고 문화적인 사람들이라는 것, 우리는 그들이 알지 못하던 것을 알고 그처럼 많이 진보되었으니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 대한 이 성경적인 교리를 믿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고통이 죄 안에 있는 인류 속에 내재하는 욕심들에 기인되며, 또한 그 욕심들이 사람들을 통제한다면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전쟁은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17:26-30) 우리가 이 교훈을 포착한다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거짓된 열광과 거짓된 소망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인간이 중생하지 않는 상태에 있는 한, 전쟁을 불식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현대인은 현실주의자라고 자부한다. 기독교는 현실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현실주의자들이 아닌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낙관주의자들이다. 사실에 눈을 감고 등을 돌려대고 있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죄 가운데 빠진 인간에 관한 사실들을 전혀 직면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성경만이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현실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 이러한 상태와 조건에 관해서 기독교 메시지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기독교의 메시지는 그러나 하나님께서라고 말한다. 오늘날 많은 다수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구원과 기독교로부터 격리시키고 있는 것은 교회 스스로가 자행해 왔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는 무서운 혼동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1차 대전 때 기독교회가 자주 일종의 신병 모집소가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다.

 

부정적으로)

1. 기독교의 메시지는 애국자가 되라고 하는 큰 호소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나라가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자기 나라를 영예롭게 하거나 자기 나라를 자랑하는 사람도 잘못이 없다. 그러나 내 나라는 나쁘다. 또는 옳다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비기독교적이다. 그것은 성경의 교훈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위대한 사도 바울을 예로 들면, 그는 한때 다른 민족들을 경멸하는 편협한 민족주의자였다. 이방인은 개요 수에 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이 서신에서 자랑하고 있는 것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하는 사실이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야만인이나 미개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가 차별이 없이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이다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입장이다.

 

2. 그리스도인의 메시지는 용기를 가지라고 호소하는 것이나 영웅주의를 고취시키는 것에 불과하지 않는다.

자기 희생의 위대한 정신을 나타내라고 호소하는 것에 불과하지도 않는다. 기독교는 용기 또는 자기 희생, 영웅주의를 나쁘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질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가르쳐지고 추앙을 받고 찬양을 받던 이방의 덕성이다. 용기는 스토아 철학의 진수였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에 의해서 가르쳐지는 온유를 약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용기, 강함, 능력, 바로 그러한 것들을 위대한 덕성으로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연약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어떤 이가 구세주요 그것이 구원의 방식이라니 그들은 그것이 넌센스요 웃기는 일로 여겼다.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영웅주의와 자기 희생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이 기독교 메시지에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기독교 메시지는 아니다. 그것이 기독교 메시지로 표현되었을 때 그것은 사람들을 혼동시켰고 복음 자체가 치료하려고 의도했던 바로 그 분열을 조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 기독교 메시지가 세상을 향해서 기독교의 원리를 실천에 옮기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소위 평화론자로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개인 구원과 교리들에 관해서 설교하고 있다. 어째서 전쟁에 관해서는 설교하지 않는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오른 뺨을 때리면 왼편 뺨도 돌려대라고 말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면 전쟁이 끝날 텐데 말이요.

 

그 답변으로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산상설교를 할 수 있으나 그들은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없다. 그들은 욕심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다. 그들이 산상설교를 이해할 수 있기 전에 새로운 성품을 받아야 한다. 그럴 때에만 실천에 옮기기 시작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 기독교적인 원리를 적용해 나가라고 호소하는 것이 기독교 메시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기독교 메시지를 못쓰게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기대하는 것은 위험한 이단이다. 필요로 하는 것은 먼저 근본적인 교리로 죄 가운데 있는 사람, 그의 죽음, 그의 무능, 그의 완벽한 절망에 관한 교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부정적인 원리를 요약해 보면, 기독교 복음은 세상이 현재의 세계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하는 외에 세상을 인한 직접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믿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맨 먼저 던져야 하는 메시지는 단순히 심판에 관한 것이고, 회개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고, 그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오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에 관해서이다.

 

긍정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불신세계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하셨음을 가르치고 있다.

1. 하나님께서 죄와 악의 권세를 통제하셨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을 여러 민족으로 구분하고, 국가와 정부가 있도록 하셨다. 그는 권세를 정하셨다. 그것은 악이 나타나는 것을 어느 한계 내에다 두시고 통제하시기 위해서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셨다면, 세상은 지옥일 것이고 오래 전에 끝장이 났을 것이고 멸망을 불러왔을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한계를 두셨고 악에도 한계를 두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때로는 부분적으로 그 제안을 철회하신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림받은 심령대로내버려두셨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가 죄와 악에 대해서 두신 제한을 풀어놓아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무섭다는 것을 알도록 하시는 것 같은 때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우리가 이 현재의 악한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확실히 임박하고 있는 심판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기독교의 교훈을 실행하기만 하면 세상이 바로 잡아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개선하고 이것저것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이시고 우리 구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 때문에 우리가 그것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어둠의 나라에서곧 사단의 권세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질 수 있다. 그것이 개인들에게 전해지는 복음의 메시지이다.

 

그뿐만 아니다. 놀라운 일은 이방인들이 그의 피로 인해서 성도들과 함께 동일한 시민들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요동될 수 없으며 움직일 수 없는 나라이다. 이것은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가장 감격스러운 뉴스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시민으로 이 세계의 운명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여기에 다른 무엇이 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열려진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요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서 영원토록 존재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 이 메시지를 믿는다면

1. 이 세상의 어느 것에도 소망을 두지 않을 것이다. 애정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이 멸망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임박한 진노를 피한 사람이다. 그는 복음을 믿고 이 다른 나라에 들어갔다. 그의 소망과 열정은 이제 거기에다 두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외인이요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고 그것보다 더 위엣 것을 바라본다. 그는 계획을 설정해 놓고 내가 이것저것 하리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주의 뜻이면---”라고 말한다.

 

2. 결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놀라지 않는다.

어느 것이든지 당할 준비를 하고 있다. 전쟁이 터질 때도 놀라지 않는다. 사람이란 욕심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으며 욕심이 언제나 전쟁을 유발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협정도 전쟁을 없애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112:7) 우리는 죄 안에 있는 사람에 관한 성경적 교리를 믿기 때문에 결코 놀라지 않아야 한다. 여러분은 아직도 뉴스에서 살인, 강도, 폭력, 혐오, 모든 육신적 범죄 등에 놀라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 얼마나 비관론인가!”라고 말할 것이다. 천만에 그 얼마나 사실주의인가!” 그것을 직면하여 똑바로 쳐다보라. 그것을 위해서 언제나 준비하고 있으라. 이런 세상에서 더 좋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 사람이 죄 가운데 여전히 남아 있는 한 세상은 죄악이 만연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세대는 소돔과 고모라 시대나 노아 홍수의 시대와 방불한 시대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지 않으며, 세상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참아낼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에 대하여 넉넉히 이기도록 하는 능력에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그리스도인은 그저 비관적으로 그런 일을 참아내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그런 것에 대해서 체념하지 않고 또한 끝까지 공격하지도 않는다. 용기를 행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스토아철학이요, 이교주의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가 믿는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 모든 것을 인내할 힘을 얻게 된 것이고 인내할 수 있는 것이다. 환란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 세상이 그에 대해서 아무리 악하게 군다 한들 또한 지옥의 권세가 횡행한다 할지라도 버티게 되어 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장중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확실히 말할 수 있노라 저는 나의 도움이시요 사람이 내게 어찌하든지 나는 두렵지 않을 것이다그는 모든 핍박과 몸을 멸할 수조차 있음을 알더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기를 끊을 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안다. 그는 이 시간 세계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광의 후사라는 것을, 또한 이 죄악의 세상에 완전히 구속 받을 날이 임박하고 있으며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기다릴 수 있다. 그는 장래에 어떤 영광스러운 날에 그의 몸이 새롭게 되고 영화롭게 될 것임을 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는 이 영화로운 몸으로 바로 이 지상 위를 걸어 다닐 것이고 그 땅에서 악과 죄와 비열함이 하나님의 불로 타질 것임을 안다. 그는 영원토록 그것을 즐기게 될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메시지요, 이 곤고하고 혼돈되고 좌절하고 있는 현대세계를 향해서 해야 할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이 책에서만 읽혀질 수 있는 본질적인 교훈의 모든 결과이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