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에베소서 강해', 2권, 7장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김영희)

강대식 2021. 6. 13. 17:08

7 장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2“4-7)

 

- 우리는 이 장엄하고 가장 감동적인 진술을 보편적인 방식으로 살펴보았다. 우리가 죽어 있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의 대조를 가장 명백하게 본다. 사도는 복음을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그 위대한 일에 대해서 우리가 매우 명백하게 마음속에 지니고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 때 이 복된 그러나를 만난 방식보다도 더 놀라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일어난 일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또한 우리를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하신 것이지 우리가 먼저 어떤 일을 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린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자체로는 기독교가 될 수 없다. 기독교의 진수는 여기서 보는 진리이다.

 

또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된다고 강조하고 싶다. 그런 조건에 도달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성취할 소망이 있다는 인상을 주는 학파가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고 완전히 거짓된 것이다. 우리가 지금 탐사해 보고 있는 진리를 떠나서는 어떤 이도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기독교는 이것이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이지 저와 여러분이 스스로 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1. 그것을 순전히 객관적인 관점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 진술을 죽은 다음에 우리가 부활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진술로 여긴다. 현재로서는 그것이 현실이 아니고 미래에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는 식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에게 해당된다. 그러나 이 진술을 그런 방식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매우 심각하게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체 문맥이 부분적인 것이다. 사도의 큰 관심은 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미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 그들의 현재 지위가 어떠한 것인가를 상기시키는 데 있다. 우리는 늘 문맥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은 이 에베소 사람들이 이해의 눈이 밝혀져 하나님께서 지금 그들을 위해서 하고 계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1:19)

5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너희는 구원을 받았다. 이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며 체험적인 것이다. 성경은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이 동행해야 함을 보여 준다. 구원에 있어서 객관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거기에 역시 주관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다. 내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내 구원이 역시 내 속에도 있는 것이다.

 

2. 그것은 영적으로 또한 주관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우리에게 해놓으신 일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하늘 보좌에 앉히셨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육체적으로 하신 일과 비교될 수 있다. 믿는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두셨던”(1:20-22) 그와 같은 능력이다. 이제 바울은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가 그 일을 행하였던 바로 그 능력이 영적으로 너희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원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인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가 살리심을 받았으며 일으키심을 받았으며 하늘에 앉힌 바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지위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정반대가 된다. 전적으로 다르며 완전히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라는 말은 어디서나 대조의 국면을 밝혀 준다. 우리가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는 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지위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났는가?

이것이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어떻게 진리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되어졌다고 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은 가장 영광스러운 것 중에 하나이다. 그것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관한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발견이 된다.

이 복된 교리가 그처럼 하잖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른다. 카톨릭의 가르침은 이것은 가장 위대한 성자의 신비적이고 궁극적인 목표의 최종적인 단계라고 하는 경향이 있다. 보통 그리스도인들에 있어서 그것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에 있는 가르침이나 다른 곳에 있는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에 대해서 연합되지 않았고 그 안에있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는 기독교 교리의 마지막에 와서는 안 된다. 맨 처음에 와야 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첫째, 연대적인 의미, 둘째는 언약적인 의미로 두 가지 의미에서 사용된다.

로마서 5:12-21에서 아담은 하나님에 의해서 인류의 머리와 대표로 지어졌으며 간주 되었다. 그는 연대적인 머리요 언약의 머리였다. 우리의 대표였던 아담에게 일어난 일은 역시 그의 후손인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연대적인 머리요 우리의 대표라는 것이다. 아담은 첫 사람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두 번째 사람이다. 우리는 첫 사람 아담에게 연합되어 있었으나 이제 우리는 마지막 아담에게 연합되어 있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새로운 인류의 대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고통당하신 것은 그 안에 존재하게 되는 이 새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이야말로 이 연대적인 의미에서 생각되어야 하는 것이다.

 

2. 그것은 언제나 함께 연결되어 생사를 같이 하는 유기적인 연합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15:5) 에베소서 1장에서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 사이의 연합은 온 몸에 대한 여러 지체들과의 연합과 비유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제 손가락 중에 어느 하나도 내 몸의 중대한 부분이다. 머리로부터 흐르는 피는 손가락까지 흘러 나간다.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그리스도 사이의 연합은 남편과 아내의 연합에 비유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그것이 신비적인 연합이다.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연합은 바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났다고 외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구원의 신비성과 경이로움이다. 우리가 언제나 묵상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이 도달한 어떤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여러분의 연합의 차원을 제외하고서는 그리스도로부터 어떠한 유익도 얻을 수가 없다. 사도 요한은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16) 사도가 맨 먼저 강조하고 싶어하는 것은 우리가 전에 죽었었으나 이제는 살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인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났고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가 무덤 안에 있는 자기 아들의 죽은 몸을 살리셨던 것과 같이 영적으로 우리를 살리신다.

살리다의 의미는 살아나게 만들다”, “생명을 부여하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첫 번째 일은 그가 이제 죽은 일에 대해서 끝을 맺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내 죽음에 대해서 모든 것을 청산하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허물과 죄 안에서 죽어 있지 않다. 나는 영적으로 더 이상 죽어 있지 않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율법과 진노에 대해서 죽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이 진리를 역설해야 하는 사람이다. 기독교의 시작은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이미 그런 존재와 죽음에 대해서 완전히 관계를 끊었고 나는 살아있으며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살아났다. 나는 살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전혀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은 곧 나에게도 속한 것이라는 필연적안 귀결이 따라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아나게 하셨다. 여러분이 살아 있다면 더 이상 죽어 있지 않다. 여러분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둘 중에 하나이어야 한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살아있는가? 죽어 있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그것은 하나님께서 내 속에 새로운 생명의 영을 넣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죽음과 사망에 대한 반대이다. 이제 생명의 새 영이 있다.

 

살리심이란 중생(거듭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너희에게 주셨고 이는 다시 났으며 새롭게 창조 되었으며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다. 중생은 새 생명의 원소가 사람 속에 심겨지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전능하신 행동으로 말미암아 내 영혼 속에 새로운 성향을 넣으신다는 의미이다. 사람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새로운 기능이 아니라 새로운 성향이다. 기능들과 성향의 차이는, 성향은 기능들의 용법과 활동을 결정짓고 기능들의 용법을 다스리고 명령하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새로운 성향이 그가 가진 기능들을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지시한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성향이다. 그 속에 새롭게 역사하고 있는 능력이 지시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이지와 정서와 의지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탄생은 갑작스러운 일이다. 분명히 그것은 우리의 잠재의식 가운데서 일어나는 무엇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이러하니라”(3:8) 그것은 비밀이요 아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것을 충분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파악하기가 힘든 무엇이다.

 

그러나 아는 일은 그것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내가 소경이었더니 이제는 내가 본다는 것이다. 전에 죽어 있었는데 지금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비요 이적적인 일이요 기이한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그가 전에 보았던 것을 전에 보았던 방식대로 그것을 보지 않는다. 여러분과 세상 사람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는가?

 

중생을 떠나서는 기독교란 있을 수 없다. 단순히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 충분치 못하다. 기독교는 이것이니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 사활을 좌우하는 불가분해적 연합이 궁극적이고 신비적인 관계 때문에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을 믿고 아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지체들에게 퍼져 나간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들이라여러분은 그를 의식하고 있는가?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이 기독교의 시초이다. 이것을 떠나서는 기독교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싸워야 되고 연구해야 되고 땀을 흘려야 되고 기도해야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해야만 하지만 첫 번째 요점은 이 생명을 아는 지식이다. 여러분 속에 역사하고 있는 한 원리를 아는가?

 

그리스도인은 사로잡힌 사람이다. 생명의 원리가 그 속에 들어오고 새로운 성향이 그를 사로잡는다. 그는 자기 속에 있는 하나의 역사를 의식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느니라!” 그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것은 객관적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주관적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해의 눈을 밝히사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