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5 주일설교
본문: 마가복음 1:15
제목: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1. 때가 차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막1:15)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이다.
이 땅에서는 지역이나 영역의 개념이 아니고 통치의 개념이다.
주님이 내 마음 속을 다스리시면 내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하나님은 창조 이후 항상 통치하시지만, 사람 가운데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졌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하나님의 나라는 삼위 일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세례 요한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물었을 때,
주님의 대답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보라는 것이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11:3-6)
‘오실 그이’는 구약 창세기 3:15부터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예언이었다.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가 처녀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실 것이라 하였고,
때가 차매 예언한 땅 베들레헴에 오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시고”(갈4:4)
주님도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오셨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유월절에 어린 양으로 죽으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고, 다시 오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마음 속에 이루어진 자가 누리다가, 죽어서는 낙원에서 머물다가,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새 예루살렘 성에서 영원히 이루어진다.
그것이 영원한 천국이다. (already but not yet)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1-2)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22:1-5)
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되고
세세토록 왕 노릇 하며 삼위 하나님 앞에서 교제하며 영생을 누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오셔서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화평을 누릴 수 없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없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1-2)
하나님의 나라가 주님이 오심으로 가까이 왔지만,
누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해도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2. 회개가 먼저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1:15)
주님이 오시는 길을 회개로 닦은 것이 세례 요한의 세례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도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막1:1-5)
주님 오시는 길을 준비하고 곧게 하는 것이 죄를 자복하는 세례이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 주님이 오실 수 없고 주님을 모실 수 없다.
그러나 회개는 우리의 결심과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회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선물로 나야 회개가 이루어진다.
성령의 개입과 역사가 없는 회개는 인간의 조작일 뿐이다.
회개는 죄로 물들어 있는 성향과 관점이 성령의 역사로 획기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회개가 터졌다고 하고 회심(마음이 돌고 소용돌이 침)이라 하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한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 관점(패러다임)이 확 바뀌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고 자기가 하나님 노릇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
먼저 회개요, 회개 없는 믿음은 공허하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20:21)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11:18)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앞서서,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증언하였다.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
생명 얻는 회개가 먼저고, 매우 중요하다.
점진적인 회개, 교육에 의한 회개의 훈련, 이런 거에 속지 말기 바란다.
신적이고도 영원한 빛이 마음에 쏘여서 회개가 터지는 데
획기적인 변화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런 획기적인 변화가, 전환이, 이루어지고서 사실은 성화는 서서히 일생동안 이루어진다.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데 일생 동안의 변화가 이루어지겠는가?
변화 후의 점진적 성화를, 처음 회개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 거듭남을 우습게 알고, 성령을 소멸하고, 자신의 회개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왜? 개혁자들이, 청교도들이 성령으로 거듭남과 회개를 강조하고 또 강조하였는지 보아야 한다.
참된 부흥의 시대에는 회개와 변화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였고 영적 분위기가 달라지게 했다.
교회가 권력을 오랜 세월 쥐고 흔드는데 왜 부패와 암흑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었을까요?
성령으로 거듭남과 회개가 없는 것이 그 원인이었다.
회개하지 않으면, 헌 부대 그대로이고, 옛 사람 그대로이다.
몸에 벤 묵은 포도주가 헌 부대에 가득차 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 그대로이다.
새 포도주 새 복음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다.
묵은 포도주로 가득차 있는 헌 부대를 버리고 해로 배설물로 여기고 버려야 한다.
그것이 회개이다. 그것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회개하고 버려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은 새 사람을 입을 수가 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을 수가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이전 것은 지나갔어요. 보니까 새 것이 되었어요.
이런 역사, 이런 성향의 변화, 이런 전환이 없다면,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없는 거예요.
천국을 쉽게 주는 교회와 목사들을 멀리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세례 요한도, 우리 주님도, 주님의 제지들도, 초대교회 교인들도, 개혁자들과 청교도들도,
복음을 전하면서 맨 처음 외치는 것이,
회개하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사사시대처럼 중세 암흑시대처럼 회개하라를 모르고 있다.
개신교 5백년은 중세 천년을 그대로 닮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
회개가 없으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고, 그리스도인으로 출발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거짓 목사들이 큰 문 넓은 길로 회개 없이 가는 천국으로 멸망으로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사람의 지혜와 전통,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하나님을 헛되게 예배하고 있다.
그것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이고,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개가 터지면, 모든 이론 모든 사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된다.
하나님과 나와 세상을 보는 패러다임이 달라지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확연하게 확신으로 달라지게 된다.
3. 올바른 지식으로 복음을 믿어야 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개하면 참으로 복음을 믿게 된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믿음으로만, 주시는 은혜로만,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천국을 살고 영생을 얻는 복음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아심이라”(요3:16)
여러분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하루 속히 바른 지식, 바른 진리로, 돌아서야 한다.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심히 부패하고 오염된 믿음이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저도 목사 10년, 나이 60이 지나기까지, 로이드 존스 목사를 통해 청교도의 책들을 접하기 전에는,
내 믿음의 실상을 몰랐고, 안심하고 있었고, 보수신앙이기에 매우 하얀 줄 알았다.
개혁자들이 왜? 천년을 지배한 카톨릭 세력에 화형과 고문을 당하면서까지 개혁을 추구했는지,
청교도들이 왜? 수백년을 지배한 국교도 세력에 화형과 고문을 당하면서까지 개혁을 추구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서야, 사람의 지혜와 성령의 지혜를 구별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소유한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를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믿고 열심도 있고 지식도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과 열심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멸망했다.
성령의 지혜로 쓴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책들을 보면,
아, 내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고 있는
내 자신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리고서 멸망의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바울은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들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였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을 받아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였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이요,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한다.
어리석게 보임이요, 그것들을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유대교를 지배하였고, 중세 천년 암흑 교회를 지배하였고,
현재도 개신교 5백년을 지배하고 있다. 왜, 이 사실을 모를까?
청교도 아카데미에서 3년씩 두 번을 공부하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해야 이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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