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종교개혁과 발도인들
1 박해로 인한 지도자 배출의 어려움 발생
13세기 십가군에 의해 자행된 발도인들 학살 이후에도 발도인들을 향한 박해가 계속 되었고, 자주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1487년 인노켄티우스 8세의 승인으로 이탈리아 크레모나의 부주교와 알베르토의 지휘 아래 발도인들 십자군이 소집되었다. 1507년 십자군 활동이 종료되었을 때 160 여 명의 피에몽의 발도인들이 살해되었다.
이처럼 진리는 철과 불에게 추적을 당하고 있었기에 발도인들을 이끌어 갈 새 지도자들이 더욱 절실했다. 각 세기마다 시행된 잔인하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의 혹독한 박해로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살해당했고, 발도인들은 지도자인 바르브를 자체적으로 훈련시키지 못하게 되었기에 15세기 중엽에는 학생들을 외국의 대학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이전까지는 자체적으로 젊은이들을 훈련시켰기 때문에 중세 대학에서 장려했던 철학과 인본적 전통들은 가르치지 않았다.
2 개혁자들과의 접촉 시도
발도인들은 게르만, 프랑스, 스위스의 종교개혁 운동을 통하여 사도적 교회의 순수한 복음이 널리 전파됨에 따라 수천 수만 명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매우 기뻐하였다. 이에 개혁자들의 주장과 자신들의 교리를 비교하여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정확히 확인할 필요성을 느끼고, 발도인들도 종교개혁 운동에 참여할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 1526년 140명의 바르브들이 피에몽의 치소네 계곡에서 라우스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에 앙그로나의 젊은 바르브 마르티노 고니노를 독일로 보냈고, 그는 루터에게서 여러 권의 책을 가져왔다.
1530년에는 메링돌의 사역자 피에르 마송과 부르고뉴 사역자 조르주 모렐을 파송했는데, 그들은 멜란히톤을 가르쳤던 요하네스 로이힐린, 루터, 멜란히톤, 바젤의 외콜람파디우스, 스트라스부르의 마르틴 부처와 카피토, 그리고 베른의 리처드 할러 등과 같은 독일과 스위스의 개혁자들을 만나 자신들이 로마 교회가 말하는 이단과 무관함을 알렸고, 개혁자들의 사상을 확인했다. 개혁자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피에르 마송은 디종에서 당나귀에 싼 짐을 수색당했고, 개혁자들의 팸플릿들이 발견되므로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다행히 모렐은 무사히 그 지역을 탈출할 수 있었다.
3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발도인들에 대한 언급
1) 마르틴 루터
루터는 1533년에 출판한 『발도인들 신앙고백서』 서문에서, 자신이 교황주의에 빠져 있을 시기에 발도인들은 영벌을 받아야 될 무리라고 판단하고 미워했음을 솔직히 인정했다. 교황은 이 선한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함으로 큰 학대를 저질렀지만, 자신은 그들의 신앙 고백과 신앙 서적들을 접한 후 그들이 거룩한 순교자로서 칭송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였다.
루터는 “발도인들은 모든 인본적인 교리들을 내버리고 주의 법에 능력이 있음을 알며 주야로 성경을 묵상한 성경의 특별한 전문가들이었으며 성경에 매우 정통한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로마 교회의 고위직들은 성경을 무시하거나 성경을 전혀 보지 않았다”고 평가하였다.
루터는 발도인들의 신앙 고백을 접한 후 발도인들에게 큰 빛을 비추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였다. 이렇게 발도인들에 대한 모든 의심들이 제거되었고, 영혼의 유일한 목자와 감독이 되시는 그분께서 ‘하나의 양떼’로 모으셨음을 확인하였다.
2)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
외콜람파디우스는 1530년에 프로방스의 발도인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기록했다.
“우리는 여러분의 신실한 목자인 조르주 모렐을 통하여 어러분의 믿음과 여러분이 선포한 신앙 고백을 매우 만족스럽게 배웠습니다. 적그리스도가 엄청난 권세로 전 세계에 무지함을 퍼뜨린 가운데 여러분을 큰 빛으로 부르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심을 인정합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여러분에게 훌륭한 지식과 영적인 축복을 주셨습니다.”
3) 마르틴 부처
마르틴 부처도 발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진리의 큰 지식으로 오늘까지 여러분을 보존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피에몽 루체른 계곡의 비노 목사는 발도인들의 삶, 규범, 종교에 관한 논문을 통해 발도인들이 거룩한 삶을 살고, 거룩한 대화를 하며, 훌륭하게 행동하고, 악을 대적하는 사람들임을 증언해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는 피에몽 계곡에서 서로서로 평화와 조화 가운데 살고 있으며, 우리 자녀들끼리의 혼인을 통해서라도 로마 교회와 결코 혼합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교인들은 우리의 예의와 풍습을 너무 좋아하여 그들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서 사람들을 데려갔습니다. 그들은 멀리서 찾아와 자신들의 자녀들을 위해 보모를 찾으며 그들 자신들보다 우리가 더욱 신실하다”고 말하였습니다.
4) 하린리히 볼링거
그는 1530년 ‘계시록 설교’ 서론에서 발도인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400년 그 이상 동안 프랑스, 이탈리아, 게르만, 폴란드, 보헤미아와 기타 여러 국가에서 발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고, 그들이 신앙 고백을 계속 이어왔다. 계속되는 그들의 설교와 저서들을 통하여 교황은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언급했던 실제적인 적그리스도임을 고발하였다. 그들은 로마 교회와 교황을 비판했고, 그로 인해 결국 다양하며 잔인한 고통을 당하였으며, 영광스러운 순교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발도인들은 지속적이고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전파하였는데, 오늘날에도 동일하다. 교황의 강요 때문에 왕들과 영주들은 군사력으로 매번 그들을 제거하려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노력들을 허사로 만드셨기에 그들은 결코 멸절되지 않았다.”
5) 테오도르 베즈
그는 발도인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의미를 부여하였다.
“나는 발도인들을 원시적이고 순결한 그리스도 교회의 후손이라 부른다. 사탄이 부화해 놓은 오류와 무지 때문에 로마 교황청의 이단 정죄와 무참한 압제를 지속적으로 받았음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따라 이를 이겨 내고, 로마의 폭정과 우상 숭배에 굴복하지 않고 보존되었다. 매우 오래전부터 발도인들은 로마 교회의 오류에 반대하였기에 말씀의 칼에 따른 치리가 아닌 수많은 비방과 모든 잔인한 방법으로 박해를 받아 왔다. 그 결과 그들을 갈 수 있는 모든 곳으로 흩어졌고 들짐승처럼 거처 없이 유리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남은 자로 잘 보호하셨고, 유럽 모든 곳곳에서이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프로방스 지역에서부터 퍼져 나가 270년을 견디며 이탈리아 남부의 칼라브리아, 보헤미아, 피에몽의 그 인접 국가에 여전히 남아 았다. 그들은 결코 교황의 미신들을 따르지 않았기에 박해를 받았지만, 현재까지 계속된다는 것은 분명히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베즈는 1557년 피에몽 지역에서 오랫동안 박해를 받아 왔던 발도인들에 큰 관심을 가졌고, 그들을 변호하기 위하여 기욤 파렐과 함께 베른, 취리히, 바젤, 샤프하우젠, 스트라스부르, 몸벨리아르, 바덴, 괴핑엔까지 방문하였다.
6) ‘올리베탕’이라 불린 피에르 로베르
발도인들의 바르브인 그는 자신이 번역한 성경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발도인들을 소개한다.
”발도인들은 사도들의 부요한 가르침을 받은 초대 교회처럼 성경 안에 담긴 하늘에 속한 진리를 항상 충만히 누렸다.“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 PP 32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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