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익(참교회,종교개혁이전)

(7) 바울인들에 대한 학살의 역사 (8) 바울인들의 주요 지도자들 / 권현익

강대식 2022. 5. 28. 13:09

(7) 바울인들에 대한 학살의 역사

 

1) 테오도라 황후의 잔혹한 학살

 

미카엘 2세의 아들로서 성상 파괴주의자이며 교양을 갖춘 군주였던 테오필루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미카엘 3세(840-867,842년 즉위)가 황제가 되었다. 이때 모후 테오도라와 그녀의 오빠 바르다스는 공동 섭정이 되어 15년간 철의 홀(芴)로 피의 지배를 감행한다.

 

그녀는 350명의 주교를 비잔티움으로 초청하여 2차 니케아 공의회(787년)를 소집하고 성상 숭배를 유지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신념에 반하여 성상, 성화상, 성유물과 같은 것들의 무가치함을 주장하고, 사제들의 도움 없이도 일반 신자들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만인 제사장 교리를 주장함으로써, 그녀의 의도와 목적, 즉 강력한 교회 일치를 적극 방해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곧 바울인들이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인 바울인들을 대거 제거하기 위해 핍박의 피바람을 거세게 일으켰다. 그녀는 모든 권력과 하수인들을 동원하여 아르메니아의 바울인들을 박멸하는 데 집중하였다. 군대를 풀어 노인들과 아이들에게조차도 일체의 동정을 베풀지 않았고, 짐승을 다루듯 도살, 참수, 화형, 익사형을 행했다.

 

이렇게 840년과 860년 사이에 무려 10여 만 명 이상을 학살하였다. 이 강포한 권력자의 눈에는 바울인들이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처럼 여겨졌으므로, 이단자임을 표시하기 위해 그들의 이마에 인두로 여우의 형상을 새기거나 영적인 것들을 전혀 보지 못하는 소경들로 치부하기 위하여 그들의 눈을 뽑아 버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바울인들을 완전히 근절시키지 못한 채 황후 권력의 종막에 이르고 말았다.

 

이런 박해 때문에 바울인들은 그들의 교회 지도자들을 세울 때에 인격적인 흠결이 없는 것은 물론, 순교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나아가기로 결단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세웠다.

 

2) 바울인들의 자유 국가 테프리스

 

군대를 갖고 있지 않았던 바울인들은 이 질곡의 기간들을 비폭력으로 일관했지만, 가혹한 박해를 맞아 무력 저항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았는데, 테오도라 황후의 무지막지한 박해로 일부의 바울인들이 무력으로 저항하게 된다. 부모 가운데 한 분을 잃었던 제국의 고위직 인사였던 카르비아는 황후의 잔인한 학살에 분노하여 5,000명의 사람들과 함께 사라센 지역으로 들어가 테프리스를 요새화하고 자유 국가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테프리스 모든 주민들의 절대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도시 국가를 확립하였다. 이곳에서 불가리아, 보스니아, 세르비아의 슬로바키아 종족에게 바울인들의 신앙을 전파하는 선교사들을 많이 파송하였다. 이때 바울인들이 이룬 성공은 대단한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 독립 국가로 탈주하였다.

 

30년 이상 소아시아 지역이 안팎의 전쟁으로 참화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 바울인들은 테프라스에서 사라센 제국의 칼리프와 동맹하여 소아시아 지역을 공격하였다. 사모사타와 에베소에 이르는 여러 도시들을 점령하고 성상을 파괴하는 위용을 과시하였다.

 

그들이 추구했던 완벽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꿈은 종교의 자유가 실현되기를 꿈꾸며 건설하였던 자유 도시인 테프리스가 새 황제 바실리우스 1세에 의해 패망하고 700년이 지난 후, 저 먼 서구의 땅 이태리 북부 알프스 지역의 피에몽 계곡에서 실현되었다. 거기에 거주하던 기존의 발도인들과 들어온 이들인 망명자들 사이에 교리적 차이는 거의 없었으므로 특별한 갈등 상황이 없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한 이름으로’ 하나의 교회가 되어 연합하였고, 그곳에서도 지속적으로 ‘참 교회’를 유지하면서 이를 다른 지역으로 이식하고 확장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이후 바울인들은 점차 불가리아 국경을 넘어 그 영역을 계속 넓혀 나갔고, 피에몽 산악 지대와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이리하여 동, 서 교회로부터 핍박을 받았던 ‘참 그리스도인들’은 프랑스와 피에몽에서 서로 합류하게 되어 서로 간에 큰 탄력을 받게 되었다. 지옥의 권세가 결코 이길 수 없는 반석 위에 세워진 참 교회, 우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 든든한 모범을 볼 수 있다.

 

그곳에서도 순수한 복음을 전파할수록 거짓 교회들의 공격적인 박해는 커져갔다. 비잔틴과 아르메니아 지역은 물론, 라틴(이탈리아) 지역들에서까지 제국의 교회들은 바울인들의 가르침과 신앙에 물들지 않도록 강력히 대응하여 거짓 교리를 가르치게 했다. 그리고 거대한 국가 교회의 일치와 확장을 위하여 이교도들을 신앙 고백 없이도 교회 일원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성찬을 허락하고,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구원의 징표로서 유아 세례를 베풀게 하였다. p 381

 

(8) 바울인들의 주요 지도자들

 

극심한 시련 기간 도안 하나님은 톤락인들의 셈바트와 같은 유능한 이를 준비하셨고, 사용하셨다. 그는 8세기 말경 아르메니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가 죽은 지 오랜 뒤에도 로마 교회에서는 그를 ‘바울인들의 창시자’라고 말할 정도로 큰 활동을 하였던 인물이다.

 

또 다른 지도자 세르기우스는 목수로 일하면서 소아시아 지역 중앙 고원의 모든 지역들을 동서남북으로 방문하면서 34(800-834) 동안 무릎이 지칠 때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고 스스로 고백하였다.

 

하나님께서 콘스탄틴, 시므온, 셈바트, 세르기우스와 같은 걸출한 지도자 외에도 게네시우스, 요셉, 사가랴, 바네스와 같은 인물들을 끊임없이 세우셨고, 그들은 계속되는 박해 속에서도 하나같이 순교로써 참 교회를 지켜 내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박해들은 동방의 참 교회가 서방 지역의 남은 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역사의 현장에서 이들이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는 고난 가운데 믿음을 지켜 왔던 동료들을 서로 격려하며, 동일한 참 복음을 지킬 수 있었음에 감사하면서, 더 큰 용기를 얻어 그 이후에도 함께 영광스러운 순교의 면류관을 얻었다.

 

1140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많은 수도원에 보급되어 읽혀지던 보고밀인들의 교리가 담긴 콘스탄틴 크리소말의 책을 모아 불태울 것을 결정하였다. 3년 후에는 갑바도기아 지역의 주교 두 명이 보고말인들에게 감염되었다는 죄목으로 해임당했다. 그리고 수도사 니폰은 총대주교 미셀에게 동일한 죄목으로 수염이 깎인 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니 미셀의 후계자 코스마스는 니폰의 사상에 호의적이었기에 그를 석방시켜 그가 교리를 설교하도록 허락하였다.  p 382

 

-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 pp 378-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