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바울인들’ 교회의 조직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바울인들의 창시자는 마나날라스에 거주한 콘스탄틴이다. 콘스탄틴은 사라센에 포로로 잡혔다가 653년경 자유의 몸이 되어 아르메니아로 돌아온 한 부제(deacon)를 만나게 되었고, 이 만남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무명의 부제는 사모사타 근처 마나날라스를 지나다가 부유하고 교육을 받은 상인인 콘스탄틴의 집에서 며칠을 머물게 되었다. 주인 콘스탄틴은 포로에서 풀려난 나그네에게 친절을 베풀었고,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특히 그가 조심스럽게 내보여 준 성경에 큰 관심을 보였다. 결국 이 나그네는 길을 떠나면서 자신에게 큰 호의를 베풀어준 콘스탄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가 관심을 가졌던 성경, 곧 4복음서와 바울의 서신서가 담긴 책을 선물로 주었다.
콘스탄틴은 난생 처음 접한 이 성경을 통해 복음의 빛을 받고 영생을 깨달았고, 그의 삶도 변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법칙과 교리의 기초로 삼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이 성경적 복음을 가지고 지역 교회를 회복케 하는 일에 부름 받은 사실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1) 바울인들 교회의 첫 지도자 실바누스
그가 성경을 읽고 깨달은 내용들을 이웃들과 나누면서 그의 성경 해석은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을 뿐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것과 동일한 영적 변화를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많은 무리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고,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당시 그가 속한 동방 교회가 성경과 무관한 다른 가르침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계급화 된 그 교회 조직으로부터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더욱 사도행전 교회의 가르침을 지키고 이를 회복하게 하기 위하여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자각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사도 바울을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여겨, 사도 바울의 동료였던 선교사의 이름을 따라 자신을 실바누스(실라)로 불렀고, 자신의 제자들은 디도, 디모데, 두기고, 에바브라와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또한 아르메니아와 갑바도기아에 세워진 이 ‘바울인들’의 교회들을 부르는 명칭들에서도 이런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이 세우거나 사역하였던 로마 교회, 고린도 교회, 에베소 교회, 빌립 교회, 골로새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은 이름을 따와서 그 지역 교회들의 이름으로 삼았던 것이다.
실바누스는 헬라 교회의 우상 숭배를 비판하였다. 그는 헬라 교회의 계급 제도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세례와 성찬은 신앙 고백을 행하는 신자들에게만 제한해서 행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비잔틴 교회 권력자들의 박해가 시작되서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지자 그는 키보사로 피신하였고, 그 이후 30년 동안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사역의 결과로 많은 이들이 회심하는 큰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다.
특별히 실바누스는 신학자가 아닌 평신도 지도자로서 초대 교회의 유력한 신학자들이 활동했던 갑바도기아와 초대 교회의 전통을 유지한 교회들이 잔존해 있던 톤락과 같은 지역으로 들어가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하나의 교회’ 되었고, 신학적 신앙적 개선, 진척 내지는 성장을 이루어 갔다. 중요한 교부들의 관점과 해석들을 접하고 배우면서 균형 있는 신학을 형성하게 되었다. 먼저 톤락에서는 더욱 순수하고 열정적인 복음을 접할 수 있었을 것이고, 삼위일체 신학을 정립하게 된 갑바도기아에서는 더욱 완벽한 신관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을 것이다.
『진리의 열쇠』에서 볼 수 있는 일단의 이단적 논란거리들 때문에 실바누스의 신학적 변화와 발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 하는 시각이 있다. 후기 실바누스 신앙 사상의 요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오히려 그 이후의 바울인들과 그들의 신앙을 적절하게 연구하려는 진중한 시도를 원천 봉쇄하는 자세가 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실바누스와 하나의 교회가 된 톤락 산맥의 바울인들은 ‘톤락인들’(thonraks)로 불리며 19세기까지 존재하였다. 바울인들 교회는 성경을 근거로 한 신앙 고백과 교리 교육을 통하지 않은 집단적인 강제 개종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회심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통하여 보여 준 것처럼, 그들은 한 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후 그 지역 공동체가 세워질 때까지 일정 기간 동안 체류하였고, 지도자들이 세워지면 그들이 다시 방문할 때까지 새로운 지도자들이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는 후에 유럽의 발도인들 순회 선교자들이 시행한 사역 방법과 매우 닮아 있다.
실바누스는 토로스 산맥을 넘어 초대 교회 시기의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소아시아 지역에서도 성공적으로 사역함으로 큰 무리를 형성하였다. 그러자 이를 불편하게 여긴 비잔틴의 황제 콘스탄틴 포고나투스는 684년에 그들의 모임을 해체시키려는 칙령을 발표한 후 시므온이라는 한 지휘관을 그 현장으로 파견하였다. 시므온은 곧바로 실바누스를 체포하였고, 그 공동체의 동료들에게 돌을 들게 한 후 오랫동안 그들을 돌보고 가르쳐 온 실바누스를 향해 던질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목숨이 위협당하는 상황 앞에서도 아무도 그 명령에 응하지 않았고 돌을 땅에 내려놓았다. 나중에 실바누스의 양아들이었던 유스도라는 젊은이가 돌을 들어 실바누스를 쳐죽였다(684년). 시므온은 그 장면을 목격하며 실바누스의 순교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유스도에게 보상을 허락하였다. 권력자들은 실바누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그의 몸을 불태워 재로 뿌렸지만, 그의 가르침은 그가 살았을 때보다 더 강력하게 퍼지고 공동체는 성장해 갔다.
-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 pp 360-365
'권현익(참교회,종교개혁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7) 바울인들에 대한 학살의 역사 (8) 바울인들의 주요 지도자들 / 권현익 (0) | 2022.05.28 |
---|---|
(6) 비잔틴 교회 및 기존 교회사에 알려진 바울인들의 정체, 선구 개혁자인 근거 / 권현익 (0) | 2022.05.19 |
2. 바울인들의 형성 과정: 바울인들은 누구인가? / 권현익 (0) | 2022.05.10 |
2) 우리의 교회사 서술은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권현익 (0) | 2022.05.09 |
로마 교회가 주도한 역사 공정(工程)1) 누가 왜, 무엇을 위하여 이런 역사를 썼을까?/권현익 (0) | 2022.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