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07 주일예배
본문: 행 20:24
제목: 은혜의 복음의 증언
1. 은혜의 복음이어야 한다.
교회는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고 가르치고 지켜 행하게 하는 곳이다.
복을 빌어주고 출세와 성공, 병 고침과 문제 해결을 해주는 곳이 아니다.
전도한다면서 얼마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전도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다.
전도왕, 전도폭발이라는 말 자체가 복음을 알면 어불성이다.
십자가의 도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인도를 따라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 다수를 멸망시키셨다.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10: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25)
복음은 기쁜 소식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 받지 못하는데,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 받는 기쁜 소식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은혜는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더 의롭고 잘나서 주신다면 그것은 공로고 보상이지 은혜가 아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는 믿음의 수단 또는 통로를 통해서 주신다는 의미다.
믿음도 은혜도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믿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후손, 믿음의 집안 5대손, 모태신앙으로가 아니다.
‘육정으로’. 내 의지와 감정, 다른 사람의 의지와 감정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뜻으로’. 강단 초청, 집단 세례, 목사가 구원 받았다고 선언했다고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어야 한다.
그리고 믿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것이지 입술로만 믿는 것이 아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믿음이 와서 믿어지는 것이다.
영접기도한다고 믿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뜻으로 믿게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성령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 될 수 없고,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 하나님을 육신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보내 주신 것이 은혜이다.
처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낳게 하신 것이 은혜이다.
그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3년의 공생애 동안 제자를 삼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다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대신 형벌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은혜이다.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이 은혜이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서 역사하셔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수 있고,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
성령께서 빛을 비쳐 주셔야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복음진리인 것을 믿을 수 있게 된다.
성령을 부인하는 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을 수 없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통치를 부인하는 자,
성경과 성령이 증언하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을 수도 가까이 갈 수도 없다.
은혜가 심령에 부어져야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깨닫고 회개부터 하게 된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제 1성이다.
하나님 나라 곧 천국과, 회개와, 복음을 믿는 것은, 삼자의 필수 관계와 상관성을 밝혀 준다.
죄를 회개해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수 있고, 그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함으로 주님 오시는 길을 예비하였다.
유대교회든 로마교회든 현대교회든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이 회개를 통과의례로 묻어버린 것이다.
회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껍데기만 있고 내용은 세상 그대로인 것이다.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자가 어디에도 변화를 줄 수 없고 탐욕과 방탕에서 벗어날 수 없다.
2. 증언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여야 한다.
그 은혜로 믿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한다.
은혜의 복음을 증언한다는 것은 내가 보고 경험한 것을 큰 확신으로 증거하고 증언한다는 것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1:1-3)
우리가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증언하여 전하다고 했다.
기독교는 성령의 역사로 보고 경험하고 들은 바를 증언하는 종교이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8,9)
성령에 의해 경험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당하게 된 것도 말씀과 증언 때문이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으므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으니”(계1:9)
경험하지 않는 것을 전하는 것은 철학이요 지식일 뿐이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고 변화도 개혁도 있을 수가 없다.
말로는 진리를 말하면서, 실제로 쫓아가는 것은, 자기의 이익과 소유이다.
세상이 날로 악해지는 이치이고 이유이다.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겔33:31)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른다.
이게 사람이다. 목사고 교인이다. 모든 종교의 공통성이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자리이다.
교육도 진리도 종교도, 출세와 성공의 수단일 뿐, 오직 내 신은 나의 이익이다. 나의 탐욕이다.
공자왈 맹자왈 어릴 때부터 사서삼경을 공부하고 과거시험 합격하고 벼슬따면,
그 다음부터는 나와 자기 편의 이익을 위해 당파싸움 벌리다가 이조는 멸망했다.
지금도 명문대학 유학 박사학위 따다가 벼슬자리 앉으면, 권력 쥐면,
배운 교육은 온데 간데 없고, 남을 때려 잡을 때만 잘 써먹는 도구일 뿐이다.
못 가졌을 때에만, 사회 정의요 평등이요 복지요 문화요 하다가
가지면, 찔끔 흉내만 내다 말고, 자기와 자기 편의 이익에만 몰두하다가 넘겨주고,
다시 찾고 하다가, 세상은 더욱 악해져만 간다.
교회는 내가 손으로 만진 것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가
주님을 만나고, 주의 은혜를 경험하고서는, 복음의 증언자가 되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20:21)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해 회개한 것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을,
순서대로 경험한 것을 증언해야 한다.
내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고 증언해야 한다.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사탄)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이 있는 사람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다.
그것이 참 기독교, 참 교회, 참 그리스도인의 역사였다.
이러한 참 그리스도인의 역사에는 눈을 감고, 오늘 내 문제 내 성공에만 골몰하고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우상숭배하며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하는 원인이 바로 그 때문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우상숭배에서, 바알 섬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의 멸망도 멀지 않을 것이다.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요 선지자들의 증언이다.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으로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붙들었고,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증거로 붙잡고 승리하였다.
우리가 증언하는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우주 만물을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을 주신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오늘이 다가 아니고 끝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과 희망이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1-12)
3. 사명이어야 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바울 사도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또한 자기가 달려갈 길이었다.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하였다.
주 예수께 잡힌 바 된 것, 그것이 사명이요 달려갈 길이다.
사도 바울은 또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하였다.
달려갈 푯대요, 부르신 부름의 상이, 사명이요 달려갈 길이다.
사명은 맡겨진 임무요 주어진 명령이다. 생명 바쳐 완수해야 할 과업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곧 주 예수께 사명을 받은 사람이다.
주 예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이다.
이 증언을 위해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성령으로 세례하여 주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세례 요한은 증언하기를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하시는 분이라고 하였다.
성령으로 세례하시는 목적은 ‘내 증인’, 주님을 증언하는 주님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권능을 주셔서 능력있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증언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살전 1:5-7)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말로만 전하지 않았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다.
그리고 참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이고
사도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사람이다.
초대교회는 사도와 성도들이 그러하였고 성령의 사람들, 말씀의 사람들이었다.
그 이후 로마교회와 현대교회를 제외하면 그 전통은 그대로 이어져 왔다.
발도인들, 바울인들, 롤라드인들, 후스인들, 위그노들, 청교도들이 그러하였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복음을 전하고, 받았기에,
그들은 자기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지도자들이 솔선하여 로마교회 권력자들에 의한 박해와 고문과 화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고,
따르는 성도들 또한 동일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이들을 따랐다.
수천 수만 수십만의 참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까지도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사도 바울도 오늘 본문 앞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20: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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