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는 '사탄에게 솔직히'이다

강대식 2022. 10. 21. 09:22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사탄에게 솔직히이다.

 

-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대한기독교서회, 1968)

의 요약과 비판

 

존 로빈슨

 

영국 울위치 교구의 감독으로서 캠브리지 클레어 대학의 학장이었고, 웰즈 신학대학의 채플린으로도 시무하였다.

존 로빈슨은 생후 4개월의 갓난아기였을 때 고아원에 맡겨졌고 그 후 위탁가정에서 학대받으며 자랐다. 열네 살이 되었을 때 방화혐의로 교정시설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나온 뒤로는 범죄 집단에 휘말려 소년원에서 18개월을 지냈다. 그 후 흉터와 문신과 분노가 가득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우연히 전도팀을 만나 복음을 접하고 예수를 영접한 후 인생이 변하기 시작했다. 현재 움직이는 청소년 센터인 '에덴버스'책임자로 영국 맨체스터의 가장 위험한 지역을 돌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으며, 신실한 여성 질라안을 만나 두 딸을 낳고 그의 소망이던 '평범한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다.

 

요약자의 말

 

나는 이 책을 1967년도에 전남 목포 인근의 결핵요양소 한산촌에서 처음 접했다. 서울신학대학 3학년생으로서 휴학하고 결핵을 치료받고 있을 때였다. 이 책과 함께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 를 읽었다. 이 두 권의 책이 내게 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 보수 신앙을 깡그리 무너뜨렸고 그래서 나는 폴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이라는 분야를 더 깊이 공부하고자 서울신학대에 자퇴원서를 내고 연세대 철학과로 진학하기까지 했다. 이에 더하여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 등으로 무장하고서 나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나는 교회 밖에서 25년을 살았다. 물론 나중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거치장스런 이름도 떼어버리고 신에게 솔직한 한 인간으로서 살았다. 그 신은 나의 궁극적 관심이었고 존재의 기반이었으며 나는 그 신 앞에 신 없이 살기를 힘쓰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았다.

 

그런데 199210월 어느 기도원에서 회심하고 보니, 25년간의 삶은 흑암과 혼돈과 공허(1:2)였음을 깨달았다. 그후 그리스도께 헌신하여 목사가 되었고 화성 한 시골에서 아주 자그마한 목회를 하고 있다. 하나님께 돌아와서도 10여년 동안 다른 영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따라 헤메었고 약 5년전부터 청교도신학을 대하면서부터 비로소 바른 복음 바른 영 바른 예수를 접하게 되었다. 우리 청교도연구회에서 이 책을 한 번 다루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이제는 비판적인 입장에서 이 책을 요약하고 있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는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이었다. 그러나 유명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신학자들이 하나 둘 씩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면서 점점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물들어 갔다. 그들에게서 배운 신학생들이 졸업하여 안수 받고 목사가 되어 장로 교단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그들이 주류가 되고 대세가 되고 말았다. 총회를 차지하고 프린스턴의 이사진과 교수진을 다 장악하고 말았다. 그들을 반대하던 메이첸 교수는 총회에서 목사직이 면직되고 쫓겨났다. 그와 몇 사람이 주축이 되어 옛날의 프린스턴으로 돌아가고자 세운 대학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이다.

 

이러한 수순이 보수 주류 교단에서 암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다. 광명의 천사로 행세하니까 웬만큼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으로 무장하고 민감한 사람이 아니면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없다. 그들은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을 설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다. 기독교의 핵심되는 단어들이 자취를 감춘다. 죄와 회개, 성령과 기적, 지옥과 재림 등의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자기들이 배워서 맘에 들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교양과 종교에 맞는 사상들을 성경을 빙자하여 가르치고 설교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 상담학과 심리학의 지식과 방법들이 만연하고, 마켓팅과 경영학 수법들이 그대로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관상기도나 침묵기도 등이 영성훈련의 수단과 기법으로 도입 보급되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그들의 열매들이다. 우선 당장 유용하고 실용적인 가르침과 사상들이 복음과 성령의 이름으로 가르쳐진다. 그것들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저주하고 있는 다른 영이고 다른 복음이고 다른 예수인지를 알기까지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조심하라고 하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인지를 알기까지는, 거짓 선지자들이고 제사장들인지를 알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성경과 영을 바로 알고 가르쳤던 종교개혁자들, 청교도들의 신학을 대면하기까지는 이들의 성경 해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이들의 영이 얼마나 잘못된 미혹의 영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그 열매들을 분별하기 위해 책들을 읽어야 하는데 그들의 미혹의 책들이 베스트 셀러를 이루어 가려 버리고 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지고 가르쳐지고 있을 뿐이다.

(이하에서 이 책의 요약은 본문 형식으로, 나의 비판은 괄호로 표시할 것이다.)

 

 

 

머리말

 

기독교의 전통적 정통사상을 현대어로 바꾸어 놓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만 우리 신앙을 변호한다면 극히 적은 수의 종교적인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놓치게 될 것이다. 더 근본적인 새로운 형식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의 범주- , 초자연적인 것, 종교 자체에 관한 것-를 먼저 녹여버려야 할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구성하고 있는 전통적인 정통적 초자연주의와 오늘날의 일반 세상이 말하는 것과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그리스도인들 중에도 하늘나라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 자신은 복음을 거부한다고 상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경우, 믿을 수 없는 어떤 특수한 이해 방법을 단지 거부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다.

 

(형식적으로는 비그리스도인지만 내용적으로는 훨씬 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를 교리 없이 삶을 위한 윤리로만 파악하면 아마도 깐디나 슈바이쳐 같은 이들이 훨씬 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성경은 교리 없는 삶을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성경의 교리를 이해할 수도 살 수도 없다.)

 

알렉 비들러, “교회 안에서 참되고 깊이 있는 사색과 지적 민감성과 정직을 너무도 억눌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굉장히 크게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옮긴이(현영학)의 말

 

오랜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아직도 불완전하나마 어른이 된 오늘의 인간, 과학과 기술로 눈에 보이는 구체적 사실들을 다루게 된 20세기의 인간저 하늘 위에 있는 신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있는 신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특히 불트만과 틸리히와 20세기 독일의 순교자이며 신학자인 본회퍼의 사상을 일반에 소개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하늘 위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가 아니라 삶의 깊이와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성서의 신을 다시 찾으려고 한다. 그의 솔직하고도 과감한 태도는 전통적 신학에 불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 불만을 터뜨릴 방법을 찾지 못해 애쓰며 새로운 모양의 신앙을 모색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이 책은 영문판으로도 전례없이 1963년에 출판되자마자 수십만 권이 팔렸을 뿐 아니라 일본을 포함한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나왔다. 저자 로빈슨 박사는 신약학자로서 여러 권의 저서를 낸 바 있고 캠브리지 대학 강사, 하버드 대학과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초빙교수 등을 거쳐 현재는 런던 남쪽에 있는 울위치 교구의 감독 일을 보고 있다.

 

(교회 안에 있거나 밖에 있으면서 전통적 정통 신앙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끙끙 앓고 있었던 이들에게 구원의 생수 같은 복음일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광명의 천사로 옷을 입은 사탄의 복음이 영으로 거듭나지 못한 이들에겐 훨씬 현실감이 있고 20세기라는 시대 사상에 딱 맞는 해석으로 들릴 것이다. 전통적 기독교 신앙을 버릴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이들에게 이 복음은 너야말로 진짜 그리스도인이야라고 말해준다. 과학과 기술로 무장하여 성숙한 20세기 현대인에게 하늘 위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가 아니라 삶의 깊이와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성서의 신을 다시 찾는다는 말이 얼마나 지적이고 종교적인 만족감을 주겠는가?)

 

 

 

1. 원치 않는 혁명

 

저 위에또는 저 밖에

 

성서는 저 위에있는 어떤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늘이 위에 있고, 지구는 그 밑에 있고, 물은 지구 밑에 있는세 층으로 된 우주를 그려보고 그것을 글자 그대로 믿던 시대도 있었다. 우리는 오래 전에 이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놀랄 만한 (사고방식의) 전위(transposition)를 해 버렸다. 글자 그대로 또는 물리적으로 저 위에있는 어떤 신 대신 영적으로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저 밖에있는 어떤 신으로 우리 마음속의 비품들을 바꾸었다. 물론 글자 그대로 저 밖에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과학에서 일어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소화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최근까지도 신이 외계의 피안어디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우주시대에는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고 본능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진 것을 볼 때, 신이 저 밖에있다고 하는 따위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소박하고도 물질적인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마음 속과 같은) 여인숙이나 우주 전체에 그가 있을 자리라고는 없다. 즉 빈 장소라고는 남은 곳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주시대가 옴으로써 이와 같이 소박한 신의 투영은 이미 파괴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이 만일 피안에 있다면 실제로는 어떤 것의 피안에도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학의 삼위일체론은 우리 밖에 또 우리와 떨어져 있는 이 신적 존재가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창조의 교리는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이 신이 자기 외에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성서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자기가 창조한 사람들과 만나려 하고, 그들과 계약을 맺고, 그들에게 예언자를 보내, 그리고 때가 찼을 때 그 아들을 통해서 그들을 찾아온다고 하고, 또 충실한 자들을 모으기 위해서 언젠가는 다시 온다고 한다.

 

(로빈슨은 20쪽에서 신약성서 기자들이 저 위에있는 신을 글자 그대로 믿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신약성서 기자들이 벌써 코페르니쿠스 전환을 이룬 사람들이란 말인가? 성서는 그 시대 사람에게 그 시대의 세계관에 입각해서 말씀하신다. 이 시대에 그래서 사고의 전위가 필요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역사적 사실과 개념에 대해서 현대의 과학적 잣대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해서 평가하는 것은 과학과 현대에 대한 과신이고 미신이다. 과학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발전하고 있다. 온 우주를 샅샅이 뒤져도 영적인 것이 보이겠는가? 그리고 모르는 것은 말하지 않고 겨우 아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과학이다. 과학이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고 과학적 지식 가운데 검증되지 않은 가설 위에 세워진 것이 많은지 모른다. 그리고 과학자들 중에 왜 성경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많은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로빈슨은 위험한 가설 위에 서 있다.)

 

지금의 정세에 비추어볼 때, 세 층으로 된 우주관이 붕괴된 이후로 우리에게 계속해서 도움이 되어온 저 밖에있는 신이라는 개념의 내용 전체가 도움보다도 도리어 방해물이 되고 있는 시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징조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지옥에 관한 교리도 그 한 예다. 옛날의 체계에서 보면 지옥은 저 밑에있었다. 그러나 한 장소에 국한되어 있는 지옥은 점차로 사람들의 상상력에 호소할 수 없게 되었고, 지옥의 불길을 돋우려고 한 부흥사의 노력도 그 힘을 회복시키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 경우의 비극은 마귀와 그 수종자들, 구렁텅이와 불길의 호수를 저 밖에있는 신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효과적으로 바꿔놓지 못한 데 있다. 그래서 이 (지옥) 요소는 통속적 그리스도교에 점점 빠져나가게 되고 복음의 깊이에 많은 손해를 끼치게 되었다.

 

(저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 하나님이 말씀한 진리들을 믿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영이 없으면 그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자기들이야말로 성경보다도 과학과 현대에 입각해서 더 많이 더 깊이 알고 있다고 하면서 성경의 진리들을 깨부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천국과 지옥을 떠나서는 우리의 믿음은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과학이, 현대가, 없다고 하면 없어지는 것인가?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도 천국도 지옥도 다른 모든 사실도? 성경의 진리들이 방해물이 되고, 복음의 깊이에 많은 손해를 끼치고 있는가? 그들이 만드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정체를 가지게 될까? 아마 천사로 둔갑한 괴물일 것이다. )

 

저 밖에있는 신을 포기한다는 것은 저 위에있는 어떤 신이라는 개념으로부터의 변천 과정보다도 더 과격하고 근본적인 비약을 의미한다. 저 밖에 있는 존재라는 개념을 통째로 다 버리라는 것은 신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의미한 듯이 보일 것이다.

 

폴 틸리히의 설교집흔들리는 터전실존의 깊이라는 설교가 있다. 전통적인 종교적 상징기법이 높이의 표현에서 깊이의 표현으로 바뀔 때에 어떤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보여 준다. 틸리히는 말하기를 신은 그 존재성을 파악하려고 우리가 애써야 하는 따위의 저 밖에있는 어떤 투영이나 하늘 저쪽에 있는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의 기반이라고 한다.

 

모든 존재의 이 무궁무진한 깊이와 기반에 대한 이름이 곧 신이다. 신이라 말은 바로 그 깊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삶의 깊이나 존재의 근원이나 궁극적인 관심사나 무조건 중대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말해 보라. 그렇게 하려면 신에 관해서 배운 전통적인 것을 모조리 잊어버려야 하며 심지어는 신이라는 말 자체까지도 잊어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신이란 깊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것은 이미 여러분이 그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무신론자나 불신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삶에는 깊이가 없다든지 삶은 천박하다든지 존재 자체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아주 진지하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무신론자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무신론자가 아니다. 깊이를 아는 사람은 신을 아는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의 옥중서간에서 종교 없는 그리스도교를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본회퍼가 독일 비밀 경찰에 의해서 사형당하기 전에 쓴 편지들이다. 본회퍼에 따르면 교회는 이때까지 종교적인 경험, 즉 사람은 누구나 다 마음속으로는 어떤 모양의 종교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 이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호소함으로써 복음을 전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종교라는 것도 없이, 개인의 구원에 대한 염원도 없이, 죄의식도 없이, ‘그 따위 가설의 도움도 없이 버젓이 살아갈 수 있다고 느끼게 된다면? 그리스도교란 이러한 부족감이나 신이라는 공백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혹은 앞으로 그런 필요성을 느낄 사람들에게만 국한될 것인가? 본회퍼의 대답은 이렇다. 즉 성 바울이 1세기 사람들에게 할례라는 조건이 없는 그리스도교를 요구한 것과 같이, 신도 20세기 사람들에게 종교라는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그리스도교를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루돌프 불트만은 1941년에 출판된신약성서와 신화로 유명하다. 그는 신약성서의 신화적요소를 지적한다. 그는 신약성서가 그 당시의 세계관과 신화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벗겨내야 현대인들은 복음을 알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요소의 전부가 현대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말들이라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의 초역사적성격을 표현하기 위해서 신약 성서 기자들은 선재성, 성육신,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 기적적인 개입, 우주적인 재난 등의 신화적용어- 불트만에 따르면 이와 같은 용어들은 이제는 완전히 낡아빠진 세계관으로만 이해가 가능하다-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진짜 거리낌의 바위(십자가의 불명예)에 걸리는 대신에 역사적인 사건을, 인간을 위한 신의 행위로 번역하는 역할을 해야 할 용어 자체, 도리어 이 사실을 믿을 수 없게 만들어놓는 용어 자체 때문에 뒤로 물러서게 되는 것이다.

 

 

 

2. 유신론의 종말

 

그리스도교는 초자연적이어야 하는가

 

틸리히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에 관한 전통적인 교리 형성은 소위 초자연주의를 본뜬 것이었다고 한다. 신은 가장 높으신 존재로서, 이 세상 위에와 너머와 밖에 그리고 또 피조물의 세계와 병행 또는 대립해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다른 존재들과 나란히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실재의 세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신은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되기는 한다. 그는 하나의 존재이지 존재 자체는 아닌 것이다.

 

불트만은 신화적인 세계관 자체는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 이전 시대의 우주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신약성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 사업을 하나의 초자연적 사건으로 제시한다. 이 모든 용어는 어떤 초자연적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의 참된 차원과 깊이와 중요성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 본회퍼는 불트만이 지나치게 진보적이 아니라 오히려 덜 진보적이라고 비판한다. “기적이나 승천 같은 신화적개념에만 아니라 모든 종교적개념들 자체에 문제가 있다. 비종교적으로 해석하고 선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체로 13세기에 시작한 인간의 자율성을 향한 운동은 우리 시대에 와서 어느 정도 완성에 도달했다. 인간은 신이라는 작업가설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도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처리해 나가는 방법을 배웠다. 이것은 과학과 예술과 윤리의 문제에 있어서 이미 아무도 감히 움직일 수 없는 자명한 것이 되었다. 자기 자신의 실현을 성취하고 또 그 자체의 존재를 지배하고 있는 법칙을 의식하게 된 이 세계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자신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성숙기에 도달한 세계에 대해서 이라는 후견인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세계가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교 변증가들이 공박하는 것은 첫째로는 무의미하고, 둘째로는 수치스럽고, 셋째로는 비그리스도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비그리스도교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대신에 인간의 종교성의 어떤 특정한 단계를 바꿔놓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바울이 할례가 복음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다고 하여 이것을 용감하게 떨쳐 버리고 이 세상의 성숙함을 신이 이룩한 사실로 받아들인 것과 같이 우리도 종교적 전제를 대담하게 버려야 한다고 한다. “우리가 정직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이라는 작업가설 없이 우리들을 이 세계에서 살게 하는 신은 우리가 언제나 마주치는 신이다. 신 앞에서 그리고 신과 함께 우리들은 신 없이 산다. 신은 자기 자신을 세상에서 추방당하게 한다. 신은 이 세계에서는 무력하고 약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렇게 해서만 우리들과 함께 있고 또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

 

스미스 교수는 초월성에 관한 옛날 교리는 이 세계에 관한 낡아빠진 견해이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신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조금이라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같이 낡아빠진 견해 때문에 그것과 함께 그리스도교 자체가 없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데 있다.

 

(인간은 어떻게든 신의 굴레에서 벗어나 성숙과 자유라는 이름으로 마음 놓고 죄를 지으려는 것이다. 인간이 과연 성숙했는가? 성숙한 세계의 모습이 날로 악해져만 가는 것일까? 범죄율, 이혼율, 자살율, 우울증의 만연, 약물 중독, 독재와 내전, 양극화, 기아, 아이들의 영양실조---).

 

 

 

 

 

 

 

 

3. 우리 존재의 기반

 

삶의 중심에 있는 깊이

 

틸리히의 말이다.

깊은은 이를 영적으로 사용할 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즉 그것은 얕은의 반대를 의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높은의 반대를 의미한다. 진리는 깊은 것이고, 얕은 것이 아니다. 고난은 깊이이지, 높이가 아니다. 진리의 빛과 고난의 암흑은 둘 다 깊은 것이다. 신에게는 일종의 깊이가 있다. 신을 향하여 외치는 시편 작가에게도 깊이가 있다.

 

틸리히가 깊이라는 말로 신을 표현할 때 또 하나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모든 존재의 무궁무진한 깊이와 기반’,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사, 우리가 무조건 중대하게 여기고 있는 그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깊이, 사회생활의 근거와 목적, 도덕적 사회적 활동에서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들이다.

 

본회퍼의 말에 따르면 신은 우리의 삶의 중심에서 그 피안에 있다”. 즉 그는 삶의 한계가 아니라 그 중심에서 만날 수 있는 실재의 깊이이다. 그것도 키엘 케고르가 적절히 표현한 대로 고독한 자가 고독한 자에게 도피함으로써가 아니라, ‘실존에 더 깊이 잠김으로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이라는 낱말은 우리의 존재 전체의 궁극적인 깊이, 우리의 실존 전체의 창조적인 기반과 의미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신에 관한 전통적 지식 전체를-그리고 필요하다면 신이라는 말 바로 그것까지도 잊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 이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실재에 접하게 된다는 것, 존재자체가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부버의 말과 같이 모든 하나 하나의 는 영원한 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창이며 이것은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놓여 있는 것이지, 포이에르바하의 말처럼 사람과 사람이 합쳐서-‘의 통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회퍼가 주장한 바와 같이 신은 그 한가운데서 그 피안에 있으며,” “초월적인 것은 무한히 먼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는 오직 유한한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경우나 자연의 질서에 대해서 반응을 보이는 경우를 막론하고-안에서 그 와 더불어 또 그 밑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67-68

 

우리 존재의 기반과 근원과 목표로서의 신은 우리 생활의 천박하고 죄스러운 표면으로부터 무한한 거리와 깊이에 떨어져 있는 동시에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에게 더 가깝다고 하는 역설적인 논법으로밖에는 표현할 도리가 없다. 초월과 내재라는 전통적 범주는 바로 이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76

 

(하나님의 초월적 존재하심과 무소부재성을, 현대과학의 성과를 지나치게 낙관하고 기준으로 삼아, 포기하고, 신을 인간이 구제해 주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신은 겨우 인간 내면의 깊이와 초월성 속에 그 명맥을 유지한다. 그리고 종말을 고할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은 그들에겐 이미 죽은 존재이다. 이 사상의 발원은 아담을 범죄하게 한 옛뱀, 사탄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서 초대교회 시대의 영지주의로 이어지고 이 영지주의는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나는 경건주의 흐름으로, 하나는 이단적 가르침으로. 이단적 가르침은 기독교 하나님을 부인하는 휴메니즘 지식의 세계로, 경건주의는 신비주의 전통의 흐름을 따르며 기독교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를 낳고 근래에 와서는 뉴에이지와 관상기도 등 신비주의를 낳고 있다. 자유주의는 경건주의의 아들이다. 기독교의 적은 휴메니즘적 진리관과 현대판 신비주의이다. 다른 복음, 다른 영이다.)

 

 

 

4. 남을 위한 인간

 

예수는 남을 위한 인간’,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 자기 존재의 기반과 완전히 통하여 하나가 된 사람이다. 그리고 이 신의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생기는 남을 위한 삶이 곧 초월인 것이다. 왜냐하면 죽기까지 사랑하는사랑이라는 이 점에서 우리는 신, 즉 우리 존재의 궁극적 깊이’, 상대적인 것 안에 있는 절대적인 것을 만나기 때문이다.

 

이탈되어 있으면서도 우리 존재의 기반과 하나가 되어 있는 것, 우리는 이것을 지옥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사랑 안에서 자기 존재의 기반과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곧 천당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서가 말하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실존의 이탈성과 소원성을 그 모든 신적 깊이에서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현실은 초월적인 것이요, 신약에서는 다만 은총이라고만 한다.

 

새로운 피조물은 유별나게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남을 위한 인간의 삶, 우리를 우리 존재의 기반과 완전히 하나로 만드는 사람, 화해되지 않은 우리 실존의 여러 가지 관계 속에 나타나는 사랑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가장 훌륭하게 나타났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어떤 새로운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 새로운 존재를 사랑으로 나타내는 구현체가 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본회퍼의 말을 다시 빌린다면 이 세상에서 신의 무력함에 참여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신과 함께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이교도들과 다른 점이다. 인간은 신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신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을 잃어버린 이 세상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어 가야 한다. 그는 세속적인삶을 살아야 하며, 따라서 신의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유별나게 종교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무슨 종교적 행위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의 생활 속에서 신의 고난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이 남을 위한 사랑을 할 수 있는가? 그렇게 인간의 본성과 행함이 착한가? 말과 사상은 얼마든지 아름답게 할 수 있다. 사상과 삶의 괴리를 아는가? 그 가운데 합할 수 없는 심연이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아는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와 지옥의 부자 사이에 가로놓인 큰 구렁텅이를 아는가? 성경의 교리를 믿지 않고 성경의 윤리와 도덕을 살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 없이 인간이 과연 죄를 이기고 선을 행할 수 있는가?

남을 위한 사랑?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남은 제쳐놓고라도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 형제간 사이의 사랑도 잘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성령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가? 인간은 바리새인은 될 수 있다. 입으로 진리를 말할 수 있지만, 속에는 탐욕과 방탕, 죄악과 위선이 자리하고 있다.)

 

 

 

5. 세속적인 거룩함

 

세속적인것이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참된 깊이로부터 분리되고 이탈된 세계를 의미한다. 거룩한 것은 세속적인 것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다. 예배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도피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며, 세속적인 영역에서 종교적인 영역으로 은퇴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것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세속적인 것의 피상성을 꿰뜷고 그것을 그 이탈 상태에서 구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게 자기 자신을 열어 놓자는 것이다. 예배의 기능은 이와 같은 깊이에 대해서 우리를 민감하게 하는 것, 이 세상과 다른 여러 사회에 대한 우리의 반응으로 하여금 근치적 관심사로부터 궁극적 관심사로 초점을 두게 하고, 이것을 날카롭게 하고 깊이 있게 하는 것,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추어 우리의 사랑을 순결하게 하고 바로잡게 하는 것, 그리고 이미 화해했고 현재도 화해하고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은총과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는 것 또는 수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은 무엇이나 다 그리스도교의 예배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그것이 종교적일지라도 다 그리스도교의 예배가 아닌 것이다.

 

성만찬이라는 것은 교회와 이 세상을 향해서 그리스도가 그 백성과 함께 임재한다는 사실 곧 세속적인 것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는 일, 또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일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공포하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예배와 성만찬을 인간이 과연 인간의 힘으로 드릴 수 있는가? 세속적인 인간을 그 깊이에로 궁극적인 것에로 이웃과 올바른 관계로 인도하는 예배가 가능한가? 철학과 불교와 기타 오래된 종교들은 깊이가 있다. 깊이를 추구한다. 그러면 철학이 성한 곳에서, 불교와 기타 종교가 성한 곳에서 인간은 살만한 천국을 이루었는가? 칼 맑스의 아름다운 공산주의 사상으로 뚤뚤 뭉친 사람들이 세운 구쏘련과 중국과 북한의 실정은 어떠한가? 폴 틸리히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깊이로 추구하다가 기독교 천국을 이룬 것이 아니라 일본 신도에 귀의했으며, 쇼펜하우워도 철학적 깊이를 추구하다 불교로 귀의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에 타락했음에도 지혜가 남아 있어서 아름다운 사상을 전개할 수는 있으나 제 영혼 하나 구원 못하고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사탄의 종노릇하다 영벌의 세계로 간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미혹의 영에 속지 말아야 한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나의 전부를 가지고 남을 만나야 하는 책임, 조건적인 것 안에서 무조건적인 것을 만나며, 이 길을 떠나서가 아니라 바로 이 길 안에서 신을 만날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사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는 아라비아로 갔다. 신을 만나기 위해서 아라비아로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라비아에서 돌아온 그의 심령에는 그만치 깊이가 생겼다. 여기에 참여와 은퇴의 변증법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가장 거룩한 것이 성단에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신을 만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도피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에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며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때문이다.

 

(신을 만나기 위해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신을 만나야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사울이 신을 만나기 위해 아라비아로 갔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사울이 신을 만났기에 그가 변화되고 깊어진 것이지 신을 만나고서 아라비아로 갔기 때문에 깊어진 것이 아니다. 사울의 아라비아는 그동안 하나님을 대적했던 삶을 회개하고 씻어내는 시간이요 로빈슨의 사상과 같은 학문을 배설물처럼 버리는 시간들이었다.)

 

 

 

6. ‘새로운 윤리

 

기도와 윤리는 단순히 같은 것의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리스도교의 견지에서 볼 때 이 둘은 다 조건적인 것 안에서 무조건적 인격 관계를 통해 무조건적인 것을 만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에 관한 교리나 초월적인 것에 관한 교리도 도덕에 관한 견해를 포함시키지 않으면 그것을 재평가할 수 없다. 정말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에 관한 주장은 결국에는 사랑에 관한 주장-인격적인 관계의 궁극적인 기반과 의미에 관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자율과 타율을 넘어서는 신율을 말한다. 초월적인 것은 외부적인 것이거나 저 밖에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유한한 관계들의 궁극적 깊이와 기반과 의미를 가리키는 안에서 와 함께 또 그 밑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윤리학의 경우 이것은 현실의 구체적 관계의 모든 특수성을 관계의 깊이에서 신성한 것과 거룩한 것과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인 것을 만나고 거기에 응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경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남을 위한 인간의 무조건적 사랑을 우리 존재의 궁극적인 기반으로 인정하며 모든 관계와 모든 결단의 기반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처방하지 않는다

 

조셉 플레처는 그리스도교 윤리학은 행위의 법칙을 체계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결의론적 방법을 통해서 상대적인 사물의 세계에 사랑을 적용하려는 목적을 가진 노력을 말한다.”고 했다. 이것은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법규화하지 않는 철저한 상황 윤리이다.

 

사랑이 절대적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상황에 들어가서 그 구체적인 문제성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그것과 대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율법이 아무리 사랑의 요구를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기준보다 더 중요한 이상, 그리스도인에게서 미리 통조림식으로 만들어 놓은도덕적 판단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절대적인 윤리 기준은 없고 오직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하는 상황윤리만이 옳다는 주장은 율법폐기론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로마서가 가르쳐 주고 있다. 절대적인 기준과 원칙으로서의 윤리 기준은 있어야 한다. 다만 그 기준들이 형식화되고 율법화되어 사람 잡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야 하고 원래 그것이 만들어진 취지와 목적을 살리도록 운용하고 사는 지혜와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한다.)

 

 

 

7. 틀을 개조하는 일

 

본회퍼는 종교의 패턴으로서의 그리스도교복음을 구별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이 둘은 1900년 동안이나 우리 마음속에서 동일시되어 왔기 때문에 이것을 구별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가 이미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생활을 완전히 포기하기나 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만일 내가 말해 온 것과 같은 혁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우리에게 없다면 그리스도교는 버림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 내 신념이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형태라는 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세대의 틀에 박힌 사고방식-이것을 불트만은 신화론적인 것’, 틸리히는 초자연주의적인 것’, 본회퍼는 종교적인 것이라고 각기 자기 관점에 따라 묘사했다-이기 때문이다. ‘비종교적인세상에서 복음에 대한 종교적해석을 견지하는 것은 복음 자체에 대한 오해임과 동시에 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망각하는 처사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아무리 여기에 요구되는 노력을 귀찮게 여길지라도, 그리스도의 신앙과 생활에 관한 하나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틀 또는 변형된 신앙과 생활이다. 이와 같이 새 틀에 맞추어서 새 형태를 만들어내는 공작이 복음의 기본적 진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이것은-우리가 가장 아껴 오던 종교의 범주나 도덕의 절대적인 기준까지도 포함해서-무엇이나 다 일단 용광로에 넣어서 용해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제일 먼저 포기할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이 바로 신 자신에 관한 이미지인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중대한 궁극적 실재를 확신하게 하려면 우리는 신에 관한 영상을 모조리-‘저 위에있는 것이든 저 밖에있는 것이든 또는 그 밖의 어떠한 것이든 간에-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확신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복음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모든 피조물 중의 어떠한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으리라”(8:38,39 New English Bible).

 

헉슬리는 계시가 없는 인본주의의 종교를 지향하는 반면, 본회퍼는 종교가 없는 그리스도교를 지향하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그리스도교가 종교의 테두리에 반드시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를 해방시키려고 한 것뿐이다.

 

성서의 세계관과 다른 내재론적 세계관(범신론)의 본질적 차이점은, 전자는 모든 실재의 기반을 궁극적으로 인격의 자유, 사랑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범신론에서는 실재의 모든 면과, 그 기반과의 관계가 결국에는 결정적인 것이어서 자유나 도덕적 죄악의 여지가 없어지고 만다. 범신론은 그 표현방식으로 창조라고 하는 인격적 범주가 아니라 유출이나 진화라고 하는 기계적 또는 유기적 범주를 사용한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우리 존재의 기반과 우리와의 관계의 구조 자체 속에 인격의 자유라고 하는 불멸의 요소가 깃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존재의 구조 속에 박혀 있는 이 자유가 우리에게 (의존적 관계 안에서) 자유하게 하며, 말하자면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거리를 준다. 그런데 전통적 이신론과 유신론은 바로 이 거리를 객관화해서 저 밖에있는 신이라는 영상을 그려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초월성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신을 하나의 초개인으로 이 세계로부터 투영하거나 이 지구의 표면으로부터 하늘을 향한 거리를 반드시 말하거나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의 모든 경험 안에서 나타난 초월적인 것, 무조건적인 것을 신화의 용어로-‘또 하나의 다른 세상이라는 말로-객관화한 것에 지나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새로운 표현 방법을 평가하려면, 그것이 이 투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지를 볼 것이 아니라 그 중요한 요소들을 간직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에서 시도해 온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상징들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보고, 이미 죽어 버린 신화는 숙청해 버리고, 신 앞에서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관해서 철저하게 정직하려고 하는, 신학적 사색의 끊임없는 훈련이 없으면 교회는 쉽게 모호론자로 타락하게 되고,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행위와 예배는 점점 더 형식적이 되고 속이 텅 비게 될 것이다.

 

본회퍼의 말이다.

종교가 없는 세계에서 교회란 무엇인가? 무종교적 세속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교회는 인류를 위해서 존재할 때만 참된 교회이다. 새 출발을 위해서 교회는 그 재산 전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교회는 이 세상의 사회생활에 참여하여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도와주고 섬겨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 즉 남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해주어야 한다.

 

요약자의 결론

 

틀은 아무리 새롭게 만들어 봐야 인간이 바뀌지 않으면 도로아미타불이다. 정의와 사랑을 외치는 자들이 불법과 착취를 서슴치 않는다. 평등을 외치는 자들이 특권을 즐긴다. 틀은 항상 있어 왔고 틀의 목적과 취지는 항상 좋았다. 다만 그 틀을 운용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달라서 틀이 잘못된 것으로 비난 받는 것이다. 그리고 새 틀을 만든다는 자들도 구악을 일소한다면서 더 나쁜 신악을 만들어 온 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사람이 진정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고서는, 인류를 위한 교회라는 소망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의 논리를 보면, 이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예언자들이고 선지자들이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기성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돌맞을 각오를 하면서 진정한 신 앞에 그들을 바로 세워주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로 보인다. 신에게 참으로 솔직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보일 뿐이고 그렇게 포장할 뿐이다. 하나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현대인을 위한다는 그들의 공언과는 달리 그들은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와 멀어지는 군중들을 양산할 뿐이다.

 

결국은 이들은 자기들의 철학과 인생관을 어떻게든 퍼뜨려서 동조자들과 아류들을 얻고 교회를 흩뜨리고 성경을 갈기갈기 찢어 발기고 하나님을 깊고 깊은 존재의 바닥으로 밀어넣는 왕마귀들일 뿐이다. 왕마귀라는 말은 90이 다 된 할머니가 신앙생활 잘 하던 딸이 이런 사상들을 접하면서 변질되는 것을 보며 그 원흉 격에 해당하는 철학교수 양반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 딸의 친구들은 한신 계통 또는 민중신학을 구가하는 유명 교수들이었다. 어린 소녀 같이 아름다운 신앙이 한 철학교수 양반을 만나 함께 사업하며 로빈슨이 말하는 신앙으로 변하고 말았다. 나를 위시해서 많은 순수한 젊은이들이 이 철학교수를 만나고서는 교회와 성경을 멀리하고 결국은 하나님을 멀리하다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망나니들이 되고 말았다.

 

그들이 구가하는 자유는 사람을 성숙시킨다는 미명하에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죄를 마음껒 짓는 자유로 전락하고, 인생을 어둠과 혼돈과 공허로 채우게 하는 왕마귀의 자유일 뿐이다.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유명 대학의 학위를 받아 주류 교단의 신학교의 교수가 되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어 오늘날 교회들을 어지럽히고 있다. 교회를 차지하고 있는 세력들이 그래도 형식적으로는 바리새적이고 보수적이기에 거기에 빌붙어 살기 위해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그들은 겉보기에 신앙 좋고 지적으로 매우 탁월해 보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들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성경 해석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의 지혜로 무장한 신학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로 채워진 신학이어야 한다. 성경을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의 계시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고, 그 진리의 말씀을 내 삶의 기준과 원칙으로 살기를 힘쓰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성경대로 성령의 인도와 조명을 받으며 성경대로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들은 신을 깊이에서만 찾고, 높이와 넓이와 인격성과 완전 초월성과 타자성은 부인하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넘을 수 없는 구분을 무너뜨리면서, 현대판 신학적 범신론임을 숨길 수 없다.

 

로빈슨은 신에게 솔직한다고 하는데, 그가 말하는 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고,

사탄이고 미혹의 영이고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일 뿐이다.

그는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르고 있다.

사탄에게 솔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