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11/26 주일설교, '고난과 오래 참음', 약 5:7-11

강대식 2023. 11. 26. 16:19

2023-11-26 주일예배

본문: 5:7-11

제목: 고난과 오래 참음

 

1.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는 주님의 재림하시기까지이다.

주님 재림하시면 세상은 끝이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다 서게 되고 선악간에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

 

주의 강림은 꼭 재림만이 아니라 주님의 크신 역사 또한 주의 강림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5)

 

그가 나타나 도우심또한 주께서 강림하심이다.

사십년이 차매 모세에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천사도 주의 강림이시다.

홍해를 가르신 것도, 요단을 가르신 것도, 주의 강림이시다.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것을 보라

그와 같이 우리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하신다.

 

우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여야 한다.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하나님의 크신 역사는 그리 멀지 않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다.

변하고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지르는 것이 인간들이다.

그것이 빠른 길 같지만 결국 늦은 길이요 망쪼를 불러온다.

 

우리는 농부의 길이 참음을 본받아야 한다.

아브라함도 요셉도 모세도 다윗도 농부의 오래 참음을 본받은 사람들이다.

야고보서는 첫 장 처음부터 오래 참음 곧 인내가 우리를 온전케 한다고 말씀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2-4)

 

여러 가지 시험은 고난의 시련이요 그것은 곧 믿음의 시련이다.

인내를 만들어 내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 믿음의 시련이다.

이 믿음의 시련을 통해 우리의 성품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시련과 인내를 통한 온전한 성품이 없었기에

사울 왕과 솔로몬 왕은 탐욕과 우상숭배로 망하고 말았다.

쉽게 왕이 된 것이 오히려 화를 불러오고 멸망으로 끝을 맺었고,

후손들과 나라와 민족에게 큰 재앙을 불러 입혀 주었다.

 

사울 왕은 결국 다윗 왕을 세우게 했지만,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을 두 쪽으로 나누게 하고 멸망으로 치닫게 하는 장본인이 되었다.

왕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 왕이 되면,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자손들에게 큰 화를 불러온다.

 

왕권을 무너뜨리고 공화정 민주정이 되었지만,

투표가 올바른 지식을 따라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것이 되지 못하면,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복종하지 않다가 이스라엘처럼 멸망하고 만다.

 

인생 또한 바른 목적지, 바른 푯대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따라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다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의의 심판대에서 행한 대로 재앙을 거두게 된다.

 

이 땅에서 외식으로 상을 받은 자는 이미 받았기에, 저 하늘에서는 상이 없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한 자에게 이 땅에서도 저 하늘에서도 큰 상이 있다.

우리의 푯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함으로 모든 것을 더해 받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다.

 

끝까지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사람과 세상에 소망을 두었다가는 아름다운 열매와 종말을 맺을 수 없다.

그 많은 소유와 높은 출세가 그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고 영생의 복을 주지 못한다.

 

부자로 살았지만, 죽어서는, 혀를 서늘하게 해줄 물 한 방울 구걸하면서

영원한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는 신세가 되지 말아야 한다.

나라의 본 자손인 줄 알았지만,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신세가 되지 말아야 한다.

 

2.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

거짓 선지자들은 부와 권력과 명예를 누리고 살 때,

주의 이름으로 말하는 참된 선지자들은 고난과 학대와 죽음을 당했다.

 

세상에서는 성공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영원한 실패가 기다리고 있다.

성경이 증거하는 영원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단막극으로 끝나는 인생만을 전부로 알고 살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지옥 인생이 되고 만다.

 

우리가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다.

 

우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우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하셨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1:24-25)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은 이 주의 살아 있는 말씀에 모든 것을 걸었다.

다윗은 마음이 탐욕에 향하지 않고 주의 증거들에 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이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 인간의 운명과 성패를 좌우한다.

축복도 영광도 심판도 오직 이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 기준이고 표준이고 저울추이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성경을 즐거워하고 그의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할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를 탐하는 자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할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은 주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는가?

그것이 구약의 역사이고 살아 있는 말씀의 역사이고 증거의 역사이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듯이, 그들은 주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기들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그들을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겼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

 

그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큰 확신이 있었기에 구약의 선지자들은 자기 생명조차 아끼지 않았다.

주님의 열 두 제자들도 주님의 본을 받아 그 길을 갔고 초대교회의 성도들도 그 길을 갔다.

 

로마교회가 부와 권력을 누릴 때,

발도인들, 알비인들, 위그노들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가르친 전통을 이어받았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그 살아 있는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정부 권력과 야합하며 개혁을 흉내만 낸 먹물개혁이었고

교황 세력 대신에 정부 권력을 그 자리에 대체하였을 뿐이다.

로마교회를 대체하는 또 하나의 제도권 교회를 장악하였을 뿐이다.

 

루터는 개혁 초기에 독일 농민들의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정부와 야합하여

13만명이나 되는 농민들을 반란으로 몰아 잔인하게 학살하는 데 동조하였다.

칼빈 또한 정부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초대교회를 복원하려는 제세례파들을 이단으로 몰아

수십만을 고문하고 학살하는 데 동조하였다.

 

400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 교회사교수 윌리암스는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을 크게 두 유형으로 구분했다.

루터파와 칼빈파와 성공회들은 온건한 개혁운동이었고, 정부 권력과 동조한

행정적 개혁혹은 관료적 개혁’(Magisterial Reformation), ‘고전적 개혁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주된 이념은 개혁(Reformation)이었다.

재세례파와 신령파들은 급진적 개혁운동이었고, ‘래디칼’(radical)한 개혁운동이었다.

이들은 서구의 오랜 국교회 전통을 거부하고 콘스탄틴 이전의 교회로의 복귀를 근간으로 했다.

이들의 주된 이념은 국가 교회 형태 이전으로 돌아가는 복귀(Restitution)이었다.

 

개혁이냐 복귀냐, 개선이냐 복원이냐가, 갈림길이고, 안주냐 순교냐의 선택이었다.

여기서도 우리는 16세기 종교개혁이 로마교회를 개혁한 개혁운동이었을 뿐

초대교회의 전통으로 복귀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초대교회의 전통으로 돌아가고자 한 재세례파가 참 교회요 참 줄기였으니,

가슴을 치게 되고, 5백년을 그 교리와 신조의 율법조문에 속아온 것이 한탄스러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본 받을 것은 무엇인가?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의 고난과 오래참음인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유대교회 로마교회 개혁교회 현대교회는 항상 정부권력과 야합하여 평안을 누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 참 교회 공동체들을 고문하고 학살한 세력들이었다.

이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리고, 그 모든 이론과 생각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복종하게 해야 한다.

그 생명 길을 우리도 가야 한다.

 

3. “욥의 인내와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 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고 긍훌히 여기시는 이시니라”(5:11)

 

고난을 인내하는 자가 복이 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왜냐, 고난의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욥은 그 큰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인내하였고 갑절의 복으로 보상을 받았다.

고난은 반드시 주께서 주시는 결말이 있다.

주님이 주시는 고난은 고난 그 자체가 목적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통치하고 계심을, 반드시 믿는, 믿음이 없이는,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반드시 믿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119:71-72)

 

주님은 나를 고난을 통해 주의 교훈으로 인도하시고

후에는 나를 영광으로 영접하신다.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으로 가까이 하고,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내 생각에 기록되게 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새언약의 백성이 사는 길이다.

 

우리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 두며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자.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자.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27:13-14)

욥의 인내와 결말을 보면서,

우리 주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자.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