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4 주일설교
본문: 갈 6:14
제목: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1.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그러나’ 앞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자랑하고 있는 데 대한, 책망이 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요하였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면서, 초대교회의 기둥이었던, 야고보도 그런 경향이 있었다.
그 당시 세력을 잡고, 핍박의 가해자였던, 유대인들의 눈치를 살살 보는 편이었다.
베드로도 안디옥 교회에 왔을 때에,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까지는
이방인과 함께 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다.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베드로에게, 대면하여 책망을 하였다.
‘네가 유대인으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다.
복음 진리가 분명하고, 그대로 행함이 분명한, 사도 바울과,
아직도 세력 있는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느라 헷갈리고 있는, 다른 사도들이, 비교가 된다.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강요하지 않기로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해 놓고서도,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들 앞에서, 야고보가 보낸 일행들에,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한다.
성경도의 길을 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확신이 들기까지는, 엉거주춤하고 눈치를 보는 과정이 있겠지만,
확신이 들고나서는, 이제 베드로의 자세가 아니라, 바울의 자세로 확실히 전환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다고 하였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
성경도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너무도 충만해야 할 요소이다.
왜냐?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이론과 생각의 견고한 진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교회의 율법 조문, 개혁교회의 교리 조문, 현대교회의 철학 조문들이
바로 영으로 마음판에 쓴 것이 아니고 먹으로 머리 돌판에 쓴 것이기 때문이다.
영은 살리는 것이고,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하면서도 그들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박해를 면하려 할 뿐이었다.
그리고 할례를 받게 하려 한 것은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다면, 죄 사함도 생명도 구원도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다면, 부활도 영광도 영생도 천국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고 살고, 세상 살이에 매달리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야만 한다.
마음 중심에, 생활 중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셔야만 한다.
오직 우리의 자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여야만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애찬과 함께 성찬예배를, 모일 때마다 드리면서,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눈물어린 감사와 찬양을 했고,
우리도 그리스도를 위해,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실천하였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형제들끼리 서로와, 이웃을 용서하였다.
인종 차별, 남녀 차별, 빈부귀천 차별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꼭 따로 헌금을 하는 순서를 갖고, 섬기며 나누어 주었다.
이들의 신앙과 삶을 보고, 감동하고, 그 매력에 이끌리어, 교회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전도 전도가 아니다. 전도폭발이 아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음을 그들은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을 보여 준 것이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겼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왜, 감동과 감격과 감사가 없느냐?
교리로, 신조로, 아무리 많이 알아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감사와 찬양이 없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전혀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성령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오셨다.
2.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은
이제 세상은 십자가에 못 박혀 애착이나 미련을 둘 것이 못된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도, 세상이 주는 슬픔도, 이제 큰 의미가 없게 된다.
세상의 지배권자들이 핍박하고 박해해도,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미 이기셨기에,
영생과 부활의,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능히 견딜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죽으면 천국이요, 순교로 죽을 수 있는 영광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의 대상이요, 이생의 자랑일 뿐이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변화가 없다면,
그는 여전히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의 노예이고 그 추종자일 뿐이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살려 주셨는데도,
여전히 죄와 허물 가운데서 행하고, 이 세상 풍조를 따르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이다.
이 자는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사탄의 영이다.
복음의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그 심판으로
미혹의 역사를 보내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신다고 하셨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는 하늘로부터 진노가 내려 온다.
사람들은 그 진노와 불행과 비극이, 왜 왔는지도 모르면서, 멸망의 길로 간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니라”(약4:4)
간음은 이 세상 신을 섬기는 것이다.
세상의 배후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는 자도 결국은 재물을 섬기는 자이고 간음하는 자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이 간음의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신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라 하신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입술로는, 율법조문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도,
마음은 하나님과 멀었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했다.
세상의 부와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인간 관계도 하나님 관계도 다 팽개쳐 버리는 사람들,
세상에 종 노릇하고, 그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회심하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세상 풍속을 더 이상 따르지 않게 된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면,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따르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의 진리만이, 인간에게 참 자유와 생명을 주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 준다.
인간들이 자기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얻고자 하는 세상과 세상의 것들은,
쉬 없어질 것들이고, 가지고 갈 수도 없는 것들이고, 결국은 사망과 멸망으로 끝이 난다.
3.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대하여 나도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다.
세상에 대하여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매일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만이 주님의 제자가 능히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인 사람들이다.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죽인 사람들이다.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한다. 내가 마음을 다해 탐하는 것, 그것이 곧 자기의 하나님인 것이다.
폴 틸리히는 자기의 ‘궁극적(최종적) 관심’이 하나님이라고 했다.
사람이 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 그의 하나님인 것은, 맞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철학은 알고 성경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쇼펜하우어와 마찬가지로 불교(일본 신도)에 귀의하면서 죽었다.
인간의 철학의 귀결은, 인간이 만든 종교인, 불교이고 부처이다.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만나야, 비로소 자기를 내려놓게 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내게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같이,
나도,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함을, 비로소 깨닫고
세상도, 나도, 내려 놓고,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된다.
그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길이고, 하나님의 자녀의 길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못 만나면, 여전히 자기가 왕 노릇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다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도, 암흑의 땅으로 만들고 만다.
자신의 왕 노릇, 자기 의의 추구는, 이스라엘처럼, 멸망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게 하고,
마음 속의 자기 하나님인, 탐심과 방탕, 악독과 불법과 외식으로 인해, 화와 저주를 불러오게 한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자.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내게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또한, 내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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