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 2024-03-31 부활절
본문: 요 11:25-26
제목: 부활이요 생명이니
1. 부활에 앞서 십자가 죽음이 있었다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이 있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부활도 없다.
십자가 없는 부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은 믿지 않고
부활의 의미만 붙들려고 하는 신정통주의 신학, 철학적 신학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 이전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 없었다면 십자가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이 동정녀 탄생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란 이름으로 오신 것이다.(마1:21)
이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다.(엡1:7)
이 구원의 역사는 창 3:15부터 시작하는 모든 예언의 실행이요 성취였다.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하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영혼이 떠나가셨다.(요19:30)
주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구원 역사를 확증하는 역사였다.
오순절 성령의 부으심 가운데 사도 베드로가 첫 설교에서 증언하였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다.”(행2:22-24,32)
예수님의 부활을 본 후 사도들은 담대한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다.
가롯 유다를 대신할 제자 맛디아를 뽑을 때도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라 하였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할 때마다, 그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 사역을,
먼저 생각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려야만 한다.
이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고 단지 부활의 의미만을 논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2.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다
“나는 부활이니”(요11:25)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부활은 구원의 완성을 선포하고 인치고 확증하신 역사였다.
부활의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면, 죽음은 의미도 없는 것이고, 구원도 없는 것이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너무 많은 특권과 영광을 주시는 역사적 사건이다.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그 다음 열매들이 될 것이다.(고전15:22-23).
한 사람의 죽음이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할 원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부활이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원인이 되었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두 머리다. 두 뿌리요 두 첫 열매다.
아담과 그리스도, 모두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편 16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정확히 예언하고 있다.
베드로가 첫 설교에서 이를 인용하여 주님의 부활을 증언한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베드로는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고,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라고 하였다.(행2:23-32)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확실히 예언하신 분은 예수님 자신이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10:32-34)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부활을 증언한 사도들은 거짓 증인이 될 것이고
우리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확실히 인증해 주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이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지냈지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다.
우리도 부활할 때 그와 같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15:42-44)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게 된다.(15:4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15:51-53)
3.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새 생명(영생)을 살기 위함이다
“내가 생명이니”(요11:25)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생명이 되셨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 생명을 성령을 통해 받음으로, 새 생명을 사는,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새로운 창조와 부활이다)
그리스도인은 새 생명으로 살다가, 죽어서는 이 생명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사는 것이다.
이전 것은, 옛 사람은, 지나갔으니,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성품과 삶에서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
죽음과 부활과 생명은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로 살기 위해, 새 것으로 살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생명으로 연합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4-5)
우리가 구원 받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기 때문에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도 함께요, 그분의 부활도 함께 참여하는 바가 된다.
그의 죽으심도, 그의 부활하심도,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는 것이다.
주님과 죽음도 함께, 부활도 함께, 연합한 것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새 생명으로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땅에서와, 영원한 세상에서의, 우리의 부활된 삶을 위한 것이다.
새 생명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새겨야 할 말씀은 갈 2:20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
죽지 않은 나의 옛 사람으로, 욕심 따라, 많이 소유하고, 높이 쌓아올리려 하지만,
그것은 헛수고와 저주를 낳을 뿐이다. 사망과 멸망을 낳을 뿐이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6:14-15)
주님은 친히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어서, 우리 십자가는 광야 생활이요 고난의 연단이다.
모세의 광야 40년은 세상도 그도 십자가에 못 박히는 세월이었다.
요셉의 13년간의 억울한 노예 살이 감옥살이도 세상과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세월이었다.
다윗의 십수년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그 자신과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세월이었다.
내가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나도 세상도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살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오직 새 사람으로 지으심 받는 것이 중요하다.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 것도 아니다. 종교적 행위나 업적은 아무것도 아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만, 그것은 출발이고
이제부터는 그 새 생명으로 사는 연단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고난과 연단, 광야의 생활 없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축복을 구하는 것,
그것은 죽지 않고 부활을 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축복만 좋아하고, 광야와 고난은 싫어하다가, 광야에서 멸망 당했다.
가나안에 이르는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인도하시지 내가 내 맘대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홍해를 건넜어도, 요단을 건넜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홍해를 건넌 출애굽 1세대는, 그 다수가, 광야에서, 멸망하였고,
요단을 건너간 2세대는, 가나안 땅에서, 사사시대 왕정시대 포로시대를 거쳐 멸망을 당하였다.
내가 죽고 변화된 자만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교회도, 세상도, 개혁할 수 있다.
내 안에 형성되는 참된 소프트 파워가, 강력한 하드 파워를 구축할 수 있게 한다.
하드 파워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은, 이기요 탐욕이고, 비참한 종말을 부를 뿐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눅6:38)
권력과 부를 쥐고자 할 때가 아니라, 진리와 정의로, 모든 것을 주고자 할 때,
하나님은,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신다.
‘하늘의 됫박법’인 것이다.
고넬료의 기도(경건, 하나님 사랑)와 구제(이웃 사랑)가 하늘에 상달되었다.
이 ‘하늘의 됫박법’을, 마음으로 배우고, 믿으시기 바란다.
그것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생명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영광이고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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