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6/15 주일설교, '약속을 기업으로', 히 6:11-12

강대식 2025. 6. 15. 14:05

2025-06-15 주일예배

본문: 6:11-12

제목: 약속을 기업으로

 

1.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자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12)

 

성경을 통하여 역사를 통하여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의 기록을 만날 수 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15:4)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자.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하며 푸른 채소와 같이 쇠잔하고 말 것이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참된 축복과 영광을 가져온다.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37:3-6)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고 쓰시기까지,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아야 한다.

궁핍에도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을 때

하나님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날이 오게 하신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 우리 인생의 결말도 이렇게 아름답게 장식하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기업으로 받는 결말과 생애가 되어야 한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의 생애와 결말을 본받는 자 되어야 한다.

그럴려면,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발도인들과 같이,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해야 한다.

 

변함없이 동일한 부지런함으로 살고,

이루어질 때까지,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야 한다.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나아가야 한다.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데까지 나아가자.

잠시 받은 고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는

우리의 생애가 되게 하자.

 

우리가 우리를 위해 쌓아 놓을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에게 줄 때,

하나님은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우리에게 안겨 주심을 믿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할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더해 주심을 믿자.

 

2. 믿음과 오래 참음이 있어야 한다

 

게으르지 않고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말미암아”(12)

 

부지런하고자 하면 게으름을 떨쳐 버려야 한다.

믿음을 잃지 않고 오래 참아야 단단한 음식도 먹을 수 있는 장성한 자가 될 수 있다.

믿음과 오래 참음은 붙어 다니는 말씀이다.

 

오래 참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고, 믿음이 없이는 오래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광야를 통과해야 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한다.

불과 물을 통과해야 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려야 한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10:36)

 

모세의 기도가 우리에게 위로와 인내와 소망을 준다.(90:15-16)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괴롭게 하신 날수가 많으면, 화를 당한 연수가 많으면,

그 만큼 우리를 기쁘시게 하시는 날수와 연수가 많아진다.

하나님의 보상은 공정하고 풍요로우시다.

 

그 과정을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하였고

모세는 광야생활 40년이 차매 가시나무 떨기불꽃 가운데서 천사를 보내 주셨다.

가시나무 떨기는 모세의 광야 40년이요, 하나님은 불꽃으로 함께 하셨음을 보여주신다.

가시나무 떨기를 불꽃으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때가 된 것이다.

 

요셉은 노예로 팔리고 억울한 감옥살이 끝에 술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준 후에도

2년이 지난 후에야 애굽의 총리로 세워주셨다.

 

때와 시기는 우리의 알 바가 아니요 하나님만이 아신다.

이 모든 고난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들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면서, 고난 가운데서도 형통하게 하시면서,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신다.

 

내 경우,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을 만나는 긴 세월 끝에, 하나님은 발도인들을 만나게 하셨다.

그리고 초기교회의 실상을 비로소 만나게 하셨다.

괴롭게 하신 날수들을, 화를 당한 연수들을, 갈레 갈레 갈림길로 걸어 왔다.

 

믿음과 오래 참음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데 있어서 필수 요소이다.

믿음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믿음의 인내에 더하여 성경은 소망의 인내를 말한다.

 

3.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6:11)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통시성이 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질 일과 영원한 천국에서 이루어질 일들이 함께 표현되고 있다.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심판들이 마지막 심판 때에 이루어질 일들과 중첩되어 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구원과 영원한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이 시대를 관통한다.

 

통시성의 관점에서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곧 통시에 볼 줄 알아야 한다.

구속사는 현재와 미래가 통시성으로 관통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모세만 구속사를 이루는 것이 아니고 현재 나의 일생도 구속사의 일부인 것이다.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른다는 것은 현재와 미래가 관통하며

현재가 곧 미래이고, 미래가 곧 현재 되게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것이다.

소망을 실상으로 붙잡고 사는 것이 믿음이요,

보이지 않지만 증거로 붙들고 사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곧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을, 현재의 소망으로 붙드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것. 받는 자가 되는 것이 우리가 간절히 붙들어야 할 소망이다.

약속의 소망을 끝까지 풍성하게 누리며 사는 것, 그것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이다.

 

오랜 세월 광야에서의 훈련과 연단 중에서도,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야 한다.

믿음과 오래 참음 가운데, 끝까지 소망을 품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의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신다.

 

믿음과 오래참음 가운데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들의 최고가 누구일까요?

요셉은 애굽의 총리였고, 모세는 애굽에서의 해방이었고, 다윗도 가나안 땅 전체 정복이었다.

크게 보아도 지중해 남부 동부 일부에서의 기업이었다.

 

그런데 발도인들은 유럽 전체의 교회와 세상을 기업으로 받은 최고였다.

4세기로부터 시작하여 13세기에 이르기까지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으로,

13세기에 전 유럽의 교회와 세상을 폭발적으로 개혁한 발도인들이 최고의 기업을 받은 것이다.

 

참다운 종교개혁은, 16세기의 루터와 칼빈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참다운 종교개혁은 13세기에, 발도인들의 복음의 능력과 삶의 모범으로,

유럽 전역에 걸쳐, 폭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14-15세기의 르네상스를 낳았다.

루터와 칼빈의 책들이 팔린 지역과 발도인들이 개혁을 이룬 지역이 일치한다고 한다.

 

발도인들과 위그노들은 이단이 아니었다. 그들이야먈로 참 교회의 역사였다.

로마교회의 전통을 따르니까 개혁교회 현대교회도 여전히 그들을 이단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 지도자들 곧 바르브들은 남종이든 여종이든 차별 없이 바울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발도인들에 비하면, 유대교회, 로마교회, 개혁교회, 현대교회는 서로 닮은 쌍둥이들이다.

그 교회들은 세상을 주름잡았지만, 주님의 경고의 대상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이었다.

초기교회의 뿌리와 영 줄기와는, 전혀 다른 뿌리요 영 줄기였다.

 

주님의 말씀대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역사였다.

많은 이들이 크고 화려한 교회들이 인도하는 멸망의 큰 문, 넓은 길로만 갔고 현재도 그러하다.

그것이 유대교회였고 로마교회였고 개혁교회였고 현대교회인 것이다.

 

사도들이 가르친 가르침의 전통, 초기교회의 영적인 전통을,

발도인들이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그들이 살았기 때문이었다.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동일한 부지런으로 살았고,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알프스 험난한 피에몽 계곡 속에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웠다.

주야로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고 실천하며 동일한 부지런으로 살았다.

그 험악한 환경에서도, 로마교회의 그 잔인한 토벌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으로 목숨을 바치다 보니 유럽 전역은 복음화 되었고 르네상스를 낳았다.

 

이제 시온산은 알프스의 피에몽 계곡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루살렘도 하나님이 정하신 곳에 동시에 세워가야 할 것이다.

성경도 사명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5백년 종교개혁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초기교회와 발도인교회의 전통을 회복하고,

교회개혁과 르네상스를 폭발적으로 함께 이루는 것이다.

 

헤브론 사역은 그 사명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받는 기업이다. 심히 창대하게 키워갈 기업이다.

헤브론 기업은 모세의 출애굽 사역과 다윗의 왕권 사역으로 심히 창대한 기업이 될 것이다.

약속이 주님의 때에 이루어지기까지,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으로,

동일한 부지런으로, 준비하며 은혜와 평강을 누리자.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으면 그리하리라”(1:23)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