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청교도 영적 부흥 운동
1. 청교도 영적 부흥 운동의 역사
청교도 운동의 기원은 훨씬 전이기는 하지만 기도방식 통일법령'이 있었던 서기 1559년경에 시작되었다고 많은 신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서기 1662년 '기도방식 통일법령'에 뒤따른 수난과 발전기를 공식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리고 17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영국의 청교도 운동이 일단 막을 내렸다.1)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16세기 후반 청교도주의를 미심쩍어한 '엘리자베스' 여왕 I세 때 영국 국교회 내의 개혁운동으로 시작되었으며 청교도주의를 두려워한 '제임스' I세 때 급성장했고 그것을 싫어했던 '차알스' I세와 그의 대주교 '월리암 로드' 때에 확장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을 존경해 마지아니한 '크롬웰' 때에 비록 짧지만 당당한 통치감을 맛보았고 그것을 싫어했던 '차알스' ll세와 그의 사교들 때에 끝이 났다. 그러나 청교도주의는 후에 뉴잉글란드에서 무르익었다. 18세기까지는 종교적 문화적 규범으로서의 명목을 유지하였고 그 후 '조나단 에드워드'에 의해서 칼빈주의적 재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19세기까지 영향력을 미쳤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불타고 있다.2)
영국에서의 기독교 부흥이 종교개혁 바로 직후에 일어났으므로, 영국에서의 청교도 운동(Puritan Movement)이 경건의 회복을 교회가 세상에서 발전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그토록 확고하게 믿었던 것은 별로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 그 자체가 오순절-교회에 새로운 생명이 용솟음쳤던 약동기로서, 사도 시대에 기록된 실례들에 의하면 3천명이 하루에 개종했으며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道)에 굴복하게 되었고 그 이상 잘 믿어지지 않는 사건들이 즐비할 정도였다-이후의 가장 거대한 부흥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과 더불어 청교도 부흥 운동은 여러 측면에서 연구되어 왔으나, 이 부흥 운동들의 주요 특징들, 즉 예를 들자면 그 영향력의 광역성(廣域性), 성경에 주어진 독자적 위치, 도덕적인 경솔성의 격에 맞는 변환(變換)같은 것들이 모두 경건의 결과라는 사실이 너무 자주 간과되어 왔다.
성령이 능력의 날에 퍼부어 질 때, 그 결과가 모든 사회와 모든 국가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친다. 죄의 회개,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려는 열심, 그리고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진리에 대한 의뢰 등은 불가피한 결실들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성경읽는 나라의 사람들이 되게 하고 그처럼 인간의 본성에 아첨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자만심을 혐오한 신조(信條)의 증언자가 되도록 영국과 스코틀란드의 영적방향을 그토록 신속하게 바꿔버렸던 영향력에 관해서 의아해하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작가들이 그 현상을 정치적 사회적 고찰을 통하여 설명해보려고 시도해 왔다. 그들은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이룩한 성공이, 다시 일어나리라고 기대될 수 없는 역사적인 상황들의 기묘한 결합을 통해서 일어났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설명은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성경에서 그들은 위에서부터 성신이 부어지게 될 때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된다(사 32:15)는 말씀을 읽었다. 또한 그들은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슥 4:6)는 말씀도 읽었다. 그러하여 그들은 그들 시대의 영적 재생 (再生)이 모두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자 그들은 즉시 또 한 가지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그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성령의 역사에 전혀 시간적인 제한을 두고 있지 않으므로, 종교개혁에서 사도시대의 승리가 반복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종교개혁의 모든 성공도 또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래서 그 때에 종교개혁의 신앙이 회복되었는데, 이는 회생된 기독교(RevivaI Christianity)라 불리워질 수 있다. 이를 따랐던 청교도들이 진리의 이 분야에 주었던 관심은 오고오는 시대에 폭넓게 영향을 끼쳤으며, 영어세계에 개신교 신앙의 부흥을 위한 유서깊은 학교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비결을 주었다. 실로 이 견해가 널리 보급되었으므로 19세기까지 특히 부흥의 문제에 관해서 책을 쓴 모든 저술가들이 청교도적 입장을 제시하였다.
영국과 스코틀란드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시작은 국민들 가운데 있었던 성경에 대한 기갈에 의해서 두드러지게 일어났다. '틴델'의 신약성경 영어번역판이 1526년 이래 계속하여 두 지역에 유포되었으며 그 바로 후에 비록 초기에 수는 적었으나 설교자의 훈련기관이 나타났는데, 그들의 목회는 오랫동안 흔히 볼 수 없었던 놀라운 효과를 가져왔다. 서기 1546년에 순교한 스코틀란드인 종교개혁자‘죠지 위스하르트’(George Wishart)에 대해서, 우리는 그의 옥외 설교에 관한 다음과 같은 평가를 읽을 수 있다.
"그는 모크라인 남서쪽의 황무지 끝에 있는 한 제방(堤防)으로 와서 그 위로 올라갔다. 모든 군중들은 그 주위에 서기도 하고 앉기도 하였다(하나님께서 상쾌하고 따뜻한 날씨를 주셨다). 그는 세 시간 이상 설교를 계속했다. 그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놀랍게 역사하셨으므로, 설교는 그 근방에서 가장 악독한 사람 중의 하나인 쉬엘의 지주 '로렌스 랭킨'(Lawrence Rankin)을 회개시켰다. 그의 두 눈으로부터 어찌나 많은 눈물이 흘렀는지 모든 사람이 다 놀랐다. 그의 참 회개는 위선이 아니었다. 그의 생활과 언사가 오고오는 모든 시대에 그것을 증거하였다"3)
이와 같은 광경이 북쪽 왕국에서는 너무 빈번해서 일상적인 것이 될 정도였다. '존 낙스'(John Knox)는 서기 1556년 5월에 아직까지도 그 나라를 장악하고 있던 가톨릭세력의 호된 공격을 받으면서도 에딘버러(스코틀란드의 수도)에서 계속 10일 동안 부흥집회를 가졌다. 또한 그가 1559년 다시 스코틀란드로 돌아왔을 때 영적 부흥이 불붙듯이 일어났다.
'낙스'는 프로테스탄트의 성장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를 어찌나 증가시켜 주셨던지 마치 사람들이 구름 속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듯이 불어났다”는 글을 썼다.4) 서기 1559년 6월 23일에 쓰여진 한 영국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금 40일 이상 동안이나 나의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선포하시기 위해 나의 조국에서 나의 입술을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심지어 내가 내 자신의 시체를 만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의 거룩하실 이름은 찬양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귀족과 천민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말씀에의 기갈이 어찌나 놀랍도록 거대한지, 그것은 나에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구의 북쪽 끝에 있는 이곳에서 승리를 거두시리라는 위안을 주십니다.”5)
이 영광스러운 시기를 되돌아보면서 스코틀란드의 교회역사가 '커크톤'(Kirkton)은 후세에 "스코틀란드 교회는 교회들 가운데서 매우 독특한 양상을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경탄을 금할 수 없는 것은 다른 나라들에서는 주님께서 한 도시나 동네나 가족의 소수만을 믿게 하는 것으로 충분히 생각하고 더 많은 부분의 사람을 흑암에 남겨두셨으나 스코틀란드에서는 국가 전체가 하나 같이 개신하였다. 그래서 그 후 10년여 간에 가톨릭교적인 것은 스코틀란드에서 거의 사라졌으며, 이 진정한 개혁된 신앙을 따르지 않고 그대로 가톨릭교에 남아 구습을 지키던 사람은 채 열 명도 되지 못했다. 비교가 되지 않았다. 보라 ! 여기에 하루아침에 태어난 한 새로운 나라"가 있다고 기록하였다.6)
내부의 영적인 확신에 의해서라기보다 외적인 설득에 의해서 납득된 절대다수 때문에 허용이 되어 질 때까지, 스코틀란드 종교개혁의 역사는 그 당시 복음이 성취했던 거대한 성공에 대한 감동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실로 그것은 위대한 부흥이었다.
이 부흥은 영국에도 적용되었다. 성경의 소유와 불법설교에 대하여 가장 혹독한 형벌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관심이‘틴텔’신약성경이 출현한 후인 '헨리' 8세 통치 후반기에 급속히 퍼져나갔다. 소년 왕 에드워드' 6세의 통치기간(1547-1553)동안,‘라팀머'(Latimer), '후퍼' (Hooper), '브래드포드'(Bradford) 등에 의해서 행해진 복음의 공공연한 설교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웨스트민스터 성 마가렐 교회의 기록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얼마나 육박했었는가를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그것은“라팀머 박사가 설교했을 때 부서진 의자 몇 개를 수리하는데, 1실링 6펜스가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죤 쥬웰’(John Jewel)은 몇 년 후에 있었던 런던시의 야외 군중집회에 대하여 가끔 바울의 십자가(Paul's Cross)라 불리는 광장에는 6천 명의 사람들이 함께 모이곤 했는데, 그들은 교황숭배자들에 대하여 매우 통탄해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들은 영국의 종교개혁이 왕실에 의해서 취해진 일련의 법률적인 처벌들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왕성했음을 보여준다. 정치적인 결정이 많은 제제를 가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메리튜더의 재위기간(1553-1558)동안 거의 300명에 달하던 프로테스탄트를 화형에 처한 정책은 이 신념이 어떤 힘도 뿌리를 뽑을 수 없도록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심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웅변해줄 뿐이다. 메리여왕이 사망하자 최후의 영국 가톨릭왕조인‘튜더’(Tudor)도 사라졌으며, 2년 후인 1560년에는 스코틀란드 의회가 정식으로 스코틀란드에서 가톨릭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메리여왕의 통치기간 동안 불어 닥쳤던 박해의 폭풍은 이 새로운 신앙의 뿌리를 시험해 보는데 불과했다. 다수의 젊은 영적 지도자들을 일시 추방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대륙의 개혁교회와 더욱더 긴밀한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두 사람의 대륙신학자, 즉 마틴부쳐(Martin Bucer)와 피터 마아터(Peter Martyr)의 영향은, 그들이 각기 에드워드 4세 시대에 케임브리지와 옥스포드에서 가르쳤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영향이 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에 200여명의 추방자들이 제네바에 모여 무엇보다도 강의실에서처럼 강단에서도 능력있는 '칼빈'(Calvin)의 사역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 스위스 알프스에 있는, 피난처로부터 '낙스'와' 크리스토퍼 구드맨'(Chistopher Goodman)은 스코틀란드로 갔으며 한편 다른 사람들은 1558년 '엘리자베스' I세 취임 후에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 영국과 스코틀란드에서 두 그룹이 한 원친에서 발원한 두개의 강물처럼 평행선을 그으며 발전해 나갔다. 그 원천은 제네바가 아니라 그 추방자들이 새로이 번역하고 많은 난외주를 붙여 1560년에 출간한 성경이었다. 그때로부터 1644년 사이에 이 제네바바이블(Geneva Bible)이 무려 140판이 출판되지 않을 수 없었으니, 한 현대의 저술가 지적하는 대로, 그것은 두 지역에 있는 모든 장로교와 청교도 가정에서 읽혀졌다.
이 두 흐름이 1643년에 열린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소집에서 다시 서로 함께 만났을 때, 그들은 복음적인 교회의 위대한 진리를 무엇으로도 필적(필적)할 수 없는 표현으로 작성된 신앙고백(the Confession of faith)과 대소요리 문답 (the Larger and Shorter Catechisosns)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그들의 복음에 대한 이해와 실질적인 신학에 있어서 그때 영국의 기독교인들과 스코틀란드의 기독교인들은 하나였다. 그래서 스코틀란드 성직자의 성경주해서가 런던에서 열렬하게 읽혀졌으며 또한 영국 청교도들의 작품들이 변경 북쪽(스코틀란드)에서 많이 읽혀졌다. 1560년에 명국과 스코틀란드의 복음주의자들이 당면했던 문제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 즉 공식적으로 신교국이 되었던 나라들에서 교구수준으로 복음을 널리 전파할 필요였다. 영국에서 이러한 노력에 대해 가장 주요한 방해물은 교회의 자체 압력이었다.
교회는 의회의 법령에 의하여 '개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면에서 종교개혁 이전의 낡은 영적 상태에 남아있었다. 그래서 1560년대에 처음으로 별명이 만들어진 소위 '청교도'(淸敎徒)들은 그다음 세기에 스스로에게 국가적인 교회 안에서의 쇄신의 작업을 부과했는데 이 작업은 1662년 통일법령(Act of Uniformity)이 통과된 이후 그들 대부분이 배척받음으로써 종결되었다. 청교도시대는 이 100여년의 기간에 걸쳐 있었다.
스코틀란드 교회는 처음부터 영국국교회의 반 개혁된 상태가 영국에서 불러일으켰던 분규 같은 것을 겪지 않았다. 일격에 오래된 사제제도와 감독제도는 단지 가톨릭고지(Catholic Highland)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위치를 상실하였으며, 개혁교회의 지도권은 '낙스'(1514-1572)와 그의 형제들의 수중에 있었다.
그러나 장로교의 교회정치 형태가 고위성직자제도의 타락을 방지하고 성경적인 교회제도의 사용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나, 한편 이들로 하여금 방해받지 않고 계속되도록 오래 두지는 않았다. 스코틀란드의 제임스 4세는 그의 어머니인 스코틀란드인 메리여왕보다 체험적인 신앙에 대한 열정이 약했다. 그는 1567년 왕위로부터 폐위되었으나, 곧 그는 '낙스'의 후계자에 반대하여 스스로를 취임시켰는데, 이 행동은 그에게 더 큰 권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여 1603년에는 영국의 왕 '제임스' I세가 되었다. 그는 왕의 신성한 권리를 주장하고 "무감독, 무왕"을 표어로 삼았다. 그는 자발적인 감독들의 도움을 받아 스코틀란드 교회의 독립성을 속박하고 영국 청교도들을 억압하였다.
이것이 바로 마침내 1642년의 시민전쟁(Civil war)과 그의 아들 '차알스' I세의 패배를 불러온 정책이었다. 청교도들과 언약자들(Covenanters: 이 말은 보통 스코틀란드 형제들에게 사용되는데, 개혁교회를 주장하였던 그들의 국가적인 서약에서 유래하였다)에 대해서 권력을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둘 다 날로 번창했으며 치솟아 흐르는 영적 생명의 조류 때문에 그것이 원하는대로 소멸될 수 없었다.
청교도 설교자들의 학교가 두 지역에서 생겨났는데, 그들은 실로 그들의 복음이 말로만 이르지 아니하고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살전 1:5)된 것이라고 말해질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이런 학교의 묘상(苗床)이 되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 (Thomas Cartwright)가 서기 1560년대 후반기에 이 운동에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가 이때에 설 메리 교회에서 행한 설교가 어찌나 인기가 있었던지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몰려온 청중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사찰이 부득이 창문을 떼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카트라이트'와 몇 사람들은 그들의 담대함 때문에 곧 파면되었으나, 이 운동의 슬로건은 계속되었다. "설교된 말씀의 능력에 의해서 개혁되도록 기도하라."7)는 것이다.
1570년 이후 계속해서 '리차드 로저스' (Richard Rogers), '죤 다드'(John Dod), '아더 힐더샴' (Arthur Hildersham)같은 '카트라이트'의 친구들이 이것을 교구수준에서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 후 30년 동안에 이 소수는 홍수와 같이 불어났다. 한편으로는 서기 1584년 '월터 밀드메이' (Walter Mildmay)에 의한 케임브리지 내의 임마뉴엘 대학(Emmanuel College)의 설립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의 관리를 위하여 가능한 한 많은 적합성을 제공하기 위하여')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월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의 개종에 의해서 이와 같은 결과가 일어났다.
'퍼킨스'는 '엘리자베스'가 즉위한 해에 태어나서 서기 1577년에 케임브리지의 그리스도 대학(Christ's college)의 학생이 되었는데, 그때에 그는 아무런 영적 관심도 없었다. 위대한 변화는 그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에 찾아왔다. 24세의 나이에 그는 자기 대학의 특별연구원(Fellow)이 되었으며, 그 후 1602년에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15년 동안 그 대학도시에 있는 성 앤드류교회 (St.Andrew's Church)에서 설교하였다. 이러한 역량을 가지고 그는 엄청난 영향을 남겼다. 심지어 1613년 '토마스 구드윈' (Thomas Goodwin)이 케임브리지에 올라갔을 때,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준다.“온 도시가 '퍼킨스'의 목회에 관한 이야기로”8)꽉 차 있었다고 하였다. 사무엘 클라크(Samuel Clarke)는 “퍼킨스 목사님은 훨훨 타오르는 찬란한 빛을 설교해 주셨으며, 그 섬광은 온 나라 방방곡곡에 까지 날아가서 비쳤다.”9)고 말한다.
이 같은 능력이 임마뉴엘 대학의 초대 학장인‘로렌스 카더톤’(Lawrence Chaderton,1536-1640)의 사역에도 임했는데 , 그는 서기 1622년에 같은 청교도인 '죤 프레스톤' (John Preston)을 후임으로 정하고 사임하였다. '카더톤'은 또한 15년 동안이나 케임브리지 성 클레멘트 대학에서도 강의했는데, 그가 72세가 되었던 서기 1618년에 교단을 떠나려하자, 40명의 목사들이 그들의 개종이 그에 의한 것임을 밟히면서 계속 강의해 주기를 간청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토마스 구드윈'은 한케임브리지 대학 친구의 말을 인용했는데, 그 친구는 '카더톤'의 설교에 수반되는 죄의 자각에 관해서 말하면서 그가 '카더톤'이 복음을 설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라 이름하는 태양이 더러운 곳을 비추는 것 같은 깨달음을 가졌다고 공언했다고 하였다. 한번은 '카더톤'이 그 시간동안 설교하고 끝내기로 약속했었는데, 끝나려하자 무리 가운데서 “학장님, 제발 계속해주세요! 계속해주세요!”10)하는 외침이 터져 나왔기 때문에 그만 둘 수가 없었다.
16세기 말경에는 케임브리지가 청교도들의 첫 세대에 의해 교구수준에서 뿌려진 씨앗으로부터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1574년부터 1618년까지 에섹스 지방의 웨더스휠드에서 많은 결실을 보며 힘써 일했던 '리차드 로저스'는 그가 교구학교에서 가르쳤던 옛 제자 중의 한 사람인 '폴 베인즈'(Paul Baynes)가 1602년에 성 앤드류교회 강단을 이어받은 '퍼킨스'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당국은 '퍼킨스'와 같은 또 하나의 인물이 활동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베인즈'를 정직시켰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키는데 도구가 되었다.
그 중에는 후에 청교도 시대의 가장 성공적인 설교가 중의 한사람이 되었던‘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도 있었다. '십스'가 1610년 케임브리지 성 삼위 대학(Holy Trinity)에 강사로 임명되었을 때, 몰려오는 청중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 특별 회랑(回廊)을 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 1615년 이후 그는 런던의 그레이 법학협회(Gray's Inn)에서 '설교자'가 되었으나 1626년 성 캐더린 기념관(St. Catherine's Hall)의 책임자로서 케임브리지에 다시 돌아왔으며, 그 후 1635년 그가 죽을 때까지 이 직무와 런던의 목회 일을 겸임하였다. 이 시기 동안에 성 캐더린 기념관의 특별연구원의 한 사람이 '토마스 구드윈'이었는데, 그는 이때 행한 한 설교에서 케임브리지에 임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만일 어느 시대 또는 어느 장소에나 절정(絶頂)이 있으며 또는 있어왔다면, 지금 영국이 그러하다‥‥이 복음이 이 나라와 이 도시를 주님의 손에 잡힌 영광의 면류관이요, 예루살렘이 그렇게 불리워졌던대로 온 세상의 영광으로 만들었다."11)
청교도시대가 재생의 시대였다는 것은 우리가 케임브리지에 있었던 설교자들의 이 묘상으로부터 배출된 교역자들의 목회담을 들을 때 밝히 드러난다.
'퍼킨스' 시절에 케임브리지의 한 학생었던 '월리암 구지'(William Gouge,1575-1653)는 1608년 런던 블랙흐라이어스에 있는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45년 6개월을 봉직했는데, 운집하는 교인들에게 일요일에 2회, 수요일에 1회 설교하였다. 히브리서에 대한 그의 주해설교는 1,000회를 넘었는데, 그가 죽을 때까지 출판하려고 완성시켰던 원고의 반만이 저작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 인물에 관한 기록을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그리스도 안에서 연노한 아버지'로 만드셨으므로, 수 천 명의 사람들이 그의 목회에 의하여 개심하고 신앙의 성장을 이루었다”는 기록이다.
‘사무엘 훼어클라프’(Samuel Fairclough, 1594-1677)는 1623년 케임브리지를 떠나서 동 앵글리아에 있는 바나더스톤으로 갔다. 6년 후에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17마일 떨어진 케딩톤으로 옳겨왔는데, 거기서 그는 대축출(the Great Ejection)때까지 있었다. 그가 있었을 때 그곳은 불신과 무지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그가 거기 있은지 얼마 안 되어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서, 하나님을 공경하기로 고백하지 않은 집은 20 집에 한 집도 채 안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훼어클라그'의 목요강좌를 듣기 위하여 말을 타고 물려들었으며 오래되지 않아 잊혀졌던 영적 축복의 계절이 도래했다. '사무엘 클라크'는 이렇게 말한다.
“케딩톤 교회는 매우 붐비었기 때문에(그 교회가 그 지역에 비해 매우 크고 넓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몇 시간 앞서 가있지 않으면 들어설 수가 없었으며 대개 바깥 벽에까지 떼를 이룬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멀리서도(어떤 사람은 20마일 이상 되는 곳에서) 왔으므로 교회마당이 마치 울타리에 매여진 말들로 길다랗게 바리케이트쳐진 것처럼 된 것을 볼 수 있었으며, 한편 그 주인들은 그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들으려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12)
하버힐에서 그의 일을 계승했던 사람은 모든 청교도 설교자들 중 가장 위대한 '경각자'의 한사람이요 그의 목회가 얼마나 큰 능력으르 이루어졌던지 18세기 중반에도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죤 로저스'(John Rogers)인데, 그는 웨더스휠드의 '리차드 로저스'의 조카로서 그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임마뉴엘 대학에서 1558년부터 1592년까지 공부하였다.
서기 1605년에 그는 하버힐로부터 그 아름다운 데드함 골짜기에 강의자로 초대되었는데, 목회 하에서 일어난 거대한 영적수확으로 유명했었다. "불을 얻으러 데드함으로 가자!"는 말이 그의 동시대인들 사이에 유행어가 되었다. 데드함으로 찾아왔던 사람들 중의 하나가 '토마스 구드윈'이었는데, 그는 그때 케임브리지의 학장으로서 갔으나 후에 그가 '구드원' 박사가 되고 옥스포드의 막달렌 대학의 학장이 되었을 때에 그때의 기억을 '죤 하우이'(John Howe)에게 회고했는데, 그가 그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는 나에게 그의 젊은 시절 케임브리지의 학생이었을 때 에섹스에 있는 데드함의 '로저스'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마음먹고 그가 강연하는 날을 잡아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케임브리지로부터 데드함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그 설교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경을 부인하는데 대해서 훈계를 받게 되었다. '로저스'는 우리시대에 성경이 더욱 더 부인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역을 맡아서 훈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원참 ! 나는 성경을 가진 너희들을 오랫동안 신임해 왔다. 그러나 너희들은 성경을 천대했다. 집집마다 성경은 모두 먼지와 거미줄로 싸여 있다. 너희들은 그것을 펼쳐보려 하지 않는다. 너희들이 나의 성경을 그렇게 사용하고 있지 않느냐? 좋다. 너희들은 이제 더 이상 나의 성경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가 자기 방석으로부터 성경을 들어 올렸다. 그가 그것을 가지고 나가버리는 듯 보이더니 곧 성경을 두고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께 사람 역을 맡아서 간구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울면서 매우 진정으로 간청했다. '주님, 저희들에게 무슨 일을 하셔도 좋사오나 성경만은 우리에게서 가져가지 마소서! 우리의 아이를 죽이고 우리의 집을 불사르고 우리의 재산을 거두어 가시더라도 당신의 성경만은 우리에게 남겨주옵소서! 당신의 성경만은 가져가지 말아 주옵소서!' 그리고 나서 그는 다시 사람들에게 하나님 역을 맡아서 말한다. '그래! 네가 분명히 그랗게 말했지? 내가 너희에게 잠시만 더 참아주겠다. 여기 너희에게 주는 나의 성경이 있다. 나는 너희들이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세심히 보겠다. 너희가 이것을 더 사랑하는지 너희가 이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지, 너희가 이것을 더 열심히 읽는지, 그리고 이것을 더 활용해서 이렇게 따라 사는지.'
'구드윈' 박사님이 내게 말씀해 주신 바에 의하면, 이 행동으로 그분은 모든 회중에게 이상한 자세를 갖도록 만들었는데, 그는 이런 회중을 그의 전생에서 볼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 장소는 실로 보킴호수였다.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흘리는 눈물로 호수를 이루었다. 그 자신도 회고하기를 그도 나와서 돌아가는 길에 말을 타야'했는데, 말의 목떨미에 매달려 15분 동안이나 가누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으며, 그가 말에 올라탈 힘을 갖기 전에 그에게 이상한 감동이 왔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을 부인한다고 훈계 받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변화가 왔다고 말했다.”13)
'죤 로저스'의 목회에 대한 또 한사람의 증인으로 '죤 앵기어'(John Angie.)가 있는데, 그는 목회를 위한 준비를 마치는 동안 한때 '로저스'의 지도를 받았다. '앵기어'는 “'로저스'가 그의 목회사역에 있어서 열정과 성공의 천재”였다고 말하면서 그 당시에 영원한 문제들이 중요하다는 의식이 데드함에 모인 수많은 교인들에게 어떻게 압도했는가를 회상한다.
어느 날 로저스는 설교단 위에 있는 닭집의 지주를 붙들고서 소름끼치도록 고함을 치며 멸망 받은 자의 고통을 알려주기도 했다. 또 어느 날 로저스가 결혼식을 주례하였을 때, 그는 결혼예복의 필요성에 대해서 설교하였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어찌나 효험 있게 만드셨던지 결혼식전은 쓰라린 비탄으로 변했으며 결혼식장에 있었던 목사들은 그 설교를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조언하는데 고용되었습니다.”14)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동안 300여 년간 존속되어온 몇 개인의 목회담 중의 하나를 접할 수 있는데, 그것은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의 자서전이다. 인격적인 경건의 괼요를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양심을 깨우쳐 준 설교가로서, '박스터'는 후기 청교도들 가운데서 우수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목회 중 가장 기억될 만한 부분은 워세스터샤어의 키더민스터에서 이루어졌다. 처음에 1642-6년의 시민전쟁 전 2년 동안 있었고 그 후 평화가 다시 회복된 1649년대 후기에 다시 맡아서 1660년까지 계속 있었다. 키더민스터에서 일어났던 대변화를 회고하면서, '라스터'는 1666년경에 이렇게 썼다.
"내가 처음에 거기로 갔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부르는 가정은 한 거리에 한 가정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잠시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변해 있었습니다. 진정한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우리에게 그들의 진실한 희망을 주지 않았던 집은 거리의 양쪽에 한 가정도 지나지 않는 거리도 여럿 있었습니다‥‥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또한 내가 멀리 다른 곳에 가서 설교했던 강좌에도 넘치는 용기를 주셨으며 워세스터 및 클레오베리 등지에서와 특히, 더들리와 쉐프날에서 내가 처음 설교했던 곳이기도 한 앞의 장소에서는 가난한 못장이와 다른 노동자들이 내가 런던에서 항상 보아왔던 대로 교회 가득히 몰려들었을 뿐 아니라 창문이고 어디고 할 것 없이 매어 달렸습니다‥‥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구주를 찬송하기 위해서, 더우기 나를 그토록 수많은 년 수 동안 그토록 적합한 일에 놀라운 성공을 얻도록 사용해 주셨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내가 여기에 이 기억의 불기둥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인 2천명 정도의 촌락이였던 키더민스터는 리차드 박스터에 목회에 의해서 대부분 회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들을 “대부분 무지하고 교양 없고 술 마시고 떠드는 사람들‥‥그들은 생명 있는 진실한 설교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목회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으며, 박스터 자신의 회고를 통해 알 수 있다.
“회중은 대개 가득 찼기 때문에 내가 그곳에 온 후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섯 개의 발코니를 지어야 했다(회당이 없을 때 이 교회는 약 천명을 수용했다). 우리는 비공식 집회들도 가득 찼다. 주일날 길거리에서 난잡한 모습은 발견할 수 없고 길을 지나간다면 백여 가정이 시편을 찬송하고 설교를 되풀이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내가 그곳에 처음에 왔을 때에는 한 거리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정은 한 가정이었으나 내가 그곳을 떠날 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가정은 여러 거리에 몇 가정밖에 안되었는데 그들은 진정한 경건을 고백하지 않음으로 우리에게 그들의 진실성에 대한 소망을 주지 않았다. 가장 좋지 못한 사람들은 여관이나 주점에 있었기 때문에 대개 각 가정에 있는 사람들은 경건하게 보였다‥‥내가 개인 면담과 그들을 교리문답하는 일을 시작했을 때 마을 전체에서오기를 거절한 가족은 매우 적었다.‥‥(박스터는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지 않거나 표면상으로 경건한 삶에 대해 진지한 약속을 하지 않고 나와 헤어진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15)
박스터는 개인적인 영적 교제를 위해 조직적으로 가족들을 면담했다. 한 주에 이틀을 할애하여 매일 7,8가정 비율로 가족들을 만나고 매년 교구의 8객 가정들과 모두 관계를 가졌다. 그는 먼저 그들이 교리문답을 암송하는 것을 듣고(그가 사용한 교리문답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었다) 그 다음에는 그 의미에 대해 구두시험을 보고, 마지막으로 가능한 한 모든 마음을 끌 수 있는 이유와 열심을 가지고 책임 있는 사랑과 실천을 강권했다. 16)
적절한 시기에 태어난 진정한 청교도 조나단 에드워드의 친구인 휫필드는 1767년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지난 30년 동안 나는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보다 참되고 살아있는 신앙이 부흥하면 할수록 더 많은 훌륭한 과거의 청교도 저술들이 요구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7) 또한 1743년에 키더민스터의 방문에 대한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한 사람도 역시 흥미 있게도 휫필드였다.“나는 박스터 목사의 훌륭한 교리와 사역과 훈련의 달콤한 냄새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매우 기분이 좋았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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