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그의 피로 말미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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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구속을 받아서 “죄사함을” 받았다. 속전을 지불한 결과이다. 구속과 죄사함은 동의어가 아니다.
“구속”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큰 용어이다. 그 말을 죄사함에 국한 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롬8:23)“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고전1:30)“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여기서의 “구속”은 구원의 전 영역을 말하는 것이다. 궁극적인 영화의 차원에서 말하고 있다.
구속은 궁극적으로 내 몸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죄사함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일차적인 계단이요 다음에 오는 모든 것을 위해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하다.
구원의 첫 번째 문제는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해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주제보다는 부활의 주제에 관한 설교 듣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그러한 지점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시작하지 아니하면 어떤 것도 가능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의 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십자가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다. “넘어지게 하는” 것은 언제나 십자가에 못박히신 구세주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핵심이 되는 이 구세주의 피가 그들에게는 언제나 거침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서 언제나 처음에 오는 것이다.
우리는 본질상 죄를 용서함 받는다는 개념을 다 싫어한다. 죄인들이라는 것을 듣기 싫어한다.
“칭의”는 율법적인 것이라 하여 싫어한다. 행복과 힘과 기쁨을 원할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복락을 얻기 전에 먼지로까지 낮추어져야 한다.
사도에 의하면 구속이 먼저 나오고 그것은 또 죄사함부터 시작한다.
먼저 죄책을 해결받지 않는 한에서는 죄의 권세에게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불가능하이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심리학적인 채험이 유익을 줄지라도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제일되는 것은 죄사함이다. 모든 체험은 이 진리에 비추어서 시험되어야 한다.
나의 죄와 죄책의 문제가 해결 받기 전에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순종하는 모든 자녀들“ 위에 머물러 있다.
언제나 성경이 구속에 관하여 말하는 첫 번째 요점은 죄사함이다. (롬5: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의 생명은 우리가 먼저 그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죄와 죄책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전에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
(롬8: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가 먼저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받기 전에는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신다”고 말한다. 죄사함을 받는 필요성에 대하여는 그저 지나치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주어진 복락들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만큼 더 교활한 오류는 없다.
죄사함에 관한 현대적인 개념들은 일반적으로 부적당한 것들이다. 느슨하고 감상적이다.
우리 자신들의 차원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 단순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죄사함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극히 어려운 문제였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만났던 오직 유일한 문제임을 주장하여 역설하는 바이다.
구원의 교리는 탕자의 비유에서 전부 발견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그 비유는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내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셔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죄사함은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져야만이 다룰 수 있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한 마디 하심으로써 단순히 죄를 사해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 하나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다. 왜 “사람들이여 용서함을 받으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은 그러한 일을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1:5).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 스스로 모순될 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는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진리는 하나님의 죄사하심은 매우 철저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그 죄악들을 철저한 방식으로 처리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피만큼 우리의 죄를 밝혀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죄를 용서함 받기 전에 우리는 죄의 흉악함을 인식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의 악독성을 인식하는 것은 십자가에서이다.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들을 벌레요 비참한 죄를 범한 죄인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거룩한 율법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고 볼 때에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 비추어서 자신들의 죄책이 어떠한 것인가를 본 사람들은 고백하였다. “나는 비열함과 죄가 가득하오니”(찰스 웨슬리).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롬7:18,24). 죄는 달리 처리할 방도가 없어서 그리스도의 피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
십자가에서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우리에게 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죄를 밝혀내는 것이다. 그러한 다음에 그것을 처리한다.
하나님께서 죄를 처리하시는 방식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시다.
(롬3:24-26)“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죄를 용서하시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의로운 것이다.
죄는 징벌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판하셔야 한다. 심판은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그는 더 이상 의로우신 분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방식은 죄를 처리하시고 죄가 받아야 할 형벌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상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내 죄들을 용서하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의 의와 공의를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의로우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는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다.
그것이 죄를 용서하시는 성경적인 교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은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우리의 죄가 형벌을 받았고, 우리의 죄책이 속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얻어진 죄사함은 얼마나 철저한 것인지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하나님의 은총을 입도록 한다. 우리는 단번에 용서함을 받은 것이다. 죄사함은 끝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완전하게 화해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들을 단번에 도말하여 버리신 것이다. 레위기 16장에서 이스라엘의 죄악들은 대제사장이 그의 머리 위에 안수함으로 인하여 그 염소에게 전가시킨 후에 그 염소를 멀리 광야의 보이지 아니하는 곳으로 쫓아버린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니”(히103:2).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31:34, 히10:17). 그것은 영원한 망각이다. 우리의 죄악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사함을 받았다. 성경에 있는 죄사함의 교리가 가지고 있는 영광은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실 뿐 아니라 그들을 더 이상 더 기억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죄사함을 받았으니”. 현재적으로 여기서 지금 누리고 있다. 우리가 죄에 빠지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을 하실 필요가 없으시다. 그가 행하시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십자가의 처방을 적용하시는 것뿐이다. 한 사람이 예수 믿을 때는 물론이고, 다시 그가 죄에 빠진다 할지라도 그의 모든 불의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희생제사를 다시 드리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단번에 일어난 일이다. 바로 그것이 이 순간에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지위이다. 죄사함은 의롭다 하심을 받고 거룩하게 되고 장차 올 영화의 지점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모든 다른 축복들로 연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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