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3권21장 그리스도인의 자유
(롬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1. 심오한 변화.
이 위대한 선언, 장엄한 그리스도인의 묘사는, 그리스도인은 심오한 변화를 겪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 말은 기독교의 위대한 말이다. 21절의 ‘그때’가 그리스도인에겐 ‘이제’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그때’와 ‘지금’을 이야기할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완벽한 전환이다. 더 이상 ‘그때’가 아니고 ‘이제’이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일어난 변화이다. 그의 영광스러운 역사가 이룬 차이이다. 그는 시대를 B.C.와 A.D.로 나눈 분일 뿐 아니라, ‘그때’와 ‘지금’을 구별한 분이시다. 그리스도인은 ‘그러나 이제는’을 자랑하도록 되어 있다. 이 말을 냉담하게 말하는 사람은 그것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한 사람이다. 이 말이 우리를 감격시키거나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의 위치를 재검검하는 것이 좋다.
이 위대한 변화에서 강조할 사항은 1) 변화의 완전성이다. ‘그때’와 ‘이제’는 완벽한 대조이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점차적으로 변하는 단계가 없다. 더 이상 예전의 사람이 아니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전에 살아왔던 방식으로 살아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논증의 진수이며 변화의 절대적인 성격이다. 2) 이 큰 변화는 우리에게 이루어진 무엇이며, 우리들에게 일어난 무엇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 여러분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받았다. 고로 하나님께 대하여 노예로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의 행동이고 오직 그만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스스로 낳을 수 없다. 우리는 ‘거듭나지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요,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2. 변화의 본질.
‘죄에게서 해방되어’ 즉 ‘자유케 되었고’. 우리는 이미 자유케 되었고, 우리의 것이 되었다. 어떤 일들을 행하면 자유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네게 자유를 줄 체험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그의 논증의 주요 요지이다. 여러분은 죄로부터 해방된 것이 사실이 아닐진대 그리스인일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와 함께 살아나서 그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된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죄로부터 자유케 된 것이다. 그것은 이미 일어났다. 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의상 이미 죄에서 해방된 자들이다. ‘죄에 대하여 죽고’, ‘죄에게서 해방되고’란 말씀은 우리가 더 이상 죄의 통치 아래 있지 않으며 그 영역 안에 더 이상 있지 않으며, 그 폭군 아래 더 이상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물론 죄 없는 완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죄에 대하여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가 우리 죽을 몸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죄는 죽을 몸에 왕노릇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게는 왕노릇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죽을 몸에 죄가 왕노릇하고 통치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히 구원받았다. 그러나 나의 몸은 여전히 비천한 몸이다. 죄있는 몸이다. 그것은 아직도 영화된 몸이 아니다. 장차 영화된 몸이 될 날이 온다.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상전이 아니고 귀찮게 구는 존재이다. 골칫거리일 뿐이다. 비그리스도인 안에 있어서 죄는 정상에 있으며, 그는 그 아래 있다. 그리스도인의 지위는 자기가 정상에 있으며, 죄는 그를 끌어니리려고 애쓰는 아래에 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을 때, 그는 전적으로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으나 길 건너편에서 소리지르는 마귀가 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마귀에 저항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 비록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할 수 있고 물리쳐서 그를 사라지게 할 수 있다(벧전5:8,9).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 그러나 “악한 자가 저(그리스도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하였다(요일5장). 우리를 향해 큰소리를 치며 위협할 수 있고 유혹할 수 있다. 그러나 만지지는 못한다! 우리는 그의 영토 밖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만나며 붙잡을 수 있는 가장 자유를 주는 사상이다. 이것은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진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여러분은 그렇게 해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더 나아가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노예’가 되었다. 우리는 새로운 주인에게 속해 있고, 새 영토에 있으며, 새 나라에 있다.
옛 영역으로부터 ‘하나님의 노예’에로의 완벽한 이주가 이루어졌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여러분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다.” 여러분은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의에게 종이 되었는데 이제 22절의 진술에서 산의 정상에 이르러 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 순종만이 아니라 교훈의 본이나 의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종(노예)”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에 관한 참다운 진리이다.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노예가 되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성결과 성화의 비결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체험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 된 것을 이해하고 우리가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결과 성화에 대한 열쇠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해 살 아무 권리가 없으며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지을 권리가 없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우리 상전이시오, 우리 주인이 비난하고 미워하는 것을 행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은 마치 적과 내통하고 있는 군인과 같다. 죄를 짓는 것은 괘씸한 일이다. “사람의 최고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무엇이 가장 크고 첫째되는 계명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ㅎ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38).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의 것이며, 영원토록 그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킨다”(요2:17).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있어서는 안된다. 나는 열심히 소멸되어야 한다. 우리는 동정을 구하고 어떤 갑작스런 구출방법과 치료방법을 열망한다. 사도의 교훈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노예이며, 하나님께 속해 있다.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는 적게 이야기하고 그분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라. 우리가 할 일은 그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하길 원하는지 아는 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다운, 군대명령과 같은 것이다.
성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그분은 “내가 하는 말은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고 하였다. “사람의 모양대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그것이 그가 세상에서 살아간 방식이었다. 성결과 성화의 절대적 완전성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여러분과 저는 그와 같아야 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체험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노예이며 전적으로 그의 임의에 따라 사는 자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 요구가 어떠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그가 행하신 방식대로 부딪쳐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며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순종의 극치이다! 그는 우리가 추종해야 할 분이다. 그것이 모본이요, 모범이다. “하나님의 종이 되었으니라”. 여러분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육체의 연약, 시험의 강력에 대하여 너무 많이 말하지 말라. 여러분이 누구인지 어떠한 자인지를 깨달으라. 여러분의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을 깨달으라. 여러분은 자기 몸을 함부로 쓸 권리가 없으며, 잘못 사용할 권리가 없다. 자신을 애처롭게 생각하지 말라.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변케 하는 어떤 신기한 구출방식을 기대하지 말라. 우리가 생각할 것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노예인 우리의 신분은 안전하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아 갈 자가 없느니라”(요10:28).
3. 변화의 결과.
“거룩함에 이는 열매를 얻었다”는 것이다. 옛 생활과 얼마나 즉각적인 대조인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가 있다. 그 전에는 없었다. 중생의 과정이 없다면 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1,5). 만일 여러분의 삶에 어떤 열매도 없다면 그것은 헛된 것이다. 그것은 다만 말로만의 신앙고백이며, 신앙주의의 형태에 불과하다. 만일 생활에 아무 변화도 없다면 그는 정말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열매를 낸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영생에 이르는 열매”라고 하지 않고 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다.” 그것은 성결이요 성화이다.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음행과 살인과 술취함과 방탕과 호색과 그 밖의 갈5장에 열거된 것 같은 죄에서 멀리멀리 옮지는 것을 말한다. 거룩에 대한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바쳐지는 것이다. 성전의 거룩한 그릇들을 보라. 그것이 하나님을 섬길 목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졌기 때문이다. 율법이 주어졌던 “거룩한 산”은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산이며,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산이다. 성결은 느낌이나 체험이 아니고, 하나님께 대하여 바쳐지는 것이며, 그를 섬길 양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새 걸음이요, 새 생활이다. 그것은 의롭고 거룩하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셨던 것과 같이 사는 삶이다.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품성들이 더욱더욱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의 성화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주장은 사도의 가르침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진적이고 진전해 가고 더욱더 그리스도와 닮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때때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가 처음으로 곧바로 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상을 앞에 두고 넘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다시 산 기슭으로 내려 가는 것은 아니다. 성화는 진행해 가는 과정이요,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더욱더 ’그 사랑하시는 아들의 형상에 가까워‘ 가는 것이다.
'성경강해·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죄와 은혜의 궁극적인 결과(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3권22장) (0) | 2010.12.03 |
---|---|
그 뜻의 비밀 (로이드 존스, 에베소서강해1권 16장) (0) | 2010.11.26 |
에베소서강해1권 15장 그 은혜의 풍성함 (0) | 2010.11.12 |
에베소서강해1권 14장 그의 피로 말미암아 (0) | 2010.11.11 |
에베소서강해1권 13장 구속 (0) | 2010.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