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5권 20 장 양자의 영을 받는 방식

강대식 2012. 9. 12. 08:48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

 

긴급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다시 한번, 양자의 영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님을 상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대부분은 나의 진술에 동조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들은 구원 자체와 구원의 확신 사이를 구별 짓는 것에 실패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을 구원의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으로 가르치는 그 교훈이 전혀 타당하지 않음을 밝혀 드린다.

그 첫번째 이유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8장에서 구원받는 것과 자기가 구원받은 그 사실을 아는 것 사이를 구별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이 구원받았으면서도 구원의 확신에 대한 부족이 있을 수 있으며, 그 확신은 구원의 절대적인 필수 요건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고 확신하며 말할 수 있으면서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하는 ‘양자의 영’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한 단계들이다.

 

둘째, 양자의 영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주관적인 느낌으로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문제도 아니고 성경에 의해서 이끌어내는 추론도 아니다. 성령에 의해서 부어지는 어떤 것이며 그리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는 어떤 것이다.

복음적 교단에서 크게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으라”는 명목 하에서 가르치고 있는 대중적인 교훈에 기인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에게 제공된 것을 붙잡으면,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 교훈만큼 15절에서 묘사되는 체험을 하지 못하도록 많은 사람에게 막는 것이 없다. 비극은 어떤 것이 우리로 하여금 체험을 얻도록 도와 준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이 축복을 받는 방법은 행위로나 율법으로나 흥분으로나 시끄러운 의사 표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만이다.(갈 3:2, 5, 14) 이 선물은 갈급해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또 중요한 사실은 이 은사를 주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중심이다. 어떤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라는 진리를 벗어나서 그릇되게 가지 말아야 된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셨다. 마시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쉽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입을 벌리고 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마이어는 그의 책 -자기의 삶을 위한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는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는 것을 취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나는 그저 취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 교훈은 받는 것이 우리의 취하는 행동의 차원에서 해석되고 있다. 그들은 갈라디아서 3:2, 5, 14과 같은 성경 구절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취하는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사실상 여러분이 이 위대한 충만함 속에서 성령을 취하면서도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순전한 믿음의 행사라는 것이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하려 함이니라”(갈 3:14)

갈라디아서에서 사도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전체 지위가 믿음에서 나온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행위를 의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도는 사실상 그 이상 다른 어떤 것을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는 다만 우리가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은 우리가 믿음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요 율법 아래 더 이상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뿐이다. 이런 가르침은 성령이 인격임을 상기시켜 주기는 하지만, 그들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그를 마치 마실 수 있는 공기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인격이며 그는 하나님이요, 복되신 삼위일체의 제3위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성령께 굴복해야하고, 슬프게 해서도, 소멸하지도 않아야 한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처럼 단순하고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그를 취하라는 암시가 전혀 없다.

 

‘받다’라는 말과 관련하여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은 ‘받는 것’을 우리 편에서의 행동과 취함의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헬라어 신약성경을 보면, ‘받다’라는 단어들이 수동적인 의미가 아니라 능동적인 의미로도 번역되고 있다. 그 말들은 우리의 행동에 강조점을 두고 있으며, 우리가 취한다는 행위에 치중하고 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니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2:41) 능동적으로 그의 말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고전2:14) 매우 능동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 편에서 취하는 행동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여기 로마서 8:15에서 사용하는 그 말은 어떠한가?

‘주어진 것을 받는다’, ‘얻다’ 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보다 수동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주어진 것을 내가 ‘받는다’ 라는 의미이다.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10“43) 신자들은 죄사함을 ‘취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전체 분위기와 문맥이 능동성과는 차이가 난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고전 3:14)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과 선하심 속에서 그 상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13:2) 분명히 그것은 전적으로 수동적인 의미이다.

 

“우리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 양자의 영은 내가 하고 싶을 때는 언제나 취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그것을 취하고 느낌을 갖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가졌노라고 말하면 되는 것인가? 믿음으로 그것을 취하면 되는 것인가? 여러분은 이 문제에 관해서 ‘받다’는 말이 ‘취한다’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피할 수 없는 추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