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6 )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의 마지막 단계를 밝히고 있다. 이것은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곳에서나 발견되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관한 진술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진술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구절만큼 개신교와 로마 카돌릭의 교리를 가장 분명하게 구별시켜주는 다른 구절은 없다. 로마 카돌릭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이 결코 자기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보기도를 필요를 하는 연옥이라는 것을 통과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사제들의 손에 자신을 일임해야한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바르트의 교훈에는 확신이나 확실성이 전혀 없다.
이 세상에서 구원에 대한 확실성과 확실한 지식을 부정하는 교훈은 자동적으로 전통적인 개혁주의적 복음에 들어맞지 않는다. 복음적 대각성기에 있어서 위대한 강조점은 ‘구원의 확신’에 주어지고 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서 자기들의 구원을 추론해 내었으나 갑자기 부흥이 찾아와서 그들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성령의 내적 확신을 갖게 된다. 성령의 인격성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령이 하나의 감화력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성경의 모든 곳에서 성령을 하나의 인격으로 말하고 있고 복되신 삼위일체의 제삼위 되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다.
‘증거하시나니’ - ‘한 쌍의 증인의 증거’라는 의미로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신다는 것이다. 성령의 인격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격으로서의 우리와 함께 증거하신다는 것이다. 곧 그 증거는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우리 영의 증거이다. 우리는 그러한 자식으로서의 영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증거한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더불어 행하시고 우리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자녀들’ - 14-15절에서 ‘아들들’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16절에서는 ‘자녀들’ 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아들은 다소 법정적인 용어이다. 반면에 ‘자녀들’이라는 말은 우리가 즐기는 자식 관계의 내적 실재성을 표현한다. 우리가 ‘자녀’ 라는 느낌의 입장에서 살펴볼 때가 있고 또한 ‘아들들’ 이라는 법적 위치에서 우리의 관계를 살펴볼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두 말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최근에 인기 있는 교훈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라고 한다. 싸워 승리하는 믿음의 행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 교훈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아들들뿐이라고 한다. 또한 그들만이 하늘에서 그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분명히 사도는 14-16절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한다. 17절에서 실제로 “자녀이면 또한 후사니” 라고 말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3:26절에서 동일한 개념이 발견된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시나니” - 여기서 주의해야 한다. 잘못된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구절의 가장 진수가 되는 영광을 놓치고 말 것이다.
제임스 데니(스코틀랜드 신학자)는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고무되고 촉진되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된다. 우리 자신의 영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말하는 소리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고무되고 촉진되는 것이다“ 그는 실제적으로 우리가 우리 영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으나 거기에 첨가해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은 성령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데니에 따르면 16절은 단순히 15절에 대한 설명이다. 저는 그러한 해석이 필연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15절에서 사도는 단순히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되는 방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우리 영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으나 첨가해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영에 덧붙여서 소위 성령의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헨리 몰 감독(복음주의 주석가)은 거의 같은 것을 말한다. 그는 16절은 14절에 대한 단순한 반복으로 진술한다. 사도의 진술은 그것이 아니다. 16절은 단순히 성령의 조명이나 회심시키는 사역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또한 중생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더 나아간 무엇이요, 선행하는 것에 대한 부가적인 무엇이다.
이 모든 해석들이 어떠한 새로운 것을 전혀 나타내주지 못하고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에 대하여 증거 하신다는 중대한 요점을 밝혀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그 해석들은 단순히 우리로 하여금 믿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성령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것은 물론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사도의 진술은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로버트 할데인의 진술은 이 위대한 진술을 이해하는 입구로 우리를 인도한다. 할데인은 성령께서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 하신다는 이 진술은 단순히 이 간증을 말하는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의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성령께서 자녀 되었다는 확신을 나눠줌으로써 마음속에서 그것을 고취 시킨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워진 상태에 대한 참된 특징들을 의식하고 또한 우리 자신들 속에서 그것을 발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녀된 것을 우리로 확신 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성령의 증거에 의해서 알려진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문에서 확증하고 있는 것에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서는 성령은 양심으로 하여금 증거 하도록 도와줄 뿐이요 성령 자신이 증거자가 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버트 할데인은 성령의 인침은 언제나 믿음과 중생과 신앙 다음에 오는 것이라는 견해를 취한다. 신자의 믿음을 인치는 것은 성령의 부차적인 역사이다. 그래서 할데인은 로마서 8:16에서 ‘성령의 인침’에 대한 교리를 다른 방식으로 진술하고 있다는 데 주장을 확증한다.
우리는 여기까지 길을 준비하고 이 영광스러운 진술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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