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복

교회 중심의 영성 형성: 신비주의 영성과 다르다 / 이태복

강대식 2012. 9. 14. 17:41

청교도 영성은 신비주의 영성과 현저하게 달랐다. 신비주의 영성은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과 집례되는 성찬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중심으로 영성을 형성하지도 않았다. 거기에도 물론 설교와 성찬이 있다. 그러나 신비주의 영성은 개인적인 묵상과 관상을 통해서 더 깊고도 풍성한 영성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만 강조할 뿐이다.

 

신비주의 영성이 설교를 강조하지 않는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개인적인 묵상이나 관상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 연합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가르침이나 설교는 직접 하나님과 연합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한다. 휴즈 올리펀트 올드, “신비주의는 다른 어떤 수단을 거치지 않고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자 몸부림친다. 그래서 성경을 강조하는 것도 신비주의가 추구하는 바에는 걸림돌이 될 뿐이다. 신비주의에서는 성경, 성례, 교회의 사역 등과 같은 모든 것이 너무나 자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받해하는 장애물로 취급된다.”

 

주의 만찬에 관해서는 그들이 좋아하는 상징적인 요소가 많고, 언어가 아니라 감각으로 체험하고 감정으로 느끼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 관심도 보이고 때로는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청교도들처럼 영성 형성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도날드 블로쇠,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은 일반적인 신비주의들과는 달리 믿음의 삶에서 성례나 예식의 중요성을 언제나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을 없어도 되는 것들로 간주하거나 꼭 필요하지는 않는 것들로 생각하였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성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형체보다 훨씬 더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신비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뛰어넘어 보이지 않는 실체를 붙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비주의 경향을 나타내는 공동생활 형제단의 창시자인 게르트 그로테에 따르면, 성경이나 성례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을 과감하게 떨쳐 버릴 수 있는 용감한 영혼이야말로 믿음의 완전을 향하여 진보를 이룰 수 있다.”

 

신비주의의 이러한 특징은 리차드 포스터의 <영적 성장과 훈련>이라는 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영성 훈련과 관련이 있는 ‘예배’라는 세부 항목에서 포스터는 설교나 성찬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다만 ‘영적 지도’라는 항목에서 설교에 대하여 단 한 문장으로 설명하고 지나가는데, 이 설명조차 신비주의 영성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는 말한다. “설교는 영적 지도의 한 가지 형태이다.”

 

과거나 현재나 신비주의 영성은 종교개혁으로 회복된 개신교회가 늘 중요하게 여겼던 말씀 선포와 성찬에 대한 강조와 구체적인 훈련이 결여된, 전혀 다른 영성 형성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만 강조하고 개인적인 묵상 훈련이나 영성 생활을 구체적으로 가르치지 못하는 개신교회의 메마른 영성도 경계해야 하지만, 개인적인 묵상 훈련이나 영성 생활에만 치중하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시는 설교나 주의 만찬을 무시하는 신비주의 영성도 경계해야 한다.

 

- 이태복, 『영성 이렇게 형성하라』, pp 276-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