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은 원리적으로 내적인 변화이다. 영혼이 내적인 것이기에 거듭남 역시 내적인 변화이다. 거듭남이 내적인 변화가 아니라면, 외적으로 올곧은 행동의 변화는 있을 수가 없다.
1. 거듭남은 원리의 변화이다.
거듭난 사람 안에 있는 원리는 영적이고도 내적인 원리이다. 이 원리가 처음 작동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그는 하늘에서 그의 불을 가져와서 봉사의 활동을 한다.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일을 따라서 그 불에서 영의 열기와 열정이 나오게 된다. 자신이 어떤 원리에 의하여 설교를 듣고 기도하며 호흡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라.
새로운 피조물에게 주어지는 선한 두 가지 원리들은 바로 믿음과 사랑이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불린다(갈5:6).
1) 믿음과 관련된 변화이다.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영적 생명 중에서 가장 먼저 발견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영적 활동의 직접적인 원리이다. 아무리 놀라운 행동이라도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도덕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별로 반짝거리지 않는 행동이라도 믿음이 있으면, 그것은 영적인 것이 된다.
믿음의 원리로부터 즉각적으로 모든 행동들이 흘러나오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 원리들은 하나의 규칙으로서의 훈계에 대한 믿음의 원리, 일종의 격려로서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원리, 그리고 영접의 근거로서의 중보자에 대한 믿음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훈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비록 드러내 놓고 하나님의 계명을 거절하지는 아니할지라도, 그 어떠한 봉사도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봉사라고 할 수 없다.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 어떠한 봉사도 신적인 동기에 의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다. 구속자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그 방법을 멸시하는 것이다.
2) 사랑과 관련된 변화이다.
사람이 어떠한 행동을 할 때에 그 활동에 하늘에 속한 뼈대를 제공해 주는 참된 불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말미암는다. 이 불에 의해서 마음의 열망이 하나님을 향하여 불붙게 된다.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 그 불로, 오직 유일한 즐거움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기 때문이다. 새로운 창조란, 영혼이 반역의 상태에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 영혼에게 만족을 주던 반역의 원리들을 내쫓고, 중심의 올바른 위치에 그 사랑을 쏟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의 행동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면, 거듭나지 못한 자의 행동은 바로 자신을 향한 애정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2. 거듭남은 목적의 변화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새로운 피조물의 목적이다. 옛사람의 목적은 자아, 그 자체였다.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 된다.
1) 새로운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이다.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호2:23). 농부는 자신을 위해 추수하고자 씨를 뿌리고, 곡식은 그것을 뿌린 농부를 향하여 자란다. 씨앗이 본성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라게 된다. 새로운 피조물은 신에게서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러한 영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기 마련이다. 거듭남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기 위하여, 즉 그분을 위하여 영혼이 형성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모형과 목적으로 삼지 않는 자,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었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사본이 그 원본을 훼손시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2) 새로운 창조는 복음의 목적과 동일하다.
새로운 창조는 복음이 인쇄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롭게 창조된 자는 그 의도하는 바가 복음과 일치하게 된다. 경건하게 사는 것,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이 가르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거듭난 사람의 틀과 행위는 마음속에 뿌려진 말씀의 낟알이나 씨앗과도 같다. 피조물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고 의에 이르게 하며, 자기의 이익과 만족을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에 두게 하는 것이 복음의 가장 주된 목적이다. 그리하여 모든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을 최상의 존재로 높이는 것이다.
3)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새로운 창조는 그 영혼이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원인이 되시고 새로운 피조물의 모형이 되신다. 그 모형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영혼의 틀을 형성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을 따라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심’(엡4:24)을 받았다.
새로운 창조는 또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거듭남의 모형이며 대의이다. 우리의 영적인 부활은 단순히 영적인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생명의 목적을 이루면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하여 살면서 그분의 중보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질 때보다 더욱 하나님께 관심을 가질 때에, 넘치는 활력과 영혼의 고양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형성된 의지의 틀이 그분의 뛰어난 이름을 높이가 위한 열심으로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4) 새로운 창조의 목적은 영혼의 증진이다.
그 영혼은 결코 그것 자체보다 낮거나 동등한 목적에 의하여 증진될 수 없다.. 하나님보다 더 낮은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영혼을 퇴보시키는 것이며, 그 영혼의 상태를 경멸하는 것이다. 영혼의 활동이라는 면에서 볼 때, 고상한 목적은 영혼을 확장시키는 반면, 저급한 목적은 영혼을 쪼그라들게 할 것이다. 하나님보다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의 영혼이 가진 그 무한한 성격에 더욱더 합당치가 않다.
5) 지향점이 바뀌지 않는 것은 새로운 창조가 아니다.
영혼이 추구하던 목적의 변화가 없이 새로운 창조에 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혼은 그 원래의 상태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활동을 하더라도 그 주된 목적으로서의 그분께로 향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열심으로 아양을 떨면서 자기를 껴안고 딩구는 자는, 아직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다.
은혜의 효과적인 영향 아래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성령의 성전이 된 사람들은, 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그 몸과 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성과 의지가 모두 은혜에 의해서 향상되었다. 새로운 창조는 인간이 이를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본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새롭게 된 사람이 최고의 탁월한 목적인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추구하게 만들 것이다.
6) 바른 변화가 바른 봉사를 하게 한다.
이러한 목적의 변화만이 그 영혼이 감당해야 할 봉사를 적절히 수행하게 한다. 이렇게 변화된 목적에서부터, 모든 봉사를 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신속함과 진심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목적으로 삼았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인생을 즐겁게 마칠 수가 있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열심을 낸다. 그분을 위하여 애쓴다. 아무도 보지 않더라도 세상의 모든 눈길이 자기를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애쓴다.
3. 거듭남은 사고의 변화이다.
새롭게 된 피조물은 최상의 기능적 구조물이 새롭게 되었다. 그가 육체를 좇을 때에는 육체의 일들을 마음에 두었지만 이제는 영을 좇는 자가 되어 영의 일들을 마음에 둔다. 하나의 원리가 그 지성 속에 주입되어, 이전에 연기에 가려져 있던 빛과는 다른 빛을 그 지성이 발하게 된다. 새로운 피조물은, 그 첫 번째 활동, 곧 이전의 본성에 의해서 개진되던 활동을 막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계속 진전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노력한다. 옛 본성에 속한 것들의 활동에 대항한다. 새로운 피조물은 외적인 생활만이 아니라, 정신이나 심정에 있는 사악함도 주의한다. 그는 사람들보다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욱 순결할 것이다.
영혼은 너무 많이 변화되어서 성령의 움직임에 대하여 관계없는 자이거나 그것에 악의적으로 반응하는 자가 될 수 없다. 이제 지성은 무엇이 처음으로 솟아 나오는지를 더욱 재빠르고 민감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되어서,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그에게는 내부의 샘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 되어서, 왜곡되고 타락한 영혼에게 죄를 생각하면서 스릴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리게 한다.
4. 거듭남은 위로의 변화이다.
본성에 변화가 있기 때문에, 만족을 하는 것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게 된다. 새로운 본성은 이전의 본성을 즐겁게 해 주던 것으로 즐거워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 다른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의 만족은 어린아이의 것과는 다르다. 왕자의 만족은 농민의 것과는 달리 훨씬 높은 것이다.
어떤 사람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지명된 성령은 그를 만족시켜 주기 위한 직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새로운 원리를 제공하였던 것처럼, 이제는 새로운 위로를 제공해 준다. 성령께서는 위로자로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또한 그에게서 말미암은 새로운 위로를 제공해 주신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즐거움과 위로 가운데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의와 평강, 그리고 희락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세 가지 요소이다(롬14:7).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생명이 되는 것처럼, 주님의 즐거움이 그들에게 힘이 된다.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새 피조물됨과 더불어서 그 마음속에 심긴 기쁨이 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나이다”(시4:7).
자연인의 위로는 피조물의 메마른 젖꼭지로부터 빨아들인 것이다. 반면, 새로운 피조물의 위로는 차고 넘치는 생명의 샘에서 길어 온 것이다. 그러한 위로로 인하여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조차도 그에게 영광스러운 위로가 된다. 자신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을 기쁨의 눈길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즐거움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함께 자기 안에 솟아난다. 분명히 하나님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모든 일을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에서 최상의 기쁨이 흘러나오게 된다.
- 스테판 차녹, 『거듭남의 본질』, pp 8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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