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오직 시편만 찬송해야 하는가? / 로이드 존스

강대식 2012. 12. 6. 20:15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엡5:19)을 해석하면서 어떤 경건한 사람들은 사도가 오직 시편 찬송만 부를 것을 명했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시편 찬송 외에 다른 노래를 부르는 것은 죄라고까지 주장합니다. 저는 그런 입장을 취하는 것이 매우 큰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견해는 이 구절의 문맥과 말할 당시의 바울의 심경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오직 시편 찬송만 불러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주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이방인의 교회를 대상으로 기록된 서신서입니다. 그러므로 편지를 읽게 될 대부분의 성도들은 구약의 시편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물론 에베소교회에도 분명히 시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유대인 성도들이 어느 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저는 여기에서 바울이 오직 시편 찬송만 불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 교회 역사가 중에 유세비우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는 찬송 외에 다른 노래들도 불렀다”라고 기록합니다. 터툴리안은 애찬식에서도 똑같은 일이 행해졌다고 증언합니다. “물로 손을 씻고 나면 불이 켜졌고,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 기운데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자신이 성경에서 배워 알고 있는 내용이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하나님을 노래하였다”. 여기에서 놓치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으로 하나님을 노래하였다”라는 부분이다. 엡5:19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찬송시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말씀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이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 통역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찬송시는 무엇입니까? 어쩌면 고린도교회 가운데 일부 성도들은 시편을 잘 알고 있어서 시편 찬송을 부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문맥상 여기에서 사도가 시편 찬송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 아래 만들어진 찬송시를 가리키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가르치는 말씀이나 방언 계시나 방언 통역함은 모두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모임 시간이나 그 직전에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울이 어떤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방언을 말하고 어떤 사람은 갑자기 진리의 한 측면을 계시받는다고 말하면서, 어떤 사람은 단지 구약성경에 기록된 시편을 낭송할 뿐이라고 말한다는 해석은 웬지 생뚱맞아 보입니다. 즉, 이 구절에서 ‘찬송시’라는 단어가 시편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문맥을 무시하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 기록된 바울의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여기서 ‘영으로 찬송하고’ 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표현은 일종의 황홀경 상태를 가리킵니다. 성령의 감동과 자극, 성령의 역사와 인도를 받아서 이전에는 결코 묵상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말로 표현하는 그런 황홀경 상태를 가리킵니다. 한 번도 배워 보지 못한 다른 나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처럼, 한 번도 묵상해 보지 않은 내용으로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찬송한다는 말은 시편으로 찬송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 있는 시편으로 찬송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영으로’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찬송하는 것입니다. 황홀경의 상태에서 부르는 영적인 찬송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의 문맥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말씀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오직 시편 찬송만 부르는 생기 없고도 엄숙하며 지루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사도의 말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정반대의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성령의 영감이 있습니다. 계시가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40절을 읽어 보십시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여러분은 헨델이 그 유명한 작품 ‘메시야’를 작곡하게 된 일화를 알고 있습니까? 헨델이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그 대작을 불과 몇 주 사이에 완성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헨델은 그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곡을 작곡할 때 마치 모든 하늘이 내 앞에 열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헨델이 그렇게 위대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령의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건한 친구들 중에는 오직 시편 찬송만 부르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부르는 찬송가를 보라. 얄팍한 가사들을 보라. 신성모독에 가까운 단어들을 보라”. 저는 제 친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니, 저는 그들의 지적에 백 퍼센트 동의합니다. 저도 그런 종류의 찬송이나 합창곡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 친구들의 잘못은 몇몇 찬송이 나쁘다는 이유로 다른 모든 찬송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나쁜 찬송만 버리면 되는데 그들은 모든 찬송을 버렸습니다.

 

찬양과 관련하여 교회 역사가 우리에게 명확하게 증언해 주는 사실이 있습니다. 참된 부흥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에 충만하게 임할 때마다, 교회에는 수없이 많은 새로운 찬송들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처음으로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을 때 여러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18세기로 넘어와 찰스 웨슬리, 존 케닉, 필립 도드리지, 웨일즈의 윌리엄 윌리엄즈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은 모두 오늘날 부르고 있는 영광스러운 찬송들을 만드는 데 놀라운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질서의 반대는 절제라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얄팍한 가사나 질 나쁜 찬송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단정치 못하고 감정에 취해서 찬송을 불러 대는 것에 대한 반감 때문에, 성령으로 충만해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성령께서 행하실 수 있는 일들을 우리 멋대로 제한하고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에베소교회는 전반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성도들은 자선들이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모든 무질서를 피하고 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을 소멸하지 않도록 합시다(살전5:19).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그 증거를 나타내도록 합시다.

 

- 로이드 존스, 「성경적 찬양」, pp 3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