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스크랩] 로이드 존스, "성경적 찬양"(엡5:18-20강해)

강대식 2014. 2. 3. 12:06

로이드 존스, 『성경적 찬양』, 이태복역, 지평서원, 2009

 

성경적 찬양으로의 회복을 바라며(옮긴이의 머리말)

 

이 책은 로이드 존스의 에베소서 5:19-20에 관한 강해 설교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에베소서 강해전집에서 이 부분을 제외한 이유를 말씀한다. “책의 분량이 과도하게 많아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엡5:19-20에 관한 설교를 생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설교는 이 책의 큰 주제인 결혼, 가정, 직업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엡5:18-6:9의 설교를 ‘결혼, 가정, 직업’이라는 주제하에 한 권의 설교집으로 묶었는데, 그 분량이 너무 많아지자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엡5:19-20에 관한 네 편의 설교를 불가피하게 생략한 것 같다. 이 부분은 작은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저는 ‘왜 이런 설교가 직작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여러 번 느꼈다. 경배와 찬양이 한국 교회에 붐을 일으킬 때부터 이런 설교들이 한국 교회에 소개되고 공유되었더라면 여러모로 유익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죽어 가는 예배를 살리자는 구호 아래 찬양과 경배의 시간을 대폭 늘리고, 그동안 세속적인 악기라는 이유로 금기시 되었던 여러 가지 악기들을 교회 본당에 설치하고, 오래되고도 경건한 찬송가를 등한히 하면서 현대인이 현대음악에 맞추어 만든 복음성가를 선호하기 시작한 것은 벌써 오래전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알고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경외하는 심정을 품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게 변화된 예배 때문에 늘 말 못할 가슴앓이를 했다.

하나님에 대한 깊고도 풍성한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깊고도 풍성한 영적 체험을 다 담기 힘든 얄팍한 가사를 반복해서 부르는 것이 너무 힘들고, 육신의 부모를 위해 부르는 노래에도 사용하기 민망한 곡조로 가장 존귀하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 너무 괴로웠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교회에는 올바른 찬송에 대한 대안으로 시편 찬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참된 찬양에 대하여 고민하면서 교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역사적인 개혁교회들이 예배 중에 오직 시편 찬송만 불렀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최근에 시편 찬송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고, 실제로 시편 찬송을 부르는 교회들도 늘어나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 몇 년 안에 오직 시편 찬송만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회들이 많아질지도 모르겠다.

한국 교회가 이런 시점에 와 있기 때문에, 더더욱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설교는 지금 꼭 필요하고 꼭 읽어야 할 내용의 말씀들이다.

이 네 편의 설교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한국 교회가 예배 회복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붙들었던 현대적인 복음성가와 오늘날 한국 교회 한 모퉁이에서 예배회복의 진정한 소망이라고 새롭게 내세우고 있는 시편 찬송 모두에 대해서 다루면서 성경적인 안목으로 그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다시 한번 성경을 펼쳐 놓고 그리스도인의 찬양과 관련하여 성경이 강조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배우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저는 그 일에 이 작은 설교집이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작은 책을 통해서 올바른 찬양에 대한 일치된 견해와 심정을 회복하기를 소원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여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 엡 5:1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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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성령으로 충만한 찬송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엡 5:18-19 )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인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이 성령의 통치를 받아야 하며 우리의 존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져야 한다는 근본적인 교리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는 성령 충만한 삶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의 삶 중에서 가장 행복하고도 즐거운 측면을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 생활이다. 그래서 먼저 교회 생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도는 18절과 19절에서 성령 충만의 교리를 술 취함과 대조하여 설명한다.

 

“이전에 너희는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면 혀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고 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너희가 생각하는 행복과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너희는 술 취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제 나는 성령으로 충만해진 너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 말할 것이다.”

본문에서 사도는 예배 중에 어떤 찬송을 불러야 하는지에 관한 규범이 아니라, 사도의 관심사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교제할 때에 성령 충만함의 증거를 어떤 모양으로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주제는 특히 시편을 찬송하는 것과 관련하여 종종 논쟁거리가 되어 왔으며, 본문의 핵심이 전적으로 외면당한 것이다.

 

- ‘서로 화답하며’ - ‘말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음성을 사용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바울은 이 구절 전체에서 ‘찬양’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서로’는 “너희 자신들에게”(킹제임스 번역)로 잘못된 번역이며, ‘서로에게’라는 뜻이다. “너희는 너희에게 있는 행복하고도 기쁜 감정을 서로에게 표현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려 하는 내용이다. 본문에서 사도는 예배와 관련된 자세하고도 구체적인 규정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도의 관심은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쁨과 행복을 표현하기 위하여 함께 찬양해야 한다는 데 있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은 목소리를 발하여 찬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 어떤 사람들은 ‘시’. ‘찬송’, ‘신령한 노래들’이 용어만 다를뿐 사실 똑같은 것을 가리키며 시편 중에서도 어떤 시편은 ‘노래’라고 부리고, 또 어떤 시편들은 ‘찬송’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 등장하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은 모든 시편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단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바울이 본문에서 시편으로 찬양하라고 권면하고 있으며, 교회에서 찬양할 때는 오직 시편만으로 또는 성경구절만으로 찬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찰스 핫지, 이어디,등 위대한 에베소서 주석가들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이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킨다고 말해왔다. 사도가 이런 표현들을 사용하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쁨과 행복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을 개략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라는 히브리어는 ‘악기의 줄을 뜯다’라는 의미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히브리어 전문가들은 이 단어가 ‘악기의 연주에 맞추어 부르는 경건한 노래’를 의미한다는 데 동의한다. 시편의 거의 모든 시가 하프나 수금 같은 악기의 연주에 맞추어 부르도록 되어 있다. 바울이 사용한 ‘시’라는 단어가 ‘시편’을 가능성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시편을 작사하고 작곡할 수 있다. 그들도 시편의 형태로 경건한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찬송’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기리는 노래, 하나님에 관한 노래’ 거룩하고도 시적인 곡‘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은 “찬송은 반드시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정의했다. 지금까지 이것을 통상적인 의미로 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찬송에 속하는 노래들이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쳐졌다고 말한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찬송가와 책도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찬송을 배워야했다. 그래서 교창 비슷한 노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딛전3:16)

 

‘신령한 노래들’ 노래 앞에 ‘신령한’ 이라는 수식어가 있다. 시편이나 찬송이라는 단어에 이미 ‘신령한’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그것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령한’ 이라고 한 것은 노래에는 세속적인 노래, 코믹송등 여러 종류가 있다. 사도가 말하는 ‘신령한 노래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만들어진 노래, 영적인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노래, 영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임에 틀림없다.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부른 노래, 주님 어머니 ‘마리아의 찬가’, 세례 요한의 부친의 노래, 등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에게서 이런 노래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여기에서 ‘노래’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감동을 받고 즉흥적으로 발산하는 것을 암시한다.

요한 계시록을 보면 천국에도 많은 노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장 9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구주와 그분이 자신들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들을 묵상하는 가운데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노래를 거대한 합창으로 부르고 있다. 14장 3절에는 ‘새 노래’라는 단어가 나온다. 천국에서는 끊임없이 새 노래가 만들어 지고 불린다. 성령이 충만해지고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는 항상 그러한 결과가 뒤따른다. 바로 이것이 장차 천국에서 우리가 노래할 모습이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렇게 노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 교회가 오직 시편 찬송만 불러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에베소서는 이방인의 교회를 대상으로 쓴 서신서이다. 바울이 오직 시편 찬송만을 불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초대 교회에 관한 역사적 기록을 보면 “초대 교회는 시편 찬송 외에 다른 노래들도 불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유세비우스). “애찬식에서-물로 손을 씻고 나면 불이 켜졌고,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자신이 성경에서 배워 알고 있는 내용이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하나님을 노래하였다”(터틀리안-초대 교부). 바로 이것에 대하여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19절 후반부에서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덧붙인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송축하는 새로운 찬송들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4장 26절에서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가르치는 말씀, 방언, 계시, 방언 통역함은 모두 교인들의 모임 시간이나 그 직전에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찬송시”라는 단어가 시편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문맥을 무시하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 “영으로 찬송하고”라는 말의 의미는 시편으로 찬송한다는 뜻이 아니고 그것은 마음으로 찬송하는 황홀경의 상태에서 부르는 영적인 찬송을 의미한다.

 

- 오늘날의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왜 이렇게 어두운지 그 이유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본문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전형적인 모임을 엿볼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묘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는 술에 취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요소들이 있다. 거기에는 기쁨도 있고 자유로움도 있고 행복도 감동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이런 것이 빠질 수는 없는 것이다. 부흥의 때에는 일종의“거룩한 무질서”라고 불리우는 특별한 일들이 일어난다. 분명히 무질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질서가 있다. 모든 사람이 영적인 유익을 얻고 기쁨의 영으로 충만해진다.

 

만일 여러분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사도가 오직 시편 찬송만 부르는 생기 없고 엄숙하며 지루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사도의 말을 크게 오해한 것이다. 오히려 사도는 정반대의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찬송이나 시편 외에 다른 것들을 하나님을 송축하는 노래로 부르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즉흥적인 기도 역시 잘못된 것인가? 또 어떤 사람이 기도하다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표현하게 되는 찬송과 경배, 감탄과 감사도 모두 잘못된 것인가?

 

성령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영감되어 권위 있고도 오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도록 역사하셨던 것처럼, 또한 찬송 작가에게 능력을 주시어 새로운 찬송을 만들어 내게도 하신다. 그들의 잘못은 몇몇 찬송이 나쁘다는 이유로 나쁜 찬송만 버리면 되는데 그들은 모든 찬송을 버린 것이다. 고린도교회는 절제하지 못한 잘못이 있었다. 바울은 “...다하되 모든 것을 품위있게 하고 질서있게 하라”고 말했다. 무질서의 반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절제 있게 통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할 규칙이기도 하다.

 

참된 부흥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에 충만하게 임할 때마다, 교회에는 수없이 많은 새로운 찬송들이 생겨난다. 마틴 루터, 찰스 웨슬러, 존 케닉, 필립 도드리지, 웨일즈의 윌리엄 윌리엄즈, 이들은 모두 오늘날 우리가 부르고 있는 영광스러운 찬송들을 만드는데 놀라운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 때때로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이 만든 찬송을 통해서 부흥이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 멋대로 성령을 제한하고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그 증거를 나타내도록 하자.

 

  제 2 장 마음의 노래

 

“사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엡 5:19 )

 

-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 여기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노래할 때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찬양과 관련해서도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두 진리가 있다. 이미 살펴본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5:19)이며, 다른 하나는 이제 살펴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14:40)이다. 성령께서 다스리는 곳에는 자극과 생명력과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절제와 자제도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나타난다는 것이 성령께서 다스리고 계신다는 독특한 증거이다. 우리는 그 위험을 피하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양극단으로 빠져 버린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고” 킹제임스 번역에는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고”라고 번역되어 있다. ‘곡조’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뜻은 ‘감미로운 음악, 아름답게 배열된 음악적인 소리들, 음악적인 소리를 만들어내는 아름다움, 아름다운 선율과 가락등이다. 사도가 19절에서 곡조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음악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특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저는 오늘날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어려움 중에 하나가, ’마음으로 주께 아름다운 곡조를 만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고 어리석게도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도는 기교 부리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그 어떤 것도 기교를 특징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기교 부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자랑하는 것은 본래 세상이 하는 일이다. 신문에 실린 음악 비평 기사를 읽어 보면, 오늘날의 사람들이 기교를 부리고 불협화음을 내며 음조가 고르지 않은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다. 기독교적인 모든 것은 항상 아름답고, 항상 평안과 조화와 쉼과 기쁨을 준다. 이것들이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교회는 오늘날 이 세상이 모든 종류의 예술에서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흉한 것에 대하여 정면으로 대항해야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음악에 아름다음과 조화, 평안과 기쁨이 있음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곡조는 결코 경망스럽거나 경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다운 모든 것은 결코 진부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다운 모든 것은 언제나 본질적으로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다. 오늘날 ‘아름다운 곡조’ 라는 단어만큼 남용되는 것은 없다.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그들은 옛날 방식대로 행동하려 하였다. 그러한 그들에게 바울은 과거의 행동 방식을 버리고 그리스도인답게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본문에서 사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찬송할 때, 하나님께 합당한 방식으로 찬송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가사를 경박한 곡에 붙여서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신다면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에게 그 가사에 합당한 가락과 선율을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부르는 노래의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게 하실 것이다.

 

- ‘너희의 마음으로’ - 여기서 이 말은 개인적으로, 진심으로, 또는 감정적으로가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마음’ 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전인격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술에 취해서 노래를 불러 대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즐길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마음으로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어 노래한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 서 있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요4:22,24) 예배 장소나 형식, 의식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다. 사도가 “너희 마음으로” 라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에게 강조하고자 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진리의 빛으로 밝게 비추어 주신다. 여기에는 여러분의 지성도, 이해력도, 이성도 다 포함된다. 바울은 “너희는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묵상하는 것이다. 너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며 주의 깊고도 신중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찬송은 매우 지적인 노래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시편 47편에서 시편 기자도 지식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한다.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완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시47:6-7)

그리스도인이 부르는 찬양의 영광스러움은 그들의 지성과 감정이 모두 작용함으로 인하여 그 찬양에 참되고도 아름다운 곡조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합당하고도 적합한 방식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 사도의 이 권면은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가?

첫째, 가사의 중요성을 생각하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사이다. 곡조가 좋으면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 곡조에 휩쓸려 찬송을 부르기 쉽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찬양과 경배가 말씀 선포, 곧 설교와 따로 노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개신교 신앙에 따르는 우리는 성례와 말씀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왔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에서는 말씀이 선포되지 않아도 성례를 집행하고 참여할 수 있다. 동일한 원칙으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찬송으로 채워져 있는 예배가 옳은 것일까? 절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우선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예배에서 말씀은 선포되지 않은 채로 찬양만 불러서는 안 된다. 만일 이 두가지를 꼭 분리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부르는 찬송 가사의 의미를 반드시 명확히 알고 이해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이 찬양을 부르는 것이 경건에 큰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덧붙여 말하기를 교묘한 현혹을 경계해야 한다고 한다. 가사보다 곡에 더 감동을 받거나 가사는 잊어버린 채 곡에만 심취하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감정주의에 빠지지 말라. 너무 지나치게 찬양하지 말라. 예배 전에 준비 찬송을 하는 것은 현대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찬양으로 열기를 뜨겁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찬양을 통해서 고의적으로 감정을 조장하고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많이 있다. 몇 마디 가벼운 농담을 함으로써 회중을 좋은 분위기로 이끌어 가려는 찬양 인도자가 과연 성경적인지를 생각해 보라. 어떤 사람들은 손뻑을 치므로써 모임의 분위기를 달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의 감동이 너무나 커서 자신도 모르게 손뻑을 치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색소폰이나 그와 비슷한 악기들의 음색은 원색적이어서 감정만 자극할 뿐 생각을 더 깊게 해 주지 못하며 말씀을 더 잘 깨닫도록 도와주지도 못한다. 우리의 생각을 더 깊게 해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깨닫도록 도와주는,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인의 음악이 가진 큰 특징인데 세상 노래에나 어울리는 매우 감각적인 악기들은 그리스도인의 예배에 절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 자신이 행복해질 때까지 찬양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너희가 성령으로 충만해져 있고 너희 마음에 이 기쁨을 부어 주셨기 때문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화답하고 주께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어 찬송함으로써 너희의 기쁨을 표출하여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함께 찬송하라. 바울은 사람들에게 회중석에 앉아서 찬양대가 부르는 아름다운 찬양을 들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특히 보수를 받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닌데도 노래 실력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버젓이 예배에 들어와서 찬양을 부르는 것은 훨씬 더 나쁜 일이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의 백성이 한자리에 모인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져 있으며,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 찬양에 참여한다. 그들 모두가 동일한 성령을 받고 동일한 성령의 은혜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찬양을 회복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참여하여 함께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회중이 하나가 되어 함께 찬양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는 조화와 균형과 절제가 있다. 어느 한사람도 튀는 목소리로 큰소리를 내어 찬양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사도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교훈이다.

그리스도인의 찬양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무엇인가?(갈5:22-23) 먼저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나타난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가 없으며 자신을 드러내는 일도 없다. 또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가 나타난다. 자기의 목소리를 과시하며 잘난체하는 것과는 정반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찬양에서 우리는 한사람인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 사도가 이 모든 것에 관하여 기록하였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 하나님의 집에 우리가 모이는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찬송하기 위함이다. 술 취한 사람처럼 행동하지 말라. 여러분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평강과 아름다운 곡조, 조화와 온유, 그리고 절제가 드러나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찬송을 부르는 일에 무절제가 있다고 해서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쳐 성령을 소멸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리고 동시에 모든 일을 성령의 통치와 자유 가운데 품위 있게, 질서 있게, 절제하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을 통제하면서 행하라.(딤후1:7)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가 무엇이든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아름다움과 조화, 평강과 선율, 성령의 영광스러운 성품들을 분명하게 드러내도록 하자. 그리하여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영광과 높임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

 

제 3 장 영원한 노래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 엡 5:19 )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이 세상의 방식과는 정반대된다. 세상은 품위가 낮고 감상적인 노래들을 부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을 부른다. 세상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기 위하여 함께 모여 교제하며 노래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에 있는 행복을 표현하기 위하여 함께 모여 노래한다. 특히 결정적인 차이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주제이다. 세상 사람들은 항상 자기 자신을 노래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부르는 노래의 주제는 항상 주님이 중심을 이룬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 ‘주’라는 단어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관심을 성령에게로 이끌지 않는다. 또한 우리 자신에게로 관심을 이끌지도 않으며, 어떤 특별한 결과에 관심을 두게 하지도 않는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시금석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태도, 우리의 관계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항상 본질이며 중심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이며 끝이요, 알파와 오메가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기뻐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로 마주 대하도록 돕는 것들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찬양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이 아니라 바로 주님 자체라는 점이다. 우리는 항상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자신에게서 시작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찬양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의 중요한 주제이다. 구약의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만 해도 항상 온몸과 마음속 가장 깊은 곳까지 감동과 감격을 느꼈다. 그리하여 구약의 선지자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시와 산문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단순히 위대한 문학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 그것은 성령의 역사였다. 우리 주님께서 실제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으로 태어나셨을 때, 제일 먼저 일어난 일도 천사들이 그리스도를 찬양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것을 생각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으로부터 찬송과 감사와 노래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우리의 고백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철저한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으로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어 주님을 찬양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한자리에 모일 때에 바로 이러한 일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문제에 얽매여 자신의 영적인 맥박을 재는 일, 자신의 체험을 살펴보는 일, 이런 저런 복을 갈망하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그 열매로 자연스럽게 우리 주 예수님을 찬양하게 된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을 주시고, 그리고 성경 안에서 주님을 본 사람은 반드시 마음으로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어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

 

- 무엇을 찬양할 것인가? 우리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인격과 찬란한 위엄을 찬양해야 한다. 주님의 영원하심, 영원한 영광, 피조되지 않고 성부와 동등하시며 영원하신 주님! 바로 이것이 우리가 노래해야 할 주님의 인격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정말 깊이 묵상해야 한다.

창조세계를 보라. 이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다.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에는 우리를 위한 간구가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17:24)

우리는 주님에게 속해 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주님을 알며 주님을 보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즉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고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성육신의 놀라운 신비 근처에만 가도 찬송을 부르기 시작한다.

디모데전서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는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빌립보서 2:5-11에 기록된 사도의 강력한 진술을 들어 보라. 성육신과 그 모든 과정, 그리고 사도는 그것을 살펴볼 때마다 골수에 사무치도록 감동을 받았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오늘날 기독교회의 큰 문제점은 이런 저런 사회 문제 등에 대해서 말하는데 시간을 써 버린다는 것이다. 교회가 그런 문제들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이 교회의 중심이 될 수는 없다. 교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까닭은 교회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성육신에 크게 감동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삶의 구체적인 일들과 관련하여 주님의 교훈을 듣지 않는 이유는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주님을 알고 성육신의 이유를 알기 전까지 절대 주님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노래하고 싶은가? 혹시 여러분의 마음에 아무런 감흥도 없고 부를 거리도 없고 마음에 아무런 곡조도 없어 고민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바라보라. 우리 주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형체로 계셨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주님께서는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 그리스도인들이여!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생각해도 마음이 불붙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주제만으로도 이 세상에서의 시간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서의 시간을 다 들여서 배워도 배워도 다 배우지 못할 엄청난 주제이다.

 

이 땅에서 주님이 살아가신 모습을 바라보라. 그분의 겸손을 생각해보라. 우리 주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셨지만, 가난하고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그 사람을 도와주시기 위하여 아무런 망설임 없이 기꺼이 멈추어 서시는 주님을 보라. 세리와 죄인들까지도 너그럽게 받아 주시는 주님의 넓은 마음을 바라보라. 종교 지도자들은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헐뜯고 비난했다. 주님의 생애를 생각하면서도 왜 우리 마음에는 아름다운 곡조가 없는가?

 

주님의 직분을 깊이 생각해 보라. 우리 주님은 위대한 선지자이다. 그분의 권위와 가르침을 찬양하라. 우리의 제사장인 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을 일점일획도 어기지 않으시고, 율법을 영화롭게 하셨다. 주님의 고난을 깊이 생각해 보라. 핍박과 조롱과 원한, 그리고 침 뱉음과 멸시를 생각해 보라. 여러분의 입에서 저절로 찬양이 흘러나오지 않는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는 주님을 바라보라. 영광의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다. 주님은 제사장으로서 책무를 감당하시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것이다.

 

우리 주님이 지금도 하늘에서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중보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님은 왕이시다. 사망은 예수님을 붙잡아 놓을 수 없었다. 주님에게 모든 능력과 권세가 있기 때문이다. 지친 성도들이여! 자기 자신의 모습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성도들이여! 여러분의 구주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하늘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을 생각하라. 자신의 원수들이 발등상이 되는 날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 주님은 왕 중의 왕, 만주의 주로서 구름을 타고 천군 천사들의 호의를 받으면서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들이 우리가 노래해야 할 주제이다.

 

어떻게 하면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때까지 주님을 깊이 생각하라. 성령님께 주님을 계시해 달라고 간구하라.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여러분은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며 찬송하게 될 것이다. 주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주님을 찬양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아무리 오래 찬양해도 이 주제에 관해서는 늘 새롭게 시작한 느낌만 들 뿐이다. 이 주제를 노래할수록 우리가 얼마나 가련한 존재이며 우리의 말이 얼마나 부족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턱없이 부족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리 찬양을 잘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종의 리허설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는 천국에서 참여하게 될 위대한 음악 축제를 준비하는 것일 뿐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함께 모여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라. 왜냐하면 천국에 가면 위대한 노래를 듣게 될 것인데, 만일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는 것을 모른다면 너희는 혼자 버려진 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부를 찬송을 지금부터 준비하라.

여러분은 이런 종류의 찬양을 들어 보았는가? 여러분들에게는 찬양의 은사가 없더라도 다른 사람의 찬양을 들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아멘!’ 이라고 화답하고 싶지 않는가? 희미한 ‘아멘!’ 조차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이 더 큰 ‘아멘!’이 될 수 있게 하라.

제 4 장 찬양의 삶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 엡 5:20 )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모든 차이점이 예배와 찬양이라는 공동체적인 행동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 “감사하며” -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아마도 ‘감사’일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심정을 품고 있으며,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찬양이 넘쳐흐른다. 이것은 성령의 필연적 열매이다. 부흥의 기록을 보면 부흥의 현장마다 감사와 찬양의 열기가 뜨거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께서 능력으로 임재하시면, 먼저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지식과 이해력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관한 어떤 것들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마음에도 감동을 주고 역사한다.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고,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며, 연약해진 마음을 회복시켜 준다. 이렇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감사와 찬양의 심정으로 가득 차게 된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얼마나 역사하시는지 그 분량과 정도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 주는 것은, 우리의 기도 가운데 감사와 간구의 비율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다. 영적인 삶이 연약하고 냄비처럼 쉬게 끊어올랐다가 한순간에 꺼지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간구하는 데 사용하고, 감사는 좀처럼 하지 않는다. 이것 저것 잔뜩 간구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러면서 하나님은 자기를 공정하게 대우해 주지 않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어쩌면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모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큰 복을 받지 못한채 지금의 모습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형식적으로 감사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마음에도 없는 감사를 여러분에게 표현할 때 여러분의 기분이 어떠하겠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관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간구 제목을 가지고 형식적으로 기도한다. 이보다 더 끔찍한 사실은 그렇게 기도한 것을 뿌듯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기도 제목을 적어 놓은 목록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했을 때는 더욱 뿌듯해한다. 오해하지 말라. 여러분이 선교사나 어려운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기로 약속했다면 반드시 기도해야하고, 그것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는 선한 일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영적 상태와 삶의 전반적인 상태를 측정해 볼 수 있는 기준이, 우리의 기도 생활과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모든 생각 가운데 감사와 찬양의 요소가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아버지 하나님께” -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아버지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가리킨다. 전능하고도 영원하신 창조자로서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행해야 하는 의무요,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도 행해야 하는 의무이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찬송해야 한다. 모든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온 우주가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그런데 사도는 ‘하나님’ 이라는 단어에 ‘아버지’ 라는 단어를 붙인다. 이 ‘아버지’라는 단어는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특별히 덧붙인 말이다.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아버지가 되어 주시지 않는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아버지가 되신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그들은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다. 바울은 우리의 의무를 가르쳐 주기 위하여 매우 신중하게 하나님이라는 단어에 ‘아버지’ 라는 단어를 붙여 쓴 것이다. 또한 바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비그리스도인보다 훨씬 더 크고도 풍성한 감사와 찬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 ‘항상’ 감사하라. 어떻게 하는 것이 항상(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 그 자체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의 창조자가 되신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께 늘 감사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신 많은 것들을 깊이 생각해 보라.

 

결혼과 가정을 세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남자에게 돕는 배필인 여자를 주셔서 함께하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가정을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로 지정해 주셨다. 짐승과 달리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의 생존을 위하여 싸우거나 방어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하루도 빠짐없이 감사해야 한다.

신체적인 필요들을 채우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한다.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시며, 의식주를, 건강도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누리는 개인적인 은사들을 생각해보라. 누구든지 일정한 능력이나 소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여러분이 그런 재능을 창조해 낸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값없이 주신 모든 것들을 숙고하기만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찬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지도 제대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베푸시는 긍휼을 생각해 보라. 우리가 그렇게 많은 죄를 지었는데도 아직까지 진멸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 인자하심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꾀에 따라서 살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의 형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새 생명도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시고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우리를 인도하고 지도하며 돌보신다. 장차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왕으로 통치하며 세상을 심판하고, 천사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토록 영광스러운 장래를 위하여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계신다. 이런 이유로 사도는 우리에게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라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는 도대체 왜 매일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들을 우리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말할 뿐,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온갖 것들 때문에 하루에도 수없이 흥분하고 작은 일에 성공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 자신들을 정직하게 돌아보자.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천국의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흥분과 전율은 어디에 있는가? 감사와 찬양은 어디에 있는가? 항상, 항상, 쉬지 말고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한다.

 

사도는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 라고 말한다. 시련 속에서도, 고난 속에서도, 질병을 앓고 있을 때도, 모든 일이 엉망진창일 때도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한다.(롬8:28) 심지어 징계를 받을 때에도 감사해야 하고 기뻐해야 한다고 말한다.(히12:5-11, 약1:2, 벧전1:5-7)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과 실라는 가장 깊은 옥에 갇히고 발은 차꼬에 매여 있었지만, 범사에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다.

지금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난당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특권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이 세상은 그분을 미워하고 핍박했다.

 

여러분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자신에게 물어보라. 혹시 나를 각성시켜서 정신을 차리고 나를 점검하게 하며 생각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닐까? 어쩌면 여러분은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들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시는 약간의 징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징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참 자녀라는 증거인 것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 여러분은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 채로 모든 일이 형통한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한 손안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이 더 유익하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하여 영원 전부터 세워 놓으신 계획을 반드시 완성하실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일에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되 반드시 주 예수 이름으로 감사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니면 그 누구라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된 형제자매 여러분! 불평은 너무나 쉽게 늘어놓으면서 찬양하기에는 굼뱅이같이 느린 우리의 모습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지고 우리는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엡1:18-19) 알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성경을 읽고 묵상하게 하시며 깊이 숙고하게 만드신다. 그러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살펴본 진리들을 깨닫게 될 때,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의 권면대로 살게 될 것이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PBA)
글쓴이 : 김영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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