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기 반 동안이나 에임스의 「신학의 정수」는 청교도적 신앙과 생활의 명확하고 설득력있는 표현으로서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영국, 홀랜드 그리고 뉴잉글랜드에서 청교도의 방식을 열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본서를 탐독했다. 또 그들의 열망이 어떠하든지 임마누엘 대학, 라이든 대학, 하바드 대학, 예일 대학 학부생들은 신학개론의 일환으로 라틴어본 「신학의 정수」를 읽어야 했다. 하트포드의 토머스 후커(Thomas Hooker.1586?-1647)는 매우 열정적으로 동료 목회자들에게 에임스의 「신학의 정수」와 또 다른 저서를 추천하면서 “다른 저서들을 전혀 소장하지 못하고 본서들만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본서들은 능히 그를 훌륭한 목사로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1717년 매더(Cotton Mather)는 임직식 설교에서 목사들의 필독서로 오직 「신학의 정수」만을 추천했다. 현존하는 영역본은 아마도 19세기에 인쇄된 역본일 것이다· 본서가 17세기 초엽에 저술된 라틴어 저서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로써 본서가 매우 광범위하게 출판된 저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임스는 「신학의 정수」를 학문적인 논문이 아니라 평신도와 학생들을 위한 유용한 개론서로 저술했다. 본문은 두 권으로 구분되며 각 장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고 초신자도 특정한 사항에 대해 에임스의 답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하지만 본서는 신학적인 점검을 위한 목록 이상의 저서이다. 「신학의 정수」에 의하면 신학은 인간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삶으로 응답하도록 해야 하며 인간들이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딛2:12)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따라서 본서는 근본적으로는 청교도적 형태의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교본이다.
윌리엄 에임스는 1576년 서포크에 있는 입스위치에서 탄생하였다. 이곳은 동 앵글리아에서 청교도주의가 뿌리를 내린 지역이며 왕권과 주교의 종교적 박해가 가장 비효과적이었던 지역이다. 그의 부친은 청교도 정신에 공감한 부유한 상인이었다. 그의 모친은 신세계에 플리머드 정착촌을 건설하도록 조역했던 가문들과 관련된다. 어린 시절 양친의 사망으로 에임스는 비극을 일찍부터 경험하였다. 삼촌이 윌리엄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깊은 이해와 애정으로 그의 생계와 교육을 책임졌다. 에임스는 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위해 자연적으로 옥스퍼드 대학 대신 당시 청교도 학문의 중심지였던 케임브리지 대학을 선택하였다. 이 대학은 토머스 카트라이트, 윌리엄 퍼킨스, 존 프레스톤과 같은 대가들이 설교와 가르침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에임스는 “땅에서 유리하거나” 구금되려는 상황에서 영국을 떠나 홀랜드로 망명하겠다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1610년에 홀랜드에 도착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명성과 갈등, 첫 번째 부인의 사망, 재정적인 불안정, 영국 당국으로부터의 지속적인 방해를 겪었으며 마침내 1633년 5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에임스는 1622년 프라네커에서 신학부 교수로서 사역하기 시작했다. 그가 계획대로 미국으로 이주했었다면 아마 하버드 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었을 것이다. 하버드 대학 도서관의 최초의 장서는 에임스의 저서들이었다. 코튼 매더는 그를 “심오하고 구귀하고 섬세하고 반박할 수 없는 영국 박사”라고 명명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종종 에임스의 사상에서 출발했다. 초기 미국의 신학과 지성사에 있어서 윌리엄 에임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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