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7장에 대한 서론
(롬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6장과 7장은 제가 볼 때 하나의 괄호로 취급해야 한다. 위대한 구속교리에 대한 사도 바울의 논증의 중요 흐름은 5:21에서 8:1로 또는 8:5로 직행하는 것이다. 6,7장은 5:21의 장엄한 진술에서 야기되는 난제들을 확실히 해주기 위한 괄호와 같은 장이다. (롬5: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난제들은 첫째 율법폐기론의 도전이다.
그는 6:1-13에서 넘치는 은혜는 죄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유발함을 보여주었다.
6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치종적이고 압도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논박한다. 넘치는 은혜의 효과는 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고, 죄의 죽음을 의미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거룩과 의와 영광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증거한다. 은혜의 목적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며 하나님 앞에서 책망할 것이 없이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7장의 목적은 율법의 기능과 목적을 부여 주고자 하는 데 있다. 율법을 통한 칭의가 불가능한 것같이 율법에 의한 성화도 동등하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율법이 성화에 장애가 된다고까지 말한다. 7장은 세 대목으로 나눌 수 있다.
1) 1~6절.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는 유일한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것이다.
2) 7~12절. 율법에 대한 옹호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문제는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3) 13~25절. 율법 아래 여전히 우리가 남아 있는 신분이라면 성화가 철저하게 불가능하다.
7장이 가지는 일반적인 구조는 5:10에서 거창하게 말한 것을 되풀이 말하고 거듭 적용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롬5: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완전히 구원을 받고, 영원토록 구원받고, 완전히 거룩하게 되고, 완젆리 영화롭게 된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이다! 그것이 유일한 길이요, 그 밖에 다른 길은 없다.
성경 전체에서 7장 만큼 죄와 죄의 방식과 그 열매에 대하여 가장 심오하게 분석해 내는 곳이 없다. 그처럼 죄와 죄가 하는 일에 대하여 심호한 심리학적 분석을 해내는 곳은 없다.
또한 7장은 신자의 삶에서 율법의 기능과 율법의 위치에 대한 권위 있는 진술이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율법이 끝내 힘을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7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진술이다. 기독교의 구원 교리를 무시한 채 기독교 도덕이나 윤리 등을 믿는 것은 전적으로 무익하다. 로마서 7장 만큼 그 입장을 전적으로 폐쇠하는 진술을 다른 곳에서는 ㅊ찾아볼 수 없다. 구원 교리를 희생시키고 윤리나 도덕을 높이는 어리석음을 철저하게 논박하는 것이 바로 이 장이다.
저는 많은, 아니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거의 대부분의 고통은 로마서 7장의 교훈을 파악하지 못하는 데 기인한다고 감히 단언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가지는 개념이 얼마나 전적으로 부족한가! 죄에 대해서는 얼마나 적게 말하며, 죄를 청산하라는 설교를 얼마나 싫어하는가! 오늘날 현대 기독교의 대부분이 피상적인 논리를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7장의 의미를 경험하지 못했던 자가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것”에 관해서 입심 좋게 논쟁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들을 결코 그들 자신 안에 있는 죄의 깊이를 깨닫지 못한다. 죄의 권능과 가공할 힘과 추함을 결코 안 적이 없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기들이 믿거나 ‘결심을 하고’ ‘앞으로 나아올 때’ 모든 것은 깨끗해졌고, 그 후로는 언제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가지 않아 어떤 난관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죄를 전혀 이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율법과 자기들의 관계에 대해서 계속 고민을 하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들은 ‘율법 아래’로 자신들을 데려다 놓는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정죄 아래 놓게 된다. 자기들의 구원에 대해서 의심하게 되고, 구원의 확신을 상실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중상 모략의 오욕’을 당하게 되겠지만 이렇게 말씀 드린다. 여러분이 신자이기 때문에 아무리 깊은, 그리고 아무리 포악한 죄를 짓든지 간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코 다시는 정죄를 받지 않는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이 죄를 지을지라도, 그 죄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여러분은 자신을 ‘율법 아래’로 다시 가져다 놓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사도 바울이 7장에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바는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그것과의 관계를 청산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결혼관계에 있다. 결코 다시 옛 관계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어떻게 실패하든지, ‘율법 아래’로 되돌아가서는 안된다. 정죄의식에 여러분의 자리를 양보해서는 안된다. 주의 성찬식도 충분히 선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와 결혼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더 이상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자기들이 그리스도께 연합되었음을 상기하고, 그리스도와 교제를 누리고 있으며 그로부터 힘과 권능을 받을 수 있다.
율법과의 관계에서 율법폐기론에 빠지는 것은 치명적 오해이다. 언제나 두 극단은 존재한다. 자신을 ‘율법 아래’로 놓고 그 정죄를 두려워하는 사람, 정확히 그 반대의 철면피와 같은 뻔뻔스런 사람, 이는 반율법주의라 불리는 가공할 죄를 짓고 있다. 그러나 세 번째 그룹이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 하신 주님과 연합해 있다는 교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우리가 아담 안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바울은 5장 10절이하에서 그 점을 상론하였다. 논증의 전체 요점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을 감사한다! 그와 연합되었고 결혼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오직 한 가지 일은 그리스도께 신실하는 것이다.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오직 그에게만 당신을 드리라. 그것이 결혼서약이요 선서이다.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과 오직 유일한 힘은 그리스도의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깨닫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모든 상세한 국면에까지 그에게 철저하게 복종하는 것이다.
'성경강해·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19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 (0) | 2010.12.19 |
---|---|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18장 우리가--- 너희도/존스, 에베소서강해1권 (0) | 2010.12.17 |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됨(에베소서강해1권17장) (0) | 2010.12.10 |
죄와 은혜의 궁극적인 결과(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3권22장) (0) | 2010.12.03 |
그 뜻의 비밀 (로이드 존스, 에베소서강해1권 16장) (0) | 2010.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