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수 4:20-24
1. 요단을 건너게 하심은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요단 강을 건너게 하셨다.
그것은 그 전에 홍해를 말리시고 건너게 하심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 강하신 손으로 역사하여 홍해와 요단의 흐르는 물을 멈추게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마른 땅을 밟고 건너게 하셨다.
그것은 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성경을 믿는 우리는 이 기사와 말씀을 통해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의 강한 손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다.
과거에는 기적을 행하셨지만, 지금은 그 손이 약해져서 아무 것도 못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오늘 내가 숨 쉬고 있는 것도, 세상이 아직 존재하고 있는 것도,
그분이 그의 강하신 손으로 붙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세상도 언제 안개와 같이 사라질지 알지를 못할 뿐이다.
오늘도 그 강하신 손으로 뜻과 섭리를 따라 통치와 심판을 행하고 계심을 믿으라.
우리의 장래와 환경과 운명이 그분의 강하신 손에 달려 있다.
그 강하신 손을 가지고 역사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2. 요단을 건너게 하심은 이스라엘로 그들의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는 것과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 그분을 항상 경외하게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백성들은 홍해와 요단을 건너는 기적을 보고서도 그 때뿐이었다.
어려움과 불편이 닥치면 원망하고 대적하다가 망하고 말았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기적을 표적으로 행하셨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경험하고 아는 것과, 믿고 경외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분이 어떤 분인 줄 알았으면, 믿고 경외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믿음을 보고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다(창22:12).
하나님은 창조부터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사람들은 금새 까막눈이 되고 만다.
어줍잖은 자기 지혜를 의존해서 역사적인 기록들도 믿을려고 하질 않는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나라였던 유럽과 미국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극소수라고 한다.
자기들의 지혜와 학문으로 다시 만든 하나님을 그들은 오히려 더 좋아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포로된 교회요, 바벨탑에 갇힌 기독교이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요, 신학이 실종된 기독교이다.
그러한 교회와 기독교는 신비주의와 쉽게 손잡게 되고,
부족한 기독교를 심리학과 경영학과 오락으로 채우게 된다.
그리스도와 사도와 선지자들로 충분한 기독교가 인간들의 지혜의 도움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3. 요단을 건너게 하심은 기념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요단에서 가져온 열 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묻거든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홍해를 말리시고 건너게 하심과 같이, 요단을 말리시고 건너게 하셨음이라---하라“
요단을 말리고 마른 땅을 건너게 하셨음을
그 요단 바닥에서 취한 열 두 돌을 통해 기념하라고 하셨다.
기념하는 것은 다시 알고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
어제의 역사를 오늘의 산 역사로 살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많은 기념식처럼 아무 의미도 없고, 행사를 위한 행사가 되고 만다.
기억상실증이 미혹을 낳고 다른 복음을 좇게 하고, 사망을 낳게 된다.
우리 주님 또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날 밤 성찬식을 제정하시고 기념하라 하셨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셨음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성찬을 나누며 그 찢긴 몸과 흘리신 피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무의미한 기념일 뿐이다.
하나님은 강한 손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요단을 건너게 하셨다.
홍해는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요단은 광야를 끝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 위함이었다.
홍해를 건너게 하심은 애굽으로부터 구원을 시작하기 위함이요,
요단을 건너게 하심은 광야로부터 구원을 완성하기 위함이다.
홍해의 흐르는 물을 멈추게 하시고 마른 땅이 되게 하여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셨다.
그러나 뒤쫓아 오는 원수 바로와 철병거들은 다시 흐르게 하여 그들을 수장시키셨다.
우리의 구원 또한 강한 손으로 세상의 흐름을 끊고 마른 땅을 밟고 건너게 하신 것이다.
원수 마귀와 그 도구들을 수장시키시고 우리를 강한 손으로 교회로 구출하신 것이다.
애굽에, 세상에, 다시는 미련을 두지 않게 하실려고 흐름을 끊고 건너게 하시고
다시 흐르게 하셔서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하게 하셨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하여 홍해와 요단을 건너게 하셨음을 기념하고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요단을 건너게 하신 후 가장 걱정하신 것이,
그들이 풍요하고 배부를 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 손의 능력을 믿게 되는 것이었다.
4. 요단을 건너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여호와의 강한 손의 은혜로 우리가 애굽을 건너 왔음을 기념하면서,
이제 우리가 광야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은, 아직도 우리 마음과 몸에 남아있는 애굽의 풍속들을
제거하는 훈련과 연단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홍해와 요단을 건너는 것은 구약적인 역사요, 그림자와 같은 표현이다.
신약의 역사와 실체의 표현은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다.
홍해와 광야와 요단은 이제 십자가를 통해서 건너가게 된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몸을 제물로 드리고 피를 흘리심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하나님은 은혜로 선물로 믿음을 주셔서 이를 믿게 하시고 그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신다.
우리는 광야에서 주님을 본받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훈련과 연단을 한다.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말씀)를 먹으며 사는 훈련을 한다.
홍해를 건널 때는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졌지만,
요단을 건널 때는 제사장이 법궤를 매고 요단에 발을 딛는 순간
하나님은 흐르는 물을 멈추게 하여 땅을 마르게 하셨고
법궤를 맨 제사장이 요단 한 가운데 서 있는 동안 이스라엘이 다 건너도록 하셨다.
법궤를 맨 제사장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또한 법궤를 항상 메고 요단을 건너가는 제사장들이다.
말씀으로 사는 훈련을 하면서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 함께 영광을 받게 하신다.
교회 생활이 단지 복을 구해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강한 손으로 이루신 것,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어 이루신 것을 알고, 말씀으로 살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훈련을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요단을 건너가서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이미 우리 마음 가운데 이 땅 가운데 임하였다.
우리는 말씀으로 살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는 훈련을 하면서 이 땅에서도 천국을 사는 것이다.
광야에서 고난과 연단의 훈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주님 주시는 은혜와 평강으로, 천국을 눈에 넣고 사는 사람들은 이미 요단을 건넌 사람들이다.
죽어서 건너는 요단 뿐이 아니라 그 요단을 살아 있는 동안에 덧입어서 사는 것이 믿음이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5:1-5)
벗고자 함, 죽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 살고자 함이다.
빨리 죽어서 영원한 집으로 가고자 함이 아니요 이곳에서 사는 동안 천국을 덧입고자 함이다.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는 것이요,
죽을 것 같은 고난들이 천국의 생명에 삼킨 바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 속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었고,
항상 감사할 수 있었고 항상 기도할 수 있었다.
이것을 우리 속에 이루시는 분은 성령이시요 그 성령은 그 모든 것에 대한 보증이시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우리는 하늘을 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해야 한다. 주님과 함께 우리가 살 영원한 집을 사모해야 한다.
위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죽었고,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것이다.
그것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요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홍해를 건넜고,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시민권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의 소망이 하늘에 있어야지 땅에 있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해 홍해와 요단을 건너게 하셨다.
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항상 경외하게 하기 위해 홍해와 요단을 건너게 하셨다.
우리 주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 죄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지셨다.
몸이 찟기고 피를 흘리셨다. 이 또한 여호와의 강한 손이 이루신 일이다.
홍해를 건너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강한 손으로 역사하셨다.
홍해와 요단을 강한 손으로 건너게 하심은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항상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기적과 표적은 하나님이 강한 손으로 행하신 것이기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표적만을 구하는 믿음은 불완전한 믿음이요, 변덕스러운 군중의 천박한 환호일 뿐이다.
그 의미와 목적은 사라지고 기적과 축복만을 구한다면 그 장단에 놀아날 하나님이 아니시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마16:4)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2:18-22)
표적의 의미와 목적은 관심이 없고 오직 표적 자체에만 의존하는 믿음은
미숙한 믿음이고 매우 위험한 믿음이다.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매우 강력한 행동의 증거이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2-25)
아무리 많은 표적을 행한다 해도, 아무리 세상 지혜를 많이 가졌다고 해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다면,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시다.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게 보이고 약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
참으로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신 것이다.
홍해와 요단을 마르게 하셔서 건너게 하신 것을 보고 여호와의 손이 강하심을 알아야 한다.
주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 여호와를 믿고 항상 경외하여야 한다.
가장 큰 기적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이 기적이요,
천국과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기적이다.
열 두 돌에서, 십자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강한 손과 사랑을 알고,
여호와 나의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는 신앙으로 살자.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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