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반드시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반려자(companion)로서 곁에 함께 두고 있는 법이다. 아니, 차라리 믿음이 그 자체에서 소망을 낳고 소망을 드러낸다고 하는 것이 낫겠다. 이 소망이 없다면, 아무리 세련되고 유려하게 믿음을 논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이 확실한 것이다. 믿음이 하나님의 진리를 확고히 믿는 것(a sure persuasion)이라면 - 그 진리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우리를 속일 수도 헛될 수도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면 - 이런 확신을 얻은 사람은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들을 이행하실 것을 반드시 기대하게 될 것이다 그 약속들이 절대로 참되다는 것을 확고히 믿기 때문이다.
소망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믿음이 하나님께서 참되이 약속하셨다고 받아들이는 그런 일들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믿음은 하나님께서 참되심을 믿으며, 소망은 그의 참되심이 드러날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으며, 소망은 그가 스스로 아버지이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다. 믿음은 소망이 근거를 두는 기초이며, 소망은 믿음을 자라게 하고 유지시켜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미 믿고 있는 사람 이외에는 누구도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구할 수가 없듯이, 우리 믿음의 연약함이 희미해지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끈기 있는 소망과 기대를 통해서 자라고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을 소망에 두는 것이다(롬8:24).
소망은 고요한 중에 주를 기다리면서 믿음이 너무 성급하게 서둘다가 곤두박질치듯 떨어지지 않도록 그 믿음을 통제시켜 준다. 소망이 믿음을 강건케 하여 하나님의 약속들 속에서 흔들리거나 그 약속들의 진실성에 대해서 의심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는 것이다. 소망은 또한 믿음을 새롭게 만들어서 지치지 않도록 해 준다. 믿음을 그 마지막 목표점까지 계속 유지되도록 하며 중간에나 아니면 첫 시발점에서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 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소망은 끊임없이 믿음을 새롭게 하고 회복시킴으로써 계속해서 믿음을 인내로 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을 공격하고 치고 때리는 시험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면, 믿음을 세워가는 데 소망의 뒷받침이 정말 여러 가지 면에서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더욱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주님은 그의 약속들을 이루시기를 지체하심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을 근심 가운데 두시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때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합2:3)는 선지자의 말씀을 실행케 하는 것이 바로 소망의 기능이다. 그 리고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지친 상태에 빠지도록 허용하실 뿐 아니라 노골적으로 우리를 향하여 진노를 드러내시기도 한다. 이때 소망의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다. 소망의 도움이 있어야만 다른 선지자의 말씀대로 우리가 “야곱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베드도가 말씀한 바와 같이 이때에 기롱하는 자들이 일어나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주의 강립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밷후3:4) 그리고 육체와 세상도 우리에게 똑같은 말을 속삭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끝까지 인내하는 소망으로 우리의 믿음을 뒷받침하여 계속 유지해 감으로써 천 년을 하루같이 생각할 정도로 영원을 늘 바라보도록 되어야 하는 것이다(시90:4; 밷후3:8).
이러한 상호 간의 유사점과 관련성 때문에 성경은 때때로 ‘믿음”과 “소망”이란 단어들을 서로 같은 의미로 혼용하기도 한다. 베드로는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다고 가르치는데(벧전1:5), 여기의 ‘믿음”이란 단어는 “소망”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합당하다. 왜냐하면 소망이란 다름이 아니라 믿음을 자라게 하고 강건케 하는 것이라고 이미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둘이 서로 함께 묶어지는 경우도 있다. 같은 서신서에서 베드로는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다(벧전1:21). 그러나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은 소망에서 기대(expectation)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내로 소망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드러나기까지 우리 자신의 소욕을 억제시키는 것으로 말하기 때문이다(빌1:20). 바울은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5:5). 이는 우리가 값없이 주어지는 사랑에 대하여 복음의 증거를 받아들임으로써, 현재는 소망 아래 숨겨져 있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활짝 열어 보여 주실 때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7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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