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존 칼빈, 기독교 강요, 1권 4장, 무지와 악의에 의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럽혀진다

강대식 2014. 8. 18. 22:34

4장 무지에 의해서나 악의에 의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짓눌리거나 더럽혀짐

 

사람의 무지와 미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의 씨앗을 심어 놓으셨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그것을 마음으로 기리는 사람을 백 사람 중에 한 사람도 만나기 어렵고, 성숙한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더욱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내는 사람은 더 만나기 어려운 현실이다. 게다가 자기들의 미신적인 것들에 휩쓸려버리는 사람들도 있고 또 고의적으로 사악하게 하나님을 저버리는 사람도 있어서, 모두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서 타락하여 있고, 그리하여 진정한 경건을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1:22).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그들의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한다. 건전한 탐구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합당한 한도 이상을 스스로 주장하여 제멋대로 어두움을 자기들 자신에게 드리우며, 사실 자기들의 공허하고 완악한 오만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함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14:1,53:1). 이 말씀은 고의적으로 본성의 빛을 꺼뜨려 스스로를 바보로 만드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본성적인 지각을 통해서 속에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우러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완악하여져서 습관적으로 죄를 범하며 하나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없애버리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보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더라도, 그들은 그의 권능을 부인함으로써 그 신의 영광을 빼앗아 버린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리라”(딤후2:13)고 바울이 선언하거니와, 악인들은 생명이 없는 허망한 우상을 만듦으로써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말이 과연 옳은 것이다.

 

진리와 결합하여야만 순전한 종교임

 

미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으면서도, 거짓된 것으로 하나님을 조롱하는 현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미신은 하나님이 전혀 가치를 두지 않으신다고 선포하신 것들에만 온통 사로잡혀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분명하게 지시하시고 명하시는 것들을 멸시하거나 혹은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한다는 핑계로 거짓된 의식들을 세워놓는 자들은 자기들 자신의 환상을 경배하고 찬송하는 것이다.

 

사도는 신격에 대한 이처럼 희미하고 그릇된 생각을 가리켜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4:8). 한 분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이 없이 방황하던 시절에는 하나님이 없는 자였다고 에베소 사람들에게 가르친다(2:12). 참된 하나님을 계속해서 멀리하고 그를 저버리게 되면 저주받은 우상밖에는 남은 것이 없다. 진리와 결합하지 않는 신앙은 결코 순전하다 할 수 없다는 락탄티우스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악인의 외식이 신에 대한 지각을 억누름

 

스타티우스는 두려움이 세상의 신들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하나님의 의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그의 심판대가 그를 거스르는 범죄들을 벌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심판대가 전복되기를 열심히 바란다. 거룩한 삶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데도, 그들은 시시한 방법들과 하찮은 것들을 준수하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한 방종으로 자기들의 더러움 속에서 뒹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신에 대한 지각이 본성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나의 주장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며, 버림받은 자들로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실임이 입증되는 것이다.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농담도 하고, 그의 권능을 무시하는 우스갯소리들을 수다스럽게 늘어놓다가도, 절망이 짓누르게 되면 하나님을 찾고 억지로라도 입으로 기도를 늘어놓는 것을 볼 때에, 보다 일찍 드러났어야 할 그들의 본 모습이 완악함으로 인하여 억눌려 있어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5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