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장 하나님께 눈에 보이는 형상을 부여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행위이며,
우상을 세우는 것은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임
성경은 하나님을 형상과 결부시키는 행위를 금지함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리를 붙들어야 한다. 곧, 여하한 경우라도 하나님을 어떤 형상과 결부시키게 되면 반드시 불경스러운 거짓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부패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율법에서,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신적 영광이 있음을 말씀하신 후, 그가 인정하시는 예배, 혹은 배격하시는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시면서, 즉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출20:4)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형상이나 그림, 그리고 기타 상징물 등, 미신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실 것이라 여겨온 모든 것들을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다 배격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형상과 결부시키는 것은 그의 위엄을 욕되게 하는 것임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신4:15-18).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을 통해서 찾고자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임을 우리로 분명히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이사야는 형체가 없으신 분을 형체를 지닌 물질과 비슷한 것으로 만들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을 눈에 보이는 모양으로 만들며, 영이신 분을 생명이 없는 물체로 만들고, 측량할 수 없는 분을 나무나 돌이나 금 등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행위는 곧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허구로 하나님의 위엄을 더럽히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사40:18-20,41:7,29,45:9,46:5-7).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들도 형상의 구실이 되지 못함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구체적인 표징을 통해서 그의 신적 위엄이 임재하심을 보여 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 주신 그 모든 표징들은 그의 가르침의 계획의 일환이었으며 동시에 그의 본질이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측량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성령께서는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하셨다(마3:16). 그러나 그가 그 즉시 사라지셨으니, 그 한순간의 상징물을 통해서 신실한 자들을 가르치셔서 성령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심을 믿게 하고, 그리하여 그의 권능과 은혜로 만족하고 자기들 스스로 외형적인 상징물을 찾지 않도록 하고자 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 때때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셨으나, 그것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실 것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구심 삼아 인간 모양의 상징물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일이 없도록 유대인들을 철저하게 금하신 것이다.
교황주의자들의 형상 지지론은 전적으로 부당함
그들은 형상들이 무지한 자들에게 책이 된다는 식의 교묘한 이야기를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들이 동정녀들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형상들보다도 오히려 창녀들이 더 정숙하고 순전한 복장을 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순교자들에게 바친 형상들의 경우도 그보다 조금도 더 정숙하지 못하다.
교회를 다스리는 자들이 가르침의 직분을 우상에게 떠넘긴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곧 자기들 자신이 가르칠 능력이 없는 벙어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복음을 진정으로 전파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신 것이 우리 눈앞에 밝히 보이게” 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갈3:13). 각 교회들마다 여기저기에 십자가들을 – 나무나 돌이나 은이나 금으로 – 그렇게도 많이 세워 놓은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갈3:13), 그의 몸을 제물로 드려서 우리의 죄를 속하셨다는 것(히10:10), 그의 피로써 우리의 죄악들을 씻으셨다는 것(계1:50, 요컨대 우리를 성부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하여 자기를 드리셨다는 것(롬5:10)을 정상적으로 신실하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었단 말인가? 수천개의 나무나 돌로 만든 십자가 형상보다도 오히려 이 한 가지 사실에서 그들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보다는 금과 은에 더 마음과 눈을 집착하기 마련일 것이다.
우상의 기원은 형체를 지닌 신을 찾는 인간의 부패한 욕심에 있음
우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지혜서에 포함되어 있는 진술이 거의 보편적인 동의를 얻어오고 있다. 곧, 죽은 자들에게 존귀를 부여하기 위하여 처음 우상이 만들어졌고, 그리하여 미신적으로 그들을 기억하여 우상에게 예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상의 기원은 인간의 본성 자체가 말하자면 영구한 우상의 제조 공장이라는 데서 찾아야 한다. 여호수아가 증거하듯이, 아브라함이 탄생하기 이전에 데라와 나홀이 이미 거짓 신들을 섬기던 자들이었던 것이다(수24:20). 셈의 자손이 이렇게 급속히 부패해졌다면, 과연 이미 아버지에게서 저주를 받은 함의 자손들의 형편은 어떠했겠는가? 사람의 마음이 교만과 대담함으로 가득 차 있어서 감히 자기들의 역량대로 신을 상상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아둔함 속에서 애쓰며 지극히 어리석은 무지에 점점 빠져 들어가서 거짓되고 허망한 허깨비를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 가져다 놓는 것이다. 마음이 우상을 잉태하고, 손이 그것을 낳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자기를 닮은 어떤 허상을 확보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알고 거기서 위안을 찾기 전에는 언제나 불안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일상적인 체험에서 잘 배우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 거의 모든 시대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어두운 욕심에 복종하기 위하여, 상징물들을 세워놓고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자기들의 눈앞에 나타나셨다고 믿어온 것이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형상을 통한 예배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형상을 바라보며 기도하거나 경배하는 사람치고 자기의 기도를 그 형상이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희망을 품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이 과연 사실이다. 오늘날 이런 형상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칼을 들고 싸우며, 마치 제단과 화로를 지키듯 살육을 무릅쓰기까지 하며, 또한 하나님은 빼앗겨도 쉽게 견디면서 우상을 빼앗기는 것은 그렇게 참지를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일반 대중들이 특별히 우상숭배의 혐의를 벗어나기를 바랄 때에 무어라고 하는가? “우리는 그 형상들을 ‘우리의 신’이라 부르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유대인들도, 그 옛날 이교도들도 그것들을 신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거듭거듭 그들이 나무와 돌들과 더불어 간음한다고 책망하였다(렘2:27,겔6:4,사40:19-20,합2:18-19,신32:37). 그런데 오늘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인정받기를 원하면서도 날마다 나무와 돌을 세워놓고 그 것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많이 있는데, 바로 그런 행위들을 과거에 유대인들이 행하였던 것이다.
형상이 허용되는 한계
절대로 어떠한 형상도 용납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큼 내가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 조각이나 그림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들이므로, 이것들은 각기 순전하고 정당하게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주께서 그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베풀어주신 이 재능들을 잘못 사용하여 우리를 멸망에 빠뜨리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모양으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 행위는 친히 금지하셨고, 또한 그런 행위를 통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더럽혀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형체를 지닌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지 않다면, 형상을 하나님으로 여기거나, 혹은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으로 여겨 경배하는 것은 그보다 더 옳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만을 그림으로 그리든가 조각으로 표현하여야 하며, 인간의 눈에서 무한히 초월하는 하나님의 위엄을 전혀 꼴사나운 표현을 통해서 더럽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교회들 내에 장식되어 있는 형상들 중 거의 전부가 교육이나 교훈에 도움이 되는 역사적 사건들의 표현이 아니고, 그저 즐거움을 주는 것 이외에 별다른 도움을 찾을 수가 없다. 사려 깊은 판단이나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어리석고 무분별한 갈망의 결과임을 얼마든지 추리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설사 형상들을 이용하는 것이 전혀 해악이 없다손 치더라도, 교육을 위해서 조금도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형상은 순전한 신앙을 타락시킴
고대 교회의 권위에 조금이라도 무게를 둔다면, 참된 신앙이 번성하고 교리의 순전함을 갈구했던 오백여 년 동안에는 기독교 교회들에 형상물이 전혀 없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역의 순수성이 다소 퇴화되면서 교회들을 장식하는 예가 처음 도입된 것이다. 형상물이 없이 지냈던 시대의 사람들의 순전함에 비해서 새롭게 형상물들을 도입한 시대의 사람들이 훨씬 타락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점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언어로 진술하고 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나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형상들을 높고 존귀한 자리에 설치하게 되면, 그것들이 감각도 생명도 없는데도 마치 감각과 생명이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된다.” “형상들이 입과 귀와 눈과 발이 있기 때문에 불행한 영혼을 어그러지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러나 말하지도, 보지도, 듣지도, 걷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 영혼을 올바로 잡아줄 능력은 전혀 없다.”
경건을 거의 완전히 말살시켜버릴 정도로 지금까지 온 세상을 점령해온 저 끔찍스러운 광란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들 내에 형상들이 세워지는 그 순간, 말하자면 우상숭배의 깃발이 높이 올라갔다는 것을 너무나 처절하게 경험해왔다. 사람들이 우매하여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곧바로 미신적인 온갖 의식들 속에 빠져 들어갔기 때문이다.
교회당들이 세워진 합당한 목적을 생각할 때에, 교회당들이 주께서 그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구별해 놓으신 그 살아 있는 상징적인 것들 외에 다른 형상들을 취한다는 것은 이렇든저렇든 교회의 거룩성에 전혀 합당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말하는 것은 곧 세례와 주의 성찬 등의 예식들이다. 이 예식들이 우리의 눈을 더욱더 강렬하게 사로잡고 또한 더 생생한 감동을 주어서, 사람들의 재주로 날조된 다른 형상들의 도움을 구하지 않도록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형상에 관한 니케아 공의회(787)의 어리석은 결정
니케아 공의회 –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한 그 탁월한 공의회가 아니라, 이레네 왕후의 명령과 그 후원 하에 열린 공의회를 말한다. - 의 일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공의회에서는 교회당 내에 형상들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예배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오늘날 형상의 사용을 변호하는 자들은 그 니케아 공의회의 지지를 주장한다.
동방 교회의 대표인 요한은,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니 이로 보건대 우리가 형상들을 지녀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2:14)라는 말씀이 형상들을 지녀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성경 본문을 어리석게 왜곡시킴
그들은 경배에 대해 논의하면서, 바로 왕을 축복한 것(창47:10), 야곱의 지팡이(창47:31,히11:21), 그리고 야곱이 세운 돌비(창28:28)를 거론한다. 그 마지막 주장의 경우, 그들은 성경의 의미를 왜곡시킬 뿐 아니라, 성경 어디에도 없는 것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이어서,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시99:5).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시99:9),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얼굴 보기를 원하리로다”(시45:12) 등의 본문들을 인용한다. 그 지체 높은 교부들이 성경을 그렇게 유치하게 다루고, 혹은 그렇게 불경스럽고도 어리석게 성경을 찢어놓고 있으니, 그런 결정 때문에 그들의 신빙성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겠는가!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117-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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