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장 사람의 창조된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원시의
사람은 흠이 없는 상태로 창조되었으므로,
사람의 부패에 대한 책임을 창조주께 돌릴 수 없음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두 가지이다. 곧, 우리가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 우리가 과연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한 지식과, 또한 아담의 타락 이후 우리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지식이 그것이다.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곧, 사람의 본성적인 악행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서 결국 사람의 본성을 지으신 하나님을 탓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육체가 온갖 구실을 찾아서 자기 자신의 악들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지 않고 다른 존재에게로 전가시키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러한 악한 의도를 우리는 부지런히 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재난을 다룰 때에도 모든 술책을 다 끊어내고 그리하여 모든 혐의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드러내도록 그렇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먼저 사람이 흙으로 지음 받았으므로 교만할 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흙집에 살” 뿐 아니라(욥4:19) 자기 스스로가 흙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 자기들의 고귀함을 자랑한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황송하게도 질그릇에 불과한 아담에게 생명을 주셨고, 뿐만 아니라 불멸의 영혼을 거처하게 하셨으니, 아담으로서는 그의 창조주의 크나큰 자비하심에 영광을 돌려야 마땅할 것이다.
영혼의 불멸성
사람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가 없다. “영혼”이라는 것은 불멸하나 창조된 본질로서 사람의 구성 요소 중 더 고상한 부분이다. 이를 “영”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이라는 단어가 홀로 쓰일 때에는 “영혼”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12:7).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영을 성부께 맡기셨고(눅23:46), 또한 스데반은 그리스도께 맡겼는데(행7:59), 이는 단지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될 때에는 하나님이 그 영원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의미일 뿐이다.
자기 자신의 불멸에 대한 지각이 사람에게 완전히 사라져 버릴 정도로 빛이 완전히 꺼져 있는 것은 아니다. 선과 악을 분간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응답하는 양심이야말로 불멸하는 영혼에 대한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형벌은 오직 영혼에게만 주어지며 따라서 육체는 영혼이 당하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여기서 영혼이 실체가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으로도 세상을 초월하는 영혼이 불멸하다는 것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결국 없어지고 말 어떤 기운 정도로는 절대로 생명의 근원에까지 꿰뚫고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정신에게 부여된 그 많은 고귀한 재능들이 인간의 정신에 무언가 신적인 것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 모든 재능들이야말로 불멸하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증언들인 것이다. 천지와 자연의 비밀들을 탐구하며 그 이해력과 기억력으로 온 시대를 조감하고, 모든 사물을 각기 적절한 순서대로 정리하고, 과거에 근거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인간 정신의 그 영민함은 사람에게 무언가 육체와 분리된 것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지성으로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천사들을 생각하는데, 이런 일은 육체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지성의 좌소가 바로 영혼인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영혼이 육체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무언가 실체를 지닌 것이 아니라면, 성경은 우리가 흙집에 거하며(욥4:19) 죽을 때에 육체의 장막을 떠나고 썩을 것을 벗어버리고서(고후5:4,벧후1:13-14) 육체에 있을 때에 우리 각자가 행한 바대로 마지막 날에 상급을 받게 될 것(고후5:10)이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구절들을 비롯하여 여러 비슷한 구절들은 영혼을 육체와 분명히 구별지을 뿐 아니라 영혼을 가리켜 “사람”이라고 부름으로써 영혼이 사람의 주된 부분임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고후7:1),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벧전2:25), “영혼의 구원”(벧전1:9),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벧전2:11)의 표현들은 영혼이 없다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영혼이 형벌 받는 일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서 죄책이 있을 수도 없다. 그리스도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눅12:5)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영의 아버지”(히12:9)라고 하는데 영혼의 실체를 이 이상 더 명확하게 증거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영혼이 죽은 후에 살아 있지 못하다면, 나사로의 영혼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복락을 누리고 또한 부자의 영혼이 무시무시한 고통 속에 있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어리석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눅16:22-23). 천사도 영도 없다고 믿은 것이 사두개인들의 오류 가운데 하나이다(행23:8).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해석자들 사이에서 “형상”과 “모양”에 대해서 적지 않은 논란이 있다. 그들은 두 단어가 사실 서로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있지도 않은 차이를 찾느라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히브리인들에게는 한 가지 사실을 두 번씩 반복하여 표현하는 예가 매우 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 자체를 보아도 거기에 전혀 모호한 점이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라 부르는 것일 뿐 다른 뜻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용어들에 대해서 좀 더 교묘하게 철학적인 논리를 늘어놓는 자들이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들은 첼렘, 즉 형상을 영혼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데무트, 즉 모양을 그 본질의 성질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아니면 좀 더 색다른 해석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기로 작정하셨는데, 그것이 다소 설명이 희미하기 때문에, 좀 더 분명한 설명을 위하여 “그의 모양대로”라는 표현을 반복하신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양을 닮은 표지들을 새겨 놓으셔서 하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 자신을 잘 반영해 줄 그런 사람을 지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도 바로 뒤에서 동일한 사실을 다시 반복하여 기술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두 번 반복하면서도 “모양”이라는 단어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창1:27).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사람의 일부분- 말하자면, 영혼과 그 모든 기능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흙에서 취하여졌을 때에 그 흙에서 그 이름을 받은 아담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하지만, 이는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사람 전체를 가리켜 죽을 인생이라고 부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은 죽음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을 가리켜 “이성적 동물”이라 부른다 해도, 사람의 이성이나 지성이 육체에만 속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물론 영혼이 사람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사람의 영혼을 염두에 두고서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 부른다 해도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본성을 모든 생물보다 뛰어나게 만드는 그의 탁월함 전체에까지 확대된다는 원리를 그대로 고수한다. 그러므로 아담이 올바른 이해를 충만히 소유했고, 그의 감성을 이성의 경계 내에 유지하였고, 그의 모든 감각들을 올바른 질서대로 통제하고 있었고, 자신의 탁월함을 진실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특별하신 은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을 당시에 아담에게 부여되어 있던 순전함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의 주된 좌소는 물론 아담의 정신과 마음, 혹은 영혼과 그 기능들에 있었지만, 사람의 모든 부분 가운데- 심지어 육체조차도- 그 형상이 어느 정도라도 미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은, 사람이 다른 모든 피조물들보다 뛰어나며 그가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종의 말없는 선언인 셈이다.
한편, 천사들이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도 부인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시듯이, 우리가 취하게 될 최고의 완전함이 바로 천사들과 같이 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마22:30).
하나님의 형상의 참된 본질
아담이 그의 원 상태에서 타락하였을 때에,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소멸되었거나 파괴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형상이 너무나도 부패하여져서 남아 있는 것도 모두 끔찍한 기형이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 그 회복에서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참되고 완전한 순전함으로 회복시켜 주시며, 그 때문에 둘째 아담이라 불려지시는 것이다.
바울은 신자들이 그리스도께로부터 받는 “살려 주는 영”과 아담이 창조함을 받아 지니게 된 “생령”을 대조하면서(고전15:45) 중생에 더 풍성한 분량의 은혜가 있음을 찬양하면서도, 다른 중요한 사실, 즉 중생의 목적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는 데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10).
새롭게 하는 역사는 첫째 지식을 언급하고, 둘째 참된 의와 거룩함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정신의 빛에서, 마음의 의로움에서, 그리고 모든 부분들의 건전함에서 드러난다고 추리할 수 있다. 창조 시에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하는 데에도 주가 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3:1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극히 완전하신 형상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도록 새롭게 될 때에, 지식과 순전함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인 영원한 생명과 관계가 있는 모든 것을 다 포괄한다. 요한은 태초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 안에 있었던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사람이 특별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다른 생물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나게 되었고, 지성의 빛과 결합된 특별한 생명을 얻었으므로 무수한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결국 이 말씀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타락하기 이전 아담에게서 드러난 인간 본성의 완전한 탁월함이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한 이후 그 형상이 더럽혀졌고 거의 제거되다시피 하여, 혼란스럽고 불구가 되었고, 오염된 것밖에는 남은 것이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택한 자들에게서 지금 그 형상의 일부가 드러나지만, 그 완전한 광채는 장차 하늘에서 비로소 빛나게 될 것이다.
이 형상이 어떤 부분들로 되어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영혼의 기능들을 논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영혼의 내적인 선함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바울이 형상의 회복을 논할 때, 신적인 본질의 유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은혜와 권능을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과 화합하도록 만들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9).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동일 본질로 만들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이다.
영혼과 그 기능들
“영혼”에 대한 정의를 철학자들에게서 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철학자들 중에서는 플라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도 영혼의 불멸하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영혼 속에 신의 형상이 있다고 생각했다.
성경은 영혼이 형체가 없는 실체임을 말한다. 이제는 거기에다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하겠다.
곧, 영혼이 공간적인 제한은 받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집에 거하듯 육체 속에 거하면서, 육체의 각 부분들에 활기를 불어넣고 그 기관들을 강건하게 하여 적절히 활동하게 하는 것은 물론, 사람의 삶을 다스리는 데에서 첫째가는 위치를 차지하되, 일상적인 삶의 의무들을 감당하는 면에서도 그렇고 동시에 사람을 각성케 하여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는 데에서도 그렇다는 사실이다. 바로 거기에 종교의 씨앗이 들어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늘의 생명을 묵상하도록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듯이, 그 하늘의 생명에 대한 지식이 그의 영혼에 새겨져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연합되는 데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행복을 모른다면, 사람은 사실상 자신의 지성의 가장 주된 용도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혼의 가장 주된 활동은 바로 하늘의 생명을 사모하는 데 있다.
철학자들은 영혼에는 세 가지 인식 기능이 있다고 한다. 상상, 이성, 오성이 그것이다. 상상은 감각 기관 속에 전달된 대상물들을 서로 분별하는 것이다. 이성은 보편적인 판단력이다. 오성은 이성이 산만하게 이리저리 생각한 것을 집중적으로 고요하게 관조하며 바라보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세 가지 욕구 기능과 서로 상응한다. 오성과 이성이 제시하는 것을 향하여 나아가는 기능인 의지가 있고, 이성과 상상이 제시하는 바를 사로잡는 분노가 있고, 상상과 감각 기관이 제시하는 바를 붙잡는 정욕이 있다고 한다.
영혼의 두 가지 기능
이런 식의 가르침에 대해서 다소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철학자들은 인간의 타락에 대한 형벌에서 비롯된 본성의 부패에 대해서 무지하여 서로 상이한 인간의 두 가지 상태를 잘못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인간의 영혼이 오성(지성)과 의지라는 두 가지 기능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붙잡도록 하자. 이것이 현재 우리의 목적과도 부합되는 것이다. 오성(지성)이 하는 일은 인정할 만한 것과 인정하지 못할 것으로 사물을 구별하는 데 있으며, 의지가 하는 일은 오성이 선하다고 인정한 것을 택하고 따르며 또한 오성이 인정하지 않는 것을 거부하고 그것을 피하는 것에 있다고 보기로 하자.
우리로서는 그저 오성이, 말하자면 영혼의 지도자요 지배자이며, 의지는 언제나 오성의 명령을 받으며 또한 그 나름대로 욕망을 갖고 오성의 판단을 기다린다는 정도의 논의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자유 선택권과 아담의 책임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에 지성을 주셔서 그것으로 선과 악을,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하셨고, 또한 이성의 빛을 안내자로 주셔서 우리가 피해야 할 것과 좇아야 할 것을 구별하게 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여기에 의지를 결합시키셔서 선택을 좌우하게 하셨다. 최초의 상태에서는 사람에게서 이 탁월한 기능들이 뛰어나게 능력을 발휘하였고, 그리하여 그의 이성, 지성, 분별, 판단 등이 이 땅의 삶의 방향을 위해 충족했음은 물론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영원한 복락에까지 올라가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선택이 덧붙여져서, 욕구를 제어하고 모든 기관의 활동을 통제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의지가 이성의 지도를 전적으로 따르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순전한 상태에서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자유 의지로써 영생에 도달할 능력이 있었다. 아담은 자기가 원하면 얼마든지 설 수가 있었는데,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로 타락한 것이다. 그가 그렇게 쉽게 타락한 것은 그의 의지가 이쪽 저쪽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었고 또한 끝까지 변치 않고 인내하는 능력이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악을 선택하는 일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였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과 의지가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또한 모든 기관들이 복종할 수 있도록 올바로 정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파괴시키고 자신의 이러한 축복들을 부패시켜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자들은 크나큰 혼란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폐허밖에 남아 있지 않는 곳에서 제대로 서 있는 건물을 찾았고,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파편들 속에서 잘 엮어져 있는 구조물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서 그렇게 무지하니, 철학자들이 하늘과 땅을 뒤섞어 놓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한 입으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 칭하면서 철학자들의 견해들과 하늘의 교리 사이에서 타협을 시도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며, 결국 하늘도 땅도 접할 수가 없다. 그들은 사람이 잃어버린 바 되어 영적 멸망 상태 속에 빠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에게서 자유 선택권을 찾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만 마음에 새기면 좋겠다. 곧, 처음 창조 때의 사람의 상태는 그 이후의 후손 전체와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의 후손들은 그에게서 부패한 상태를 이어받았고, 그로부터 유전적인 오염을 물려받은 것이다. 처음에는 영혼의 각 부분이 의를 형성하고 있었고, 아담의 정신이 견고하게 서 있었으며, 그의 의지가 선을 택할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전혀 죄를 지을 수도 없고 또한 죄를 짓기를 바라지도 않을 그런 상태로 만드셨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과 쟁론한다는 것은 지극히 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에 따라서 그가 택하셔서 그렇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너무도 많은 것을 받았는데도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었으니, 그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221-237
'칼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 칼빈, 기독교 강요, 1권17장,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의무 (0) | 2014.11.02 |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1권16장,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계를 양육하시고, 유지하시고, 다스리신다. (0) | 2014.10.23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1권14장, 우주와 만물의 창조, 천사와 마귀 (0) | 2014.09.26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1권13장(4), 삼위 하나님의 구별성과 일체성 (0) | 2014.09.12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1권13장(3), 삼위일체, 성령의 영원한 신성 (0) | 2014.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