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존 칼빈, 기독교 강요, 1권17장,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의무

강대식 2014. 11. 2. 14:04

17장 섭리 교리의 올바른 적용

 

하나님의 섭리의 은밀한 역사하심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모든 일을 정하시는지에 대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간단히 논하고자 한다. 세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에 관한 것임은 물론 미래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일을 결정짓는 원리로서, 때로는 매개체를 통해서 역사하고, 때로는 매개체가 없이 역사하고, 때로는 모든 매개체에 반하여 역사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온 인류를 향하신 그의 보살피심을, 그러나 특히 그가 더 면밀히 주시하시는 그의 교회를 다스리면서 기울이시는 그의 경성하심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역사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추가해야 할 것이 있다. , 하나님의 아버지다우신 자비하심과 사랑 혹은 엄격한 정의가 섭리의 전 과정에서 밝히 빛을 발하지만, 때때로 사건들의 원인들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사가 운명의 맹목적인 충동에 의해서 이리저리 휘몰린다는 식의 생각이 슬그머니 끼어들며, 마치 공을 이리저리 던지듯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데리고 장난하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육신적인 반발심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요한 마음을 지니고 평정을 유지하여 배울 준비를 갖추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의 계획에 대해서 최상의 목적을- 그의 백성들에게 인내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든, 그들의 악한 생각을 교정시키시고 그들의 정욕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든, 혹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든, 게으름에서 그들을 일깨우시기 위한 것이든, 혹은 교만한 자를 낮추고 불경스러운 자들의 간계를 깨뜨리고, 그들의 책략을 뒤집어엎기 위한 것이든 간에- 갖고 계시다는 것이 밝히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비참한 중에 처할 때마다 언제나 우리의 죄악들이 마음에 떠올라야 하며, 그런 처지를 징벌로 여겨서 회개가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은밀하신 계획이 단순히 각자에게 정당한 징벌을 베푸시는 것보다 더 폭이 넓은 정의를 위한 것임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사람에 대해서 주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3)고 말씀하신다. 이 사건에서 성부 하나님의 영광이 밝히 드러나는 것을 깨달아야 마땅할 것이라고 증거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스럽게 삼가는 자세를 기림으로써, 이런저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해명을 들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밀하신 판단들을 높이 바라보고 그의 뜻을 모든 일의 참된 정당한 원인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세상의 온갖 소요로 인해서 우리가 판단을 잃어버린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공의와 지혜의 순결한 빛으로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를 통제하시고 주관하셔서 올바른 목적을 향하여 질서있게 나아가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은 감히 함부로 하나님께 따지러 들고, 그의 은밀하신 계획을 조사하려 하고, 죽을 인생의 행실에 대해서는 물론 미지의 문제들에까지도 경솔하게 판단을 내리려 하고 있으나, 이는 정말로 어리석은 짓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우리의 자세

 

자기가 대하고 있는 분이 바로 자기의 창조주시요, 우주의 조성자시라는 것을 명심하여 겸손히 자기를 낮추어 두려움과 경외의 자세를 갖게 되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결코 하나님의 섭리를 올바로 가늠하고 거기에서 유익을 얻을 수가 없는 법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렇게도 많은 개들이 그 표독스러운 이빨로 이 교리를 물어뜯거나 혹은 격렬하게 짖어대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측량할 길 없는 계획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로서는 대체 성경이 무슨 목적으로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36:6)라고 말씀하는지를 답변해야 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이 율법에 친숙하게 제시되어 있으므로 구태여 멀리 구름 위에서나 바다 속 깊은 곳에까지 가서 찾을 필요가 없다고 선포하고 있다(30:11-14).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바다 속 깊은 곳에 비견될 만한 그런 또 다른 감추어진 뜻이 있다는 뜻이 된다. 바울도 말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11:33-34).

 

그러므로 우리의 감각을 무한히 초월하는 그런 신비들이 율법과 복음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마음을 총명의 영”(11:2,20:3)으로 조명하사, 그의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기로 작정하신 그 신비들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에, 이제는 바다 속 깊은 곳과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우리가 안전하게 걸어야 마땅할 길과 우리의 발을 인도하는 등불(119:105)과 생명의 빛(1:4,8:12), 또한 확실하고 분명한 진리의 학교가 있을 따름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 우주의 운행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은 바다 속 깊은 곳이라 불러 마땅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으므로, 우리로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높이 우러러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 두 가지 사상을 몇 마디 말로 멋지게 표현한 바 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29:29). 여기서 모세는 율법을 부지런히 묵상하기를 배울 것을 명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은밀하신 섭리를 경이감으로 높이 우러러 볼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들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26:14). 하나님께 거하는 지혜와 사람들을 위하여 제시하신 지혜의 부분을 구별짓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비밀들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지혜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며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다”(28:21)고 말한다. 그러나 잠시 후에 하나님의 지혜가 사람에게 발설되었으므로 사람이 찾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28:28).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한다. “하나님께서 가능한 최상의 질서 가운데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로지 율법에 따라서 선한 뜻을 갖고 행동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다른 일들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법에 따라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섭리야말로 불변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다스리실 권리를 친히 쥐고 계시므로, 우리는 삼가고 조심하여 그의 최고의 권위에 복종하여야 하며, 그리하여 그의 뜻이 유일한 의의 규범이요 모든 일의 참되고 정의로운 원인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의무

 

솔로몬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도모와 쉽게 조화시켜 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전혀 미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배제하고 이런저런 일들을 감행하는 자들의 우매함에대해서 비웃기도 하고, 또한 다른 곳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16:9)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곧 우리가 우리 스스로 계획하고, 모든 일들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의 뜻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삶의 한계를 정해 놓으신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그 삶을 우리에게 맡겨서 행하게 하셨고, 그가 그 삶을 보존하도록 수단과 도움을 베푸셨으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위험을 미리 예견할 수 있도록 만드셔서 모르는 사이에 위험을 당하지 않도록 하셨고, 또한 예방법과 대비책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매우 분명해진다. 주께서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겨주셨다면, 그것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그가 도우심을 베푸시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위험을 우리에게 미리 경계해 주시면 무모하게 위험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유용한 치유책을 주시면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 것이다.

 

그러나 속된 사람들은 미래와 관계되는 모든 계획들을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라 하여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어떠한 계획을 세우더라도 그것과는 관계 없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그 일을 행한 당사자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린다. 살인자가 한 선량한 시민을 죽이는 사건에 대해서도 그들을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라고 한다. 무슨 짓을 하든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의 시행자라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뜻에 복종한다는 것을 구실로 모든 범죄를 덕으로 간주하여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주께서는 위험이 운명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더러 경계하라고 명령하신다. 주께서 사람들에게 지혜를 발휘하고 경계하는 능력을 불어넣으셨고, 그런 능력으로 생명 그 자체를 보존하고자 하시는 그의 섭리를 따르도록 하셨다. 반대로, 그것을 무시하고 게으름을 피우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정해 놓으신 재난을 그들 스스로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조심성 있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삼가며 위협적인 악들에 연루되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분별없이 무모한 짓을 자행하여 망하고 만다. 그러니, 이 두 경우에서 조심성 있는 자세와 분별없는 자세가 각기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도구들이 아니라면, 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겠는가?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벌거벗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사용되는 수단들로 옷을 입힌 상태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사람의 악한 행동들

 

사람들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경솔하고도 무분별하게 무조건 하나님의 섭리의 탓으로만 돌린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에, 도둑질이나 간음이나 살인 같은 것도 하나님의 뜻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도둑은 그저 주께서 궁핍함으로 벌하고자 하신 사람을 약탈한 것뿐인데 왜 그 사람이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생명을 거두어가고자 하신 것이 주님이신데 어째서 그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벌을 받아야 하는가.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섬긴 것뿐인데 어째서 그들이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자기의 악한 성향에 이끌려서, 그저 자기 자신의 악한 욕망에만 복종하여 그런 짓들을 저지른 사람을,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의 뜻을 섬겼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배운 사람은 모름지기, 그 동일한 뜻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은 바 자신의 목표를 향하여 힘써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을 순종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뜻을 배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리저리 처신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해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새겨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그가 명령하시는 것만을 우리게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의 명령을 거스르는 어떤 일을 계획한다면,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완악함이요 범죄인 것이다. 악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작정하심을 섬기는 것이다.

 

나는 도둑들과 살인자들을 비롯하여 악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들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심판들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이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악행이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그 동일한 불의에 가담하셨다고 말하겠는가? 하나님의 공의를 빌미로 그들 자신의 부패한 행위를 가리겠는가? 그 어느 쪽도 불가능하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으로 인하여, 도저히 자기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 자신에게서는 악한 것밖에는 발견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그들의 악한 의도를 정당하게 사용하신 것밖에 없으므로, 하나님께 무슨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선한 것이다. 그들을 통하여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묻고 싶다. 썩어 있는 시체가 태양 빛 아래 그대로 놓여져 있을 경우, 그 시체의 악취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태양 광선 때문에 악취가 생겨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광선이 악취를 풍긴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악의 문제와 그것에 대한 죄책은 분명 악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악인의 행동을 사용하신다고 해서, 그가 부정한 일을 행하셨다고 생각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런 개 같은 뻔뻔스러움은 사라져야 마땅하다. 그런 뻔뻔스러움으로 아무리 멀리서 하나님의 공의를 대적하여 짖더라도, 결코 하나님의 공의를 어쩌지는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묵상으로 얻는 유익

 

이런 비방들이나 미친 헛소리들은 섭리에 대한 경건하고 거룩한 묵상을 통해서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경건의 원리가 그런 묵상을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이요, 또한 그런 묵상을 통해서 가장 좋고 아름다운 열매를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일어나며, 어떠한 일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납득하고 있으므로, 언제나 하나님을 모든 일의 첫째가는 원인으로 바라보게 되며, 그러면서도 동시에 부차적인 원인들에 대해서도 그 적절한 위치를 지켜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선인이든 악인이든 사람에 관한 한, 그들의 계획과 뜻과 수고와 능력들이 모두 하나님의 손 아래 있으며, 또한 그것들이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어서,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그것들을 기울게도 하시고, 그가 원하시는 대로 그것들을 억제하기도 하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신자들의 복지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분명한 약속들이 성경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55:22).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91:1).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2:8). “나는 너의 방패요”(15:1). “보라, 내가 오늘 너를 ---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1:18,15:20).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 할 것임이라”(49:2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49:15). 과연, 성경 역사의 가장 주된 목적은 주께서 성도들의 길을 부지런히 보살피셔서 그들이 돌에 걸려 넘어지는 일조차도 없도록 하신다는 것을(91:12)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작은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선언하시면서(10:29), 곧바로 이어서, 우리는 참새들보다 훨씬 더 귀하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면밀한 보살피심으로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치시며(10:31), 또한 이를 더 확대시키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는 것을 신뢰하도록 하시는 것이다(10:30).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떨어질 수가 없다면, 그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또한 하나님께서 교회를 택하사 그의 거처가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는 데에서 자신의 아버지다우신 보살피심을 특별히 드러내신다는 것은 의심 없는 사실인 것이다.

 

순경 중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종은 이런 약속들과 또한 실례들을 통해서 강건해져서, 그 권세에 마음으로 굴복하든 아니면 그 악의가 억제를 받아서 해를 끼치지 못하게 되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음을 가르치는 여러 증거들에 합세하여 자기 스스로도 증거를 내어놓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들의 사악함을 분쇄하는 모든 방법들을 다 아는 분이시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분별력을 빼앗으셔서 건전하고 진정한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하신다. 아합 왕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합을 속이기 위하여 사탄을 보내셔서 모든 선지자들의 입을 거짓으로 가득 채우게 하셨다(왕상22:22). 하나님께서는 르호보암으로 하여금 젊은 신하들의 간언에 홀리게 하셨고, 결국 그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왕국을 망치게 하셨다(왕상12:10,15).

 

그리고 때로는 그들에게 분별을 허락하셔서, 그들이 두려움에 질려서 본래 마음에 품었던 소원이나 계획을 시행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하신다. 아히도벨의 모략이 다윗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칠 뻔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때가 오기 전에 미리 그것을 깨뜨려 버리신 것이다(삼하17:7,14).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유익과 안전을 위하여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시며, 그리하여 심지어 마귀조차도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명령이 없이는 감히 욥을 겨냥하여 아무 일도 행할 수가 없었던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1:12).

 

이러한 지식을 갖게 되면, 그 다음에 반드시 바람직한 결과들에 대한 마음의 감사와, 역경 중의 인내와, 또한 미래에 대한 염려로부터의 놀라운 해방이 뒤따라오게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모든 일이 마음에 바라는 대로 잘 이루어질 때에, 사람의 도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느꼈든, 생명이 없는 피조물들에게서 도움을 받았든, 그 모든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덕분으로 돌리게 된다. ‘그들의 마음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그들을 내게로 엮어 주사,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내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 모두 하나님이시로구나라고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풍성한 열매들을 누리면서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늘에 응답하셔서 하늘로 다시 땅에 응답하게 하시고, 또한 그 땅이 다시 그 소산물에게 응답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시로다”(2:21-22). 그는 다른 일들에 있어서도, 모든 일이 번창한다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축복으로 되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감사하게 된다.

 

역경 중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섭리

 

어려움이 닥친다 할지라도, 그는 곧바로 마음을 높이 들어 하나님께로 향할 것이며, 하나님의 손길에서 인내와 마음의 평안을 풍성하게 얻게 될 것이다. 요셉이 형들의 배신을 계속해서 마음에 두었더라면, 절대로 그들을 향하여 형제다운 애정을 보여 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들을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욥의 경우도 만일 갈대아 사람들의 잔악한 행위를 계속 마음에 두었더라면 즉시 보복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시 그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인정하였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다윗의 경우도 시므이에게서 협박과 모욕을 당하였을 때에 그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더라면, 곧바로 부하들을 시켜 보복하였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16:11).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39:9).

 

끓어오르는 분노와 조급한 마음을 치료하는 것으로 과연 이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기를 배운 사람은 분명 굉장한 유익을 얻을 것이고, 언제나 마음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 그렇게 뜻하셨으니 반드시 견뎌야 마땅하다. 비단 그것을 대적하여 싸울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주께서는 정의로우며 유익한 일 이외에는 어떠한 일도 뜻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혹시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상처를 당할 때에라도, 그들의 악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하면 우리의 고통만 더 악화되고 우리의 마음에 복수할 생각만 날카롭게 일어날 뿐이니-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경륜에 따라 허락된 일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기를 배우기를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상처를 받은 것에 대해 보복할 마음을 갖지 않도록 절제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6:12) 우리의 영적 원수 마귀에 대한 것임을(6:11) 지혜롭게 지적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싸움을 잘 대비하게 해 주고 있다. 그러나 분노를 일으킬 모든 충동을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교훈은, 바로 하나님께서 마귀와 모든 악인들을 무장시켜 싸우게 하시며, 친히 그 싸움의 재판장으로 앉아 계셔서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신다는 것이다. “나는 빛도 짖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45:7).

 

부차적인 원인들도 무시하지 않음

 

경건한 사람은 부차적인 원인들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유익을 베풀어준 사람들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섬기는 자들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이 베푼 인간적인 친절에 대해서 무시하지 않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들에게 신세를 졌다고 느끼며, 자신이 무언가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고백하며, 기회가 닿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려 할 것이다.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 주님을 근원으로 여겨 그에게 찬양과 공경을 돌리며, 동시에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들로서 존귀하게 여길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뜻을 가지셔서 그들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혹시 부주의나 태만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게 될 경우라도, 이 경건한 사람은 그런 일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일어났다고 결론을 내리면서도, 동시에 그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것이다.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 경우는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그런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일이나 그들의 조언을 청하는 일을 꺼리지 않을 것이고, 또한 무엇이든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이 있으면 그것은 모두 주께서 베푸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것들을 하나님의 섭리의 정당한 도구들로서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또한 자신이 지금 취하고 있는 조치들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물론 하나님께서 그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들을 베푸신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에게 최상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저런 조치들을 취할 때에, 자기 자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지혜에 맡겨서 올바른 목표로 나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후원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온통 기대고 확신 가운데서 안심하거나, 혹은 그런 것이 없을 때에는 그로 인하여 불안해하고 떨 정도로 그런 것을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만 생각을 고정시킬 것이고, 그리하여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이런저런 궁리로 그 섭리에 대한 확고한 의지에서 벗어나지를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요압은 전쟁의 결과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의무를 부지런히 수행했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삼하10:12)

 

바로 이러한 지식이야말로 우리를 움직여 교만과 지나친 자신감을 제거해 버리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그를 의지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 속에 선한 소망을 든든하게 갖게 하실 것이고, 우리는 확신과 용기를 갖고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모든 위험 요소들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적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주는 위로와 평안

 

하나님의 섭리의 빛이 일단 경건한 사람에게 비치게 되면, 그는 그 이전에 그를 짓눌러오던 극심한 불안과 두려움에서는 물론 모든 염려에서 벗어나게 된다. 경건한 자에게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모든 일을 그의 권세로 붙잡고 계시고, 그의 권위와 뜻으로 다스리시며, 그의 지혜로 주관하시므로 그의 결정이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위로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하심 속에 있고 또한 천사들의 보살피심에 맡겨져 있으므로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지 아니하시면 물도 불도 칼도 그를 해칠 수가 없다는 것을 아는 데에서 큰 위로를 얻는다.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91:3-6).

 

또한 이로부터 성도의 기쁨에 벅찬 확신이 생겨나는 것이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118:6). “내가 ---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56:4).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56:4).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27: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질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으리라”(23: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71:4).

 

그들은 이처럼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세상은 목적 없이 이리저리 뒹구는 것 같지만 주께서 어디서나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또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그들의 안전을 위한 것임을 신뢰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귀와 모든 졸개들이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붙잡혀 있으므로, 하나님의 허락이나 명령이 없이는 절대로 그들을 대적할 계획도 꾸밀 수가 없고, 그런 계획을 꾸미고 나서도 절대로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확신에 힘입어서, 한 구절에서는 자신의 여행 계획이 사탄에게 방해를 받았음을 말하고(살전2:18), 그러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그 여행을 실행에 옮길 것을 말하고 있다(고전16:7). 그는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허락 여부에 그의 모든 여행이 달려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동시에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사탄이 아무것도 일을 꾸밀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면, 하나님의 섭리에 무지한 것이 가장 큰 비참함이요, 또한 최고의 행복은 바로 그 섭리를 아는 데 있다는 것을 여러분 스스로 지각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후회하심”?

 

하나님의 후회하심에 대해서는 우선, 하나님께 무지나 오류나 무능력을 돌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후회하심이 있다고 보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점을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당연히 하나님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무지하시거나, 아니면 그 일을 피하실 수가 없으시거나, 아니면 성급하고 경솔하게 결정을 내리셔서 곧바로 후회하게 되시는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후회하심을 말씀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라”(삼상15:29)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는 말씀의 경우는 마음을 바꾸셨다는 것을 비유적인 의미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후회하심이란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화법임

 

우리가 연약하여 하나님의 그 높으신 상태에까지 도저히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묘사할 때에는 우리의 역량에 맞추어 묘사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본연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에게 비쳐지는 모습대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의 동요가 일체 없으신 분이신데도, 그는 자신이 죄인들을 향하여 화를 발하신다고 증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회하심이란 말을 행동의 변화 이외에 다른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후회란 단어를 하나님께 적용시킬 때에는 단순히 그의 절차가 바뀐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의 계획이나 그의 뜻은 번복되지 않으며, 그의 의지도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사람의 눈에 갑자기 변화가 생긴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미리 보시고, 승인하시고 작정하셨던 바를 전혀 변함 없이 일관성 있게 이루어나가시는 것이다.

 

의심쩍은 구절들에 대한 해명

 

성경의 역사는 니느웨 성에 멸망을 선포했었다가 다시 돌이킨 것으로(3:10), 또한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알렸다가 다시 생명이 연장된 것으로 보도하고 있지만(38:5), 그것이 하나님의 작정이 폐기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작정이 폐기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멸망과 죽음을 선포한 사실 때문에 그렇게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멸망과 죽음을 미리 경계하셔서 그것이 멀리서 오고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신 것 이외에 무언가 다른 목적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사실, 주님은 그들이 멸망하거나 죽기를 원치 않으셨다.

 

주께서 일단 무엇을 고지하시고 난 이후에 그것을 철회하셨다고 해서 그의 본래의 목적이 폐기되었다는 식으로 추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주께서는 자신이 남겨두기를 바라시는 자들에게 미리 형벌을 경고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만드시는데, 이것은 그의 뜻이나 그의 말씀이 조금이라도 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영원하신 작정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과연 진리로 남아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14:27).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라스챤다이제스트), 255-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