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장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세계를 그의 권능으로
양육하시고 유지하시며, 그의 섭리로 그 모든 부분을 다스리심
창조와 섭리의 밀접한 연관성
하나님을 단번에 그의 모든 일을 다 이루신 순간적인 창조주로 만들어 버린다면, 그것은 참 냉랭하고 메마른 사고일 것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11:3). 이 창조가 섭리에로 이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창조주시다”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는 것이 아닐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발견한 다음에는 곧바로 그가 또한 영원하신 통치자시요 보존자시라고 결론을 내린다. 천체의 틀과 그 각 부분들을 보편적인 운동을 통해서 운행하실 뿐 아니라, 심지어 작은 참새 한 마리에 이르기까지 그가 지으신 모든 것들을 지탱시키시고, 양육하시고 보살피시는 분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33:6)라고 창조를 말한 다음, 이어서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시33:13)라고 섭리의 과정에로 내려가고 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104:27-30). 바울도
우리가 하나님을 힘입어 기동하며 산다고 하였다(행17:28).
운명이나 우연은 없음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섭리가 운명과 우연히 발생하는 일들과는 정반대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일이 우연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은 시대마다 항상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온 신념이었고,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견해를 갖고 있다. 육적인 생각으로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간에 이 모든 일들을 운명의 탓으로 돌릴 것이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10:30)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은 자라면 누구나 더 멀리 벗어나서 어떤 원인을 찾을 것이고, 그리하여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은밀하신 계획에 따라 되어진다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생명이 없는 물체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물론 각기 본성적으로 자신의 특성을 부여받았지만 언제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그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만물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끊임없이 활동하며 주의 깊고 효력있고 능동적인 그런 전능이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움직임들을 주관하시는 그런 전능하심이다. 시편은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115:3)라고 말씀하는데, 이는 분명하고도 계획적인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역경에 처할 때에 신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손길 아래 있으므로 하나님의 명령과 허락이 없이는 자기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큰 위로를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올바로 찬양하는 자들은 두 가지 유일을 얻게 된다. 첫째로, 천지를 소유하시며 또한 모든 피조물들이 그 명령에 스스로 완전히 복종하는 그 하나님께 선을 행하시기에 충족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며, 둘째로,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서 안전하게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방 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렘10:2)고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의 본질
섭리란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한가하게 구경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열쇠를 쥐고 계신 분으로서 모든 사건들을 지배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섭리란 하나님의 눈 못지 않게 그의 손길에도 관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는 아브라함의 말은 하나님께서 미래의 일을 미리 알고 계신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언제나 혼란스럽고 의아스러운 일들을 해결해 주는 하나님의 뜻의 보살피심에 아브라함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 문제를 맡긴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또한 “우리가 그를 힘입어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17:28)는 바울의 가르침과 또한 히브리서 기자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하려는 의도로 기술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1:3)라는 진술 등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개개의 사건들을 주장하시며, 따라서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에서 비롯되므로 어떠한 일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하나님의 섭리(특별 섭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율법서와 선지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이슬과 비로 땅을 적실 때마다 자신의 자비하심을 증거하신다고 자주 선언하시며(레26:3-4,신11:13-14,28:12,), 반면에 그의 명령에 따라 하늘이 철과 같이 굳어지며(레26:19), 곡식이 병충해로 해를 입으며(신28:22), 우박과 폭풍우로 밭이 해를 당할 때마다(사28:2,학2:17)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분명하고도 특별하신 보응의 표증들임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이 없이는 단 한 방울의 비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사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우는 까마귀 새끼에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시147:9)라고 하며 하나님의 일반 섭리를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특정한 몇몇 행위에만 국한시킨다는 것은 유치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뜻이 아니고서는 아무리 작고 미미한 참새 한 마리조차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마10:29). 새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일이 하나님의 명확한 계획에 따라 지배를 받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선지자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높은 곳에 거하시면서도 자기를 낮추사 천지에 일어나는 일을 모두 살피신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시113:5-6).
인간사에 관계하는 하나님의 섭리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10:23).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지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20:24). 이는 권능만이 아니라 선택권과 결정권까지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16:1). 말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인데, 감히 하나님이 없이 스스로 행동을 취하려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우매함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75:6-7). 어떤 자들이 높아지고 다른 자들이 낮은 처지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밀하신 계획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자연의 현상들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나는 구체적인 개개의 사건들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의 성격을 전반적으로 증거해 준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남풍이 불게 하셔서 그 백성들에게 풍성한 새들을 보내 주셨다(출16:13,민11:31). 또한 요나를 바다에 빠지게 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강한 풍랑을 일으키셨다(욘1:4).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결정에 의하여 구름과 바람을 일으키시고 그 속에서 자신의 권능의 임재를 특별히 보여 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셨나이다”(시104:3-4)라는 말씀은 사실이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생식력이 본성적으로 부여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들에게는 자손이 없게 하시고 어떤 이들에게는 자손을 많이 주셔서, 그것이 자신의 특별한 은총의 표시임을 드러내신다.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127:3).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창30:2).
우리가 떡을 먹음으로써 양육받는다는 것보다 일상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땅의 소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임은 물론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신8:3,마4:4)을 말씀하고 있다. 사람을 양육시키는 것이 풍성한 떡 그 자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밀하신 축복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을 제하여 버리겠다고도 말씀하신다(사3:1). 사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드리는 진지한 기도(마6:11)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다우신 손길로 우리에게 양식을 베풀어주신다는 의미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34:15)라는 말씀을 듣고, 또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들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시34:16)라는 말씀을 듣는데, 여기서 우리는 천상천하의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그들을 사용하시도록 그에게 복종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 섭리가 피조물들 가운데 왕성하게 역사하여, 자연의 질서를 지속시킬 뿐만 아니라, 그의 놀라운 계획에 의하여 확실한 목적을 이루도록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섭리의 교리는 스토아 철학의 운명론과 전연 다름
하나님의 섭리의 교리를 혐오하는 자들은 이것이 스토아 철학자들의 운명론이라고 악의에 찬 비방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한때 이런 비방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는 “운명”(fate)이란 단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울이 피하라고 가르치는 망령되고 허탄한 단어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딤전6:20), 의도가 하나님의 진리를 억압하려 하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연에 나타나 있는 끊임없는 연관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인과 관계의 필연성을 상정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물의 통치자요 주관자이심을 믿는다. 하나님이야말로 그의 지혜로 머나먼 영원 전부터 그가 행하실 바를 작정하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그 작정하신 바를 시행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이를 근거로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생명이 없는 피조물들은 물론 사람들의 계획과 의도들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의 다스림을 받아 그 정해진 목적을 곧바로 이루게 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연에 의해서나 운명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이 전혀 없다는 뜻인가?고 그들은 물을 것이다. 대 바실리우스는 말하기를, “운명”이나 “우연”이란 이교도들이 쓰는 용어로서 경건한 사람들이 마음에 그 뜻을 새겨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모든 성공이 다 하나님의 축복이고, 모든 재난과 역경이 하나님의 징벌이라면, 인간사에 운명이나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조금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도 우리는 감동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아카데미 학파에 대한 반론」에서 내가 ‘fortuna’(운명)란 단어를 너무 자주 거론했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다만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일어나는 일들에서 겉으로 보기에 운명적인 것처럼 보이는 결과들이 일어나곤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 뿐이었다. 보통 ‘운명’이라고들 부르는 것은 어떤 은밀한 질서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우연히 일어났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 이유나 원인이 비밀에 싸여 있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해야 옳을 일에 대해서 ‘이것은 운명이다’라고 이야기하는 매우 악한 관습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한 마디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늘 가르치기를, 만일 무엇이든 운명에 맡겨진다면, 세상은 목표를 잃고 소용돌이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모든 일이 일부는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일부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나, 조금 뒤에 가서 사람들이 섭리 아래 있고 섭리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을 충분하게 입증해 보이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심이 없이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것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자신의 원칙으로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일들이 제멋대로 일어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또한 사람들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우연도 일체 용납하지 않았고, 조금 뒤에 가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침으로써 이를 더 분명하게 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허락”도, 하나님의 명령이나 허락이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뜻이 모든 일의 첫째가는 최고의 원인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모든 사건의 진정한 원인은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음
우리의 우둔한 마음이 너무나 낮아서 하나님의 섭리의 그 높은 곳까지 도저히 미칠 수가 없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확실한 경륜에 따라서 그의 계획으로 지정되어 있으나, 우리에게는 그 일들이 우연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다만, 일어나는 일들의 질서, 이유, 목적, 필연성 등이 대부분 하나님의 목적 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인간의 생각으로는 파악할 수가 없으므로, 그런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분명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우발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미래의 사건들 모두가 불확실하여, 마치 그 일들이 아직 정해져 있지 않아서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얼마든지 기울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주께서 미리 정해놓지 않으신 것이 없다는 것이 변함없는 진리로 남아 있는 것이다.
벧세메스 사건이나 다윗이 마온 황무지에 갇혔을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침공하는 사건이나 우리는 그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연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믿음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였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유가 항상 똑같이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들이 하나님의 은밀하신 손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은, 전혀 일어날 조건이 없고 또한 성격상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대로 일어나는 법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동일한 육체를 지니고 계셨으므로, 온전한 사람이라면 그의 뼈가 약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뼈를 부러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요19:33,36).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상대적 필연성과 절대적 필연성, 그리고 결과적 필연성과 결과의 필연성을 학자들이 서로 구분하는 것이 전혀 무모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성자의 뼈를 부러질 수 있도록 연약하게 만드시고도 부러지지 않도록 하셨고, 그리하여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었을 일을 자신의 계획의 필연성에 따라 일어나지 않도록 만드셨던 것이다. (254)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238-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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