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로마서 6:1-4
성경은 역사적 사실과 함께 우리가 알고 살아야 할 교리를 말씀하고 있다.
교리는 논증을 통해 증거된다.
예수님의 산상수훈도 비유도 사실은 논증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논증을 통해 정리하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현대인은 이성을 동원하여 수고해야 하는 논증을 싫어하고,
보는 것, 느끼는 것으로 만족할려고 한다.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그러다 보니 깊은 생각을 못하고 생각이 빈약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이 빈약한 이유는 책을 거의 읽지 않기 때문이다.
시각 문화 곧 영화와 티비문화의 영향이 크다.
우리는 지금 글자 문화 대신에 시각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사람들의 생각과 의사소통이 사진, 비디오, 티비, 영화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안에서 누군가가 해석을 해주고 그것을 보고 들으면서 각인이 되고 그것을 말하게 된다.
내 스스로 생각하고 씨름할 필요가 없다.
독서는 우리가 생각하도록 만들어 준다.
시각문화는 누군가의 집단사고의 노예로 만들지만,
독서는 스스로 생각할 힘을 주고 정신을 새롭게 해준다.
위대한 사상가들은 위대한 독서가들이었다.
청교도들은 성경과 책들을 읽는 위대한 독서가들이었다.
우리도 위대하지는 않을지라도, 제대로 살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성경을 가까이하고 읽어야 한다.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다.
또한 기독교 역사를 통해 형성된 경건 서적들을 읽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멕체인 성경읽기표를 따라 성경을 읽고
한 달에 한 권 이상의 경건서적을 꼭 읽으시기 바란다.
우리가 읽은 성경은 교리로 정리되지 않으면 좋아하는 경구 정도로만 남게 된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한다.
성경이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숲을 알아야 그 안에 있는 나무들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성경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순수하게 교리적으로 잘 정리해준 책이 로마서이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읽고 연구해야 할 책이다.
그리스도인은 한 달에 한 번은 크게 소리내어 읽어야 할 책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1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6:1-2)
‘그런즉’ 했으니 우리는 앞에 하신 말씀을 보아야 한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5:20-21)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의롭고 선한 것이었다.
그대로 지키면 의롭게 되고 의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거듭나지 않고서는 그것을 지켜서 의인이 될 수가 없었다.
법이 하지 말라고 하면 사람은 안하는 것이 아니라 더 하게 되는 것을 본다.
율법은 이스라엘로 더욱 죄를 짓는 길로 가게 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의 뜻이다.
7장에 그 설명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도다”(롬7:21-25)
선한 율법이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는 다른 표현도 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9-12)
이런 표현들이 잘 이해가 안 되고 어려운 것은
우리가 그만큼 생각을 안하고 살고, 성경을 읽지 않고, 교리를 공부하지 않은 탓이다.
율법은 그 자체로 우리가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지 못한다.
죄가 무엇인지 가르켜 주는 데 사람은 오히려 그 죄에 끌리고 범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 하는 성교육이 성을 바로 가르쳐주려는 의도와는 달리
호기심을 더 일으키고 성범죄를 부축이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율법을 모두 지켜 의롭게 될 수가 없고 ,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가정교사 역할을 한다.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이 그 말씀이다.
사람은 율법을 다 행함으로 의로워질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데 구약 4천년이 걸렸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이다.
율법만 있는 때에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하였다.
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다.
때가 되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와 그 왕 노릇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셨다.
그리고서 그 사실을 믿는 이들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셨다.
어떤 은혜냐?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속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해주시는 은혜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9-10)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이제는, 이 은혜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게 되었다.
이 은혜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되었다.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고, 구원 받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는 정죄받는 일이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여기에, 하나의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쳤으니,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단연코 “그럴 수 없느니라”이다.
그 이유인 즉슨은 다음과 같다.
2 죄에 대해 죽었으니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에 더 살리요”(롬6:2)
어떻게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느냐? 이에 대한 대답은 이어서 나온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6:3)
우리 그리스도인인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물세례가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없다. 카톨릭은 그렇게 주장하지만 말이다.
오직 성령에 의한 세례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킬 수 있다.
성령은 우리를 믿게 해서 거듭나게 할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베푸신다.
물세례는 그것을 확인하고 인쳐주는 역할을 한다.
성령께서 세례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시킬 때,
이 연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창세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1:4)
성령 세례로 인하여 우리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음을 알게 된다.
성령 세례로 인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알게 된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믿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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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 아직 시작도 못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키는 성령 세례는 예수님의 거듭남의 설명으로 알 수 있다.
“내개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니라”(요3:5)
극적인 체험의 시기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들, 오래 동안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결과를 보고 알 수 있다.
어쨌든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와 연합과 거듭나는 열매가 있어야 한다.
이 연합이 성령으로 이루어지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에 대해서 죽으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도 함께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이다.
그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0-11)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서 단번에 십자가에서 죽었다.
우리는 그분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신분인 것이다.
그것을 믿고 여기고 살아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의 영적인 신분을 확실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신분과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죄의 왕 노릇의 신분과 영역에서 우리는 은혜의 왕 노릇의 신분과 영역으로 옮겨졌다.
아담의 영역과 통치에서 그리스도의 영역과 통치로 확실히 옮겨졌다.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
성령 세례로 나와 연합한 분이 어떤 분인지 알면 죄를 함부로 지을 수 없을 것이다.
3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그리스도와 우리의 이 연합은 부활로, 보좌 우편으로 함께 가게 된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5-6)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
아버지의 영광, 그의 권능으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이전에 처했던 모든 것이 끝났음을 선포한다.
주님의 부활은 죄와 그 통치를 완벽하게 이기셨다는 증거이다.
죄에 대한 관계를 청산하셨다는 증거이다.
주님은 부활의 결과로 새 생명 가운데 행하신다.
죄에 대해서 죽었다가 장사까지 지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새 생명이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장사까지 지내고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다.
성령의 세례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 함께 죽고 함께 새 생명으로 거듭나고 부활한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세례로 이미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새 생명으로, 새로운 존재로 부활하고 거듭났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옛사람)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새 생명, 새 사람)이 되었도다”(고후5:17)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오늘날 누리는 특권이고 신분이다.
로마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교리로 논증하고 가르쳐주고 인을 쳐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신분을 알고, 새 생명으로 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
성령께서는 세례를 베푸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고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되었다.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는데도, 모르고 여전히 노예로 사는 흑인들의 신세가 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들이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거나 왕 노릇 할 수 없다.
우리는 은혜가 왕으로 통치하는 영역으로 와 있다.
우리는 이제 죄를 능히 이길 수 있고 물리칠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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