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장 신약의 성결교훈 방식
“(12)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라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2-14)
12절 이하의 대목은 11절까지에서 논술하였던 주장을 실천적인 방면에서 적용하여 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 ‘그러므로’는 사도의 서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첫째, 교리는 언제나 적용되어야 한다. 교리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두 부류로, 교리에 전혀 관심이 없이 실제적인 문제에만 열을 올리거나 교리에만 관심을 가지고 실제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경우이다. 성경은 이 두 극단에 빠지지 말 것을 부단히 경고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요13:17)고 하셨다. 그 모든 지식과 교리가 우리의 모든 삶과 행동과 윤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면 심판 날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이것이 지식의 적용이다.
둘째, 이 실천적 대목은 그 교리로부터 나온 추론이라면, 그 교리를 바로 이해하였는지를 점검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둘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하고 서로 상통하여야 한다.
셋째, 이 대목이 우리 그리스도인과 죄의 관계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1-11절에서 이미 고찰한 해석이 옳았는지 아닌지를 아는 데 도움을 준다. 바울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죽을 몸을 구별하고 있다. ‘죄로 너희에게’ 왕노릇이 아닌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몸은 글자 그대로 육신적인 몸이다. 그것은 우리의 죄짓기 쉬운 우리의 본성, 전적인 인격체가 아니다. 그것은 죽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죽을’ 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고 있다. 죽을 몸에 남아 있는 죄는 일시적으로 잠깐 동안만인 조건이다. 위대한 존 칼빈마저 이 점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또 다른 의도는 우리의 장차 영화될 몸과 죽을 몸을 대조시키고 있다. ‘죽을 몸’에 있는 동안은 죄로 골치를 앓게 될 것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 자신은 죄의 체제에서 건짐을 받았지만, 그러나 죄는 여전히 오직 몸에 남아 있다. 이제 죄가 완전히 끊어질 몸이 영화롭게 될 날이 온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라”(고전 15;53) 그러므로 그의 호소는 우리가 우리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거나 통치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죄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왕노릇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죽을 몸에 왕노릇하는 것은 가능하다.
추론) 첫 번째는 죄의 ‘몸’(죄가 거주하고 죄가 사용하려고 하는)은 아직 남아 있다.
두 번째는 죄가 다만 우리 몸에 남아 있다. 그것은 우리 몸에 왕노릇하여 우리 몸을 지배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본능은 그 자체로서는 선하다. 그러나 죄는 자연적인 본능들을 비정상적인 정욕과 사욕으로 바꾸려고 애쓴다. 바울이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이 죽을 몸에 있을 동안에는 죄가 계속해서 우리의 본능에 대하여 그런 일을 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막고 제지하여야 하며,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11절에서 바울은 죄가 우리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처리하지 못하면 죄가 곧 우리의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
죄가 다시는 그리스도인을 주장하지 못하나. 언제나 그의 몸을 지배하려 안간힘을 써서 잠시 동안 지배할 수 있다. 그것을 배교라고 부른다. 배교할 수 있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만 있을 수 있다. 성경에 우리 몸과 죄와의 관계에 대한 진술이 그렇게 많은 것은 이 진리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라”(롬 12:1) “내가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나는 나 자신으로서는 죄와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아직 죄는 내 죽을 몸에 남아 있다. 내가 죽을 몸에 있을 동안에는 그것을 내가 다루어야 한다. 죄가 다시는 나를 주장할 수 없으며, 나의 영혼을 파멸시키지 못한다. 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몸 안에서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죄가 너희를 주장치 못하리니”
세 번째는 반드시 죄가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다.
네 번째는 성결과 성화에 관한 신학적인 교리로 안내해 준다. -우리가 실천에 옮겨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성화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성화는 영단번에 이루어지는 갑작스런 구원의 체험이 아니다. -성화에 관한 신약의 교훈 방식은 우리들이 포기하라고 언제나 호소하지는 않는다. 여기서는 오히려 행동하라고 권면을 받는다. “죄로 너희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그것은 우리를 향하여 적극적인 의지의 행동을 요청하는 부름이다. 백여년 동안 복음주의적인 교단에서 일반화된 가르침은 “기꺼이 포기하고 주님으로 하여금 네 안에서 살게 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성화는 절대적으로 보장되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설득하지 않았는가?하고 의문을 가질 것이다.
성화는 우리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교리로부터 추론들을 끌어냄에 따라 실제적인 세목들로 인도해 준다. 여러분이 거룩하게 되기를 갈망한다면, 먼저 교리를 이해하라. 교리를 이해한 뒤에도 끊임없이 그것을 인식하고 자신에게 적용시키라. 그리고 나서 필연적인 추론들을 끌어내라. 추론을 하지 않고는 교리를 진정으로 숙고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나의 위치는 무엇인가? 나는 이 모든 것에 비추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여러분의 성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교리는 우리들에게 성결에 대한 참된 동기들을 제공한다. 행복을 위해서, 지옥이 무서워서,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한 거룩이 아닌, 우리의 동기는 적극적이고 참된 것이어야 한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며, 그가 계획하신 모든 것, 그가 나타내신 모든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안다. 그런데 어떻게 계속 죄와 동행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것들이 나의 동기이고 이것이 내가 성화하는 방식이다. 죄가 내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허용하지 않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죽을 몸에 죄가 왕노릇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나는 나의 아버지와 나의 구주와 내가 속한 가정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것이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성화의 방식이다. 거룩하게 하는 것은 진리이다.(요17:17)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를 위하여 무엇이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우리 손에 하나님의 가정의 모든 명예가 달려있는가를 말해 주는 진리이다.(요 8:32) 그 진리는 이치를 따져보고 행할 것을 알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나로 하여금 내가 처한 놀라운 지위를 부단하게 생각하게 한다. 나의 옛 사람은 죽고 나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아 있다. 내가 “죄가 내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것들을 깨달을 때이다. 그런데 죄로 내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내버려 둔다면, 나의 새로운 지위에 모순되고, 내가 기다리고 있노라고 고백하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나는 하나님과 나와 내 구원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스스로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30) 고린도 교회에는 죄로 자기 죽을 몸에 왕노릇하도록 내버려 두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죄로 자기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자초하고 있는 자이다.
그 권면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또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이 가능한가를 생각나게 한다. 자연인에게 죄가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는 죄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며, 여러분 속에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권면할 수 있다. 여러분은 어떤 핑계도 댈 수가 없다. 여러분은 죄의 왕노릇을 멈추게 할 위치에 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피하리라”
제 13 장 우리를 하나님께 드림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우리가 죄로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해야 할 뿐 아니라 죄에게 왕노릇할 어떤 기회도 주어서는 안 됨을 말하고 있다. “너희 지체를 ---드리지 말라” - 우리의 의지를 향하여 주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요,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의 명령은 소극적인 부분과 적극적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첫째, 소극적(부정적)으로 우리에게 말한 바는 우리의 지체를 죄에게 드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 죄는 언제나 자기의 기회를 고대하고 있는 큰 원수이다. ‘지체’는 죽을 몸의 여러 가지 활동들만이 아니라 정서, 지능, 생각하는 힘, 논리적인 능력, 상상력들을 표현한다. ‘드린다’는 ‘내어주다’, ‘임의대로 하게 내버려 두다’, ‘사용하도록 허락하다’의 뜻이다. ‘병기’는 무기들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도구들’(흠정역)이란 의미이다. 도구라는 말은 죄로 하여금 자기의 목적을 수행하고 이 통치를 확정하게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죄와 마귀와, 어둠과 악에 속한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불의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의는 영원하시고 영원토록 의로우신 하나님께 대하여 반대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는 몸의 어떤 기능이든지 죄의 도구로 이용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만일 마귀가 여러분의 육체적인 체제를 얻을 수 없으면, 그는 마음 속에서 시도하거나 또 그 일을 할 수 없으면 상상력을 통해서 또 정서를 통해서도 그 일을 시도한다. 그는 악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지체들 전부를 위하여 책임져야 한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이 능력들과 이 기능들과 성향들이 그 자체로는 선하다. 우리가 중생할 때 그것들이 더 이상 죄의 편에서 사용되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사용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권면은 죄로 너희 죽을 몸을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치 말라. 이것이 권면의 소극적인 측면이다.
둘째, 적극적으로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자신을 죄에 드리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복음은 소극적인 면에 머물지 않는다. 도덕주의자들, 세상의 착한 사람들은 소극적인 측면에서 머물러 그들은 하지 않아야 될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고 도덕성에 대한 말밖에 할 수 없다. ‘너희 자신’을 죄에게 드릴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 드릴 수는 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 때문이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병기로 사용될 수 없다. 자신을 하나님의 임의대로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놀란 일이 있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신병모집 사무실로 나아가 하늘 군대의 성원이 되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6:20)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유익을 포기하고,(마16:24)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더 나아가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바울은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모든 지체들과 기능들로 나아간다. 이것은 성화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반드시 자신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지체들, 우리의 모든 됨됨이, 소유한 모든 것, 희망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맡겨져야 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그의 영광과 찬양을 위하여 산다. 모든 의의 하나님은 이 어리석은 원수, 세상, 육신, 마귀, 죄의 모든 세력과 싸우고 계신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이편에 주어 하나님의 군대에 등록시켜라. 또한 너의 모든 힘들을 악과 죄와 불의를 멸하고 빛과 영광과 진리의 나라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무기로 쓰여지게 하라” 이것이 사도의 명령이다.
이 구절에서 성화와 성결 방식에 대한 중대한 원리들이 가르쳐지고 있다.
첫째, 우리는 죄와 극렬한 싸움과 전투를 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 주관적으로 여기 투쟁하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패배하고 불행한 내가 여기 있노라 하는 식이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한 것은 영적 병원으로 오는 것이며, 여기서 질병과 아픔이 치료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교회의 주요 문제는 교회가 병원과 같은 것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느끼며 자신의 기분과 주관적인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와 악의 나라와 대항하여 싸우는 의의 왕의 생각을 잊었다. 우리는 의사가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소리쳐 알려 주는 특무상사의 목소리가 필요하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이다.
위대한 캠페인을 바라보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라. 잠깐 동안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잠시 당하는 고통을 잊으라. 군대 안에서 싸우라. 필요한 것은 병원이 아니고 여러분은 반드시 막사 안에 있으며 장엄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둘째, 성결은 느낌이나 주관적인 기분이나 상태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 섬김의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전체를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신약성경의 교훈은 오랫동안 성결과 성화교훈을 지배하여 온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것과는 전혀 다르다. 성화는 쉬운 것이 아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담대하라. 남자답게 굳세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악한 일에 맞서라.” 이런 것들은 전부 군사적인 명령이다. 우리는 병원을 생각하는 것을 없애야 한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 그의 아들을 통하여 계시하신 큰 작전의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 작전에서 하나님은 승리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 마음의 맨 위층에 자리 잡아야 하는 생각은 왕과 그 왕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내 영혼의 상태와 조건은 나와 그와의 관계 만큼 크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나라에 내가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더 크게 생각해야 한다. 무기력하고 감상적인 생각, 우리를 돕는 것만을 생각하는 우리의 욕망은 제거하라. 그것은 비성경적이고 악한 것이다. 오히려 사도가 여기서 표현한 바대로 주요하고 강하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위치를 바라보자. 우리가 우리의 특권적인 지위를 알게 되는 것은 그런 식으로 볼 때만이다. 그러면 죄는 생각 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며, 죄가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도 못하게 할 것이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게 될 것이다.
제 14 장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상기함
“(12)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2-14)
성결과 성화에 관련한 원리)
첫째, 우리 자신부터 출발하지 않아야 한다.
둘째, 언제나 하나님을 섬기는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셋째, 우리가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1절부터 11절까지 이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넷째, 우리가 전적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살아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의 메시지이다. 심어지는 우리 자신의 성결이 아니고 첫째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 “나는 이 --을 원한다,” 이것은 자신을 위한 주관적인 것이다. 우리 거룩해짐의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거룩할 때만이기 때문이다. 1차적으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해져야 한다. ‘행복한 그리스도인 삶의 비결’ 그런 타이틀 자체가 그릇된 접근이다. 그런 주관적인 접근이 많은 사람들을 수년 동안 방황하게 하는 것 같다.
14절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 질문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이다. 어떤 이들은 14절을 “너희가 이 모든 것(12, 13절)을 행하면 그러면 그 결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바울은 여기 14절에서 우리가 12, 13절에서 말한 대로 행한다면,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14절의 메시지는 명령이나 권면도 아니고, 전에 말한 것의 결과에 대한 진술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하라고 한 일을 하도록 용기를 주는, 즉 12, 13절의 권면과 명령을 이행하기 위한 근거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이는) 이라는 접속사로 두 문장을 연결하고 있다.
전반부는 우리가 어째서 죄와의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되는가의 이유를 제공해 준다. 대답은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엄하고 적극적인 권리 주장이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권면을 이행하면 올 결과를 알려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바울은 현재 나에게 사실이고 미래의 내게 사실이 될 것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가 우리를 주장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죄책에 관하여는 이미 죽었고, 죄의 통치와 죄의 왕노릇과 죄의 권위에 대하여도 죽었음을 안다. 그러나 진술은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죄가 전혀 우리와 상관치 못할 때가 올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참된 목표요, 목적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죄로부터 완전히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분은 죄로부터 완전히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어떤 모양으로나 어떤 형태로든지 모순을 범하지 말고 여러분의 죽을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반부의 ‘이는’(왜냐하면)의 의미이다.
후반부 ‘왜냐하면’(이는)는 전반부의 진술이 확고하게 말해질 수 있었던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율법’ - 사람은 ‘율법 아래’ 있든지 ‘은혜 아래’ 있든지 두 신분만 있다. 율법은 언제나 사람에게 와서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고 말한다. 율법은 어떤 종류의 법이든지 우리를 죄의 권능과 죄의 폭군 및 죄의 지배에서 구원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 3:12에서 율법, 심지어 모세의 율법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았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은 죄를 깨닫게 하는 일 뿐이다.(3:19,10) 또한 사도는 율법은 우리 안에 죄를 들추어내고, 우리를 향한 죄의 멍에와 폭정을 더 심화시킨다고 말한다.(5:20) 죄인은 하나님의 율법의 거룩함과 선한 것을 왜곡시키고 악용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것은 죄의 가공할 힘을 보여준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밥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2-4)
“---만일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3:21)
하나님의 율법에는 어떤 방면에서든지 우리를 죄의 세력과 죄의 폭정에서 구할 능력이 전혀 없다. 율법은 죄의 지극히 죄됨을 나타내고 죄가 얼마나 가공할 것인가를 알게 하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알려 준다. 율법은 우리의 무능과 비참한 궁핍을 보여주어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그러나 우리의 타락한 본성 때문에, 율법은 실제로 전적인 절망감과 침체 상태를 가져와 우리를 더 좌절시키고 더 나아가 죄를 자극한다. 죄는 모든 계명들을 뒤틀리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알기 전보다 더 악하게 만든다.
‘은혜’ - 그러나 감사한 일은 너희는 율법아래 더 이상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이다.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우리 자신 사이의 새 언약과 새 조약을 소개하여 준다. 새 언약은 우리의 죄를 값없이 용서해 주시고,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에게 백성이 되리라” 그리스도인은 친밀한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의 관심과 열심의 특별한 대상들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거룩함을 이루는 것이다(딛2:14).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받아 새롭게 되었다.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에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그의 권능을 두신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20)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새 언약 아래 있는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이다. 더 나아가 생명과 경건에 속한 필요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되었다. 그 이상 무엇을 바라는가?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과 영화가 확실하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성결을 북돋아 주고 자극하고 고양시키는 것은 없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은혜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인식하라. 그리고 권리증서를 읽고 그것을 자랑하는 자처럼 살아가라. 모든 침체와 절망과 낙담을 잊어버리고 장차 영광을 바라보며 그 앞에 서게 될 때 부끄럽지 않도록 하라. 이것이 신약의 방식이다. 여러분이 이것을 깨닫게 되면, 여러분은 죄를 미워하게 되며 죄에서 등을 돌릴 것이다. 또한 마귀를 대적할 것이다. 그리고 마귀는 여러분을 피할 것이다.
제 15 장 생명으로 설명된 소유권
“(15)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5-16)
전반부에서 우리가 칭의가 의미하는 바를 참으로 인식한다면, 칭의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의미하며, 그것이 우리 죄에서의 구원과 우리의 최종적인 영화를 보증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6장의 두 번째 대목에 이르게 되었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라. 첫 번째 대목의 말씀의 교훈을 알고 나서 그전보다 죄를 더 미워하게 되었는가? 또한 그 교훈이 여러분에게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대면할 때 새로운 확신을 주었는가?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거룩하여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어찌 하리요?” - 사도 바울은 진리에 충성하였고 자기에게 부과된 교리를 설교하였기 때문에 무섭고 극심한 반대에 직면해야 했다. 그를 비평하고 있었던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첫 번째 그룹은 유대인 율법주의자(오늘날은 도덕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이 가진 기독교 신앙에 관한 관심은 도덕과 윤리에만 국한되어 있다. 그들은 ‘칭의에 관한 가르침과 은혜의 왕노릇과 통치 아래 있으니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라’는 구절을 반대하고 그 교훈은 극히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형태는 흔히 공립학교 종교 과목으로 불리우는 것인데, 기독교란 어떻게 해야 ‘훌륭한 어린 신자’가 되는가를 가르치는 것에 불과하다고 교육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는 기독교란 단지 ‘사회 형태를 개선하기 위하여 주어진 도덕적 윤리적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그런즉 어찌 하겠느냐?”고 바울의 설교에 의문을 제기한다.
두 번째 그룹은 율법폐기론(무율법주의)으로 은혜 아래 있으니 어떻게 행하든지 간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곡해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꾼 자들이다.
- 오늘날에도 그 부류들이 남아 있다.
첫째, 참된 복음전도란 언제나 이러한 특별한 도전을 받는다. 만일 우리의 전도가 이 특별한 도전을 받지 아니하면, 거기에는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 이신칭의를 전혀 설교하지 않는 설교자들이 많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더 선한 삶을 영위하라, 이런저런 일을 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아무도 그런 설교자는 비난하지 않는다.
둘째, 참된 복음 설교는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도전을 받는 반면에 동시에 이러한 도전에서 우리를 지켜준다. 그러므로 메시지는 온전한 메시지여야 하며, 그것은 단순히 결심에 대한 호소나 에매한 신념을 지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도는 언제나 온전한 메시지를 전하였기 때문에 6장에서와 같이 논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 ‘죄짓다’는 죄의 상태에 계속 머물고, 죄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고정된 죄의 생활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나 또는 가끔 죄짓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법 아래’는 우리의 구원이 우리 행위와 공로로 결정된다는 입장에 우리가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에 의한 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런 추측 자체가 전혀 생각조차 할 값어치가 없는 것이고, 기괴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도는 그 도전이 이신칭의에 관한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임을 밝혀내는데,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는 말로 시작한다. 그는 일반적인 지식, 이치와 논리‘ 또한 상식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사도가 쓴 어휘는 종이 아니라 노예이다. 종은 자원의 요소가 있으나 노예는 그것이 없다. 권세는 노예 주인이 행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죄는 그러한 권세를 행사하고 그 은혜도 그러하다.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사도는 죄(노예주인)에 대칭하여 순종이란 말을 놓고 있다. 그것은 한순간이라도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메시지에 사람이 죄의 삶을 영위케 하는 것이 있다고 추측하는 것이 얼마나 기이하고 기괴한가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 ‘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무법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종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 사망의 반대는 생명인데 사도는 ‘의’를 말한다. 만일 순종이 생명에 이른다고 말한다면,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6:23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라고 하였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사이지 순종의 결과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순종이 의의 생활로 인도한다고 말한 것이다.
논증 요약) 첫째, 만일 우리가 자신들을 어떤 권세에 대한 노예로 드린다면, 그 세력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분명한 이치임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흔히 잊어버린다. 그 권세는 내가 행할 바를 결정하고 나는 더 이상 자유인이 아니다.
둘째, 두 궁극적인 전제주의적인 세력, 죄와 다른 하나는 순종만 있을 뿐이다. 여기에 중간지대는 없고 모든 인류는 죄의 노예든지 순종의 노예든지 이다.
셋째, 두 세력은 전적으로 다르고 반대되어 있다. 본질상 영원토록 반대이므로 그들이 가져오는 결과도 영원한 반대이다. 지옥과 천국의 차이이다.
넷째, 동시에 둘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들은 서로 충돌하고 배제한다.
다섯째, 결국 우리가 행하는 바에 따라 우리의 주인이 누구이며, 우리의 지위를 선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이 아닌 우리가 행하는 바로 인하여 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선과 악은 섞이지 못하고 섞을 수 없다.
본성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듭나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은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본성은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고, 순종과 거룩한 삶에서 스스로를 보여준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의 교인에게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동이고 바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라고 강권하고 있다.
너희의 신앙 고백이 어떠할지라도, 너희의 이해와 지식이 어떠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의의 열매를 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요, 전혀 무가치한 것이다. 이것이 사도가 도전하는 자를 반박하고 물리치는 방식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좋은 열매를 내는 것은 그 사람 자신 안에 있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은혜의 노예요, 순종의 노예라면, 그것은 저절로 나타날 것이며, 반드시 순종의 행위와 거룩한 행동에서 스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제 16 장 믿음과 순종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롬 6:17)
바울은 “너희가 전에 죄의 종이더니 이제는 더 이상 그 특성을 나타내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순종하였다. 나는 그것을 감사한다” 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일이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큰 변화를 이룩한 사람이다. ‘이제 너희는’ - 아무도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어떤 큰 변화를 가져와야 할 필요가 있다. 너희는 거듭나야 된다 - 너희 삶에 있어서 어떤 것을 개선해야 한다거나 용기를 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반드시 거듭나야 된다’ 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용어로만 묘사될 수 있는 변화를 겪은 사람이다. 바울은 그 점에 감사하고 있다.
이 변화의 크기는 사람의 인격 전체에 영향을 주는 변화이다. ‘너희가 순종하였다’ - 의지, ‘마음으로부터’ - 정서,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 - 이지, 이와 같이 겪는 변화는 그 사람에게 이지와 마음과 의지 속에서 영향을 주는 변화이다. 기독교는 단순히 어떤 한 부분을 다루지 않는다. 이것이 기독교가 이단과 많은 거짓 종교와 운동과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지와 지성에만 흥미진진함을 느끼는 철학자들은 사람의 마음이나 사람의 행동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또 감정과 정서의 영역에만 우리를 감동시키는 운동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지식도 주지 못하고, 어떤 가치 있는 대로 인도해 주지도 못한다.
우리가 이런 일들에 유의하여야만 한다. 기독교 신앙과 메시지가 일종의 감정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같은 방식으로 도덕과 윤리적인 부분에만 관심을 두어, 의지에 직접 호소하는 교훈과 운동들이 있다. 이것은 이해나 감정에는 상관없이, 실제적인 결과에만 관심을 두고 의지에만 집중시킨다. 그 설교에는 교리적인 내용이나 정서를 움직이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복음은 어찌나 크고 위대하든지 그것은전인을 수반하고, 전체 인격을 다룬다. 우리의 마음과 이지와 의지가 감동되지 않았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둘째, 이 변화가 너무 커서 소유권의 완전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첫 번째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본질상 죄의 노예였다는 것이다. 주께서 친히 강한 자를 다스리고 그의 무장을 해제하고, 포로로 잡혀있는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눅 11:21-222) 자연인이 자유를 운운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애석한 일이 없다. 때로는 같은 노예이면서도 난폭한 죄를 짓지 않는 훌륭한 사람들로 보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해야 할 일’에 얽매여 있다. 그들은 관습의 노예요 사회의 노예로 살아간다. 전인류가 노예라는 참된 증거는, 지적이고 많은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어째서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인가?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 영광스런 복음을 믿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노예 주인이 그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계속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전적인 죄의 노예로 살다가 지옥과 하나님 밖의 어두움에 영원토록 거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나타나는 것만을 가지고 죄라고 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쪽을 바라보라. 사도는 사실상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전에는 그러하였으나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노예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은 죄의 노예로 태어나서 두 번째 출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다. 사람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은 죄와 사탄의 노예이거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거나 둘 중 하나에 속한다. 신자는 전에 죽음과 어둠의 나라에 있었으나, 이제 그 빛의 나라의 법과 권세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깊고 가장 큰 변화이다.
셋째, 이 큰 변화가 어떻게 오는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 먼저 하나의 즉각적인 매개체는 교훈의 본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훈의 본이란 ‘교리의 형태’, ‘교리의 양식’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복음전도의 입장에서 이 진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오늘날 교회에서 당하는 우리들의 많은 고통들과 부흥이 지체되는 주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복음의 참된 요지를 여기서 정의되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도는 자신이 전도하지 않았는데도 로마 교인들이 이미 그것을 믿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훈의 본의 내용은 무엇인가? 교훈의 본이란 단순히 사죄의 메시지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죄가 복음전도의 유일한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복은전도에서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오도록 요청만 하는 것이다. 사죄에 대해서만 말하라. 죄사함을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결정을 요청하라고 한다. 더 나아가 “이후에 다른 집회에서 더 깊은 교훈과 진리를 배우게 될 것이다. 복음전도 집회에서는 오직 단순한 메시지만이면 족하다” 그런 가르침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비성경적이다. 로마의 그리스도인이 믿었던 메시지는 그것이 아니었다. 교훈의 본은 로마서의 이 부분까지 지켜온 온전한 교훈이다.
복음전도의 메시지는 거룩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으로부터 출발하는 메시지이다. 바울은 1:16-18에서 “내가 복은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사람들이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니”라고 하였다. 복음전도에서 죄 문제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지 않아야 한다. 우리 모드는 정죄(심판) 아래 있는 자신을 알아야 한다. 지옥을 향하고 있으며 죄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절망적이고 나약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그 다음에 구원을 성취하려고 애쓰는 인간의 사력을 다하는 노력이 전적으로 소용없음을 말하게 된다. (1,2,3장) 율법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도 철학자를 가진 이방인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래서 결론짓기를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한다. 사람은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 다음에 이 완전한 절망과 소망 없음과 낙담 가운데서 피할 길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것이 그 큰 변화를 가져온 매개체이다.
누가 그것을 사용하는가? 무엇이 궁극적인 매개자인가?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사도의 표현은 능동형이 아니고 수동형으로 “너희가 이끌림 받은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게 되어”로 읽어야 한다. 마치 주형틀에 부어진 쇳물이 주형의 모양대로 되는 것처럼 “신자 된 너희는 인도되어 이 교훈의 틀에 부운 바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누가 그들을 이 틀로 인도하였는가? 여러분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없다. 절망적이고 죽어 있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 우리로 하여금 “하늘 보좌에 앉히셨다”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함이라” 하나님의 성령은 이 교훈의 본을 가지사 우리를 그 속에 넣으시고, 그 교훈의 본이 우리에게 역사한다. 그분은 우리를 짓되 그 모양대로 지었다. 성경과 복음의 말씀은 즉각적인 매개체요, 사용된 기구였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교훈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면, 여러분은 죄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노예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은 적이 없다. 저는 언제나 이 교리를 거절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있는가 의심한다. 왜냐하면 이것이야 말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확신의 기초와 근본이기 때문이다. 나의 최종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과 확실성은 내가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며, 그가 나를 옛 죄의 틀에서 건져내어 이 새 틀에 넣었다는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시면 중도에서 그만 두시고 떠나시지 않는다.(빌1:6) 나는 결국 ‘점이나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그런 것이’ 없을 때에야 그 틀에서 나올 것이다. 바로 그것이 변화가 일어나는 방식이요, 그것이 이루어져 나가는 방식이다.
넷째, 큰 변화가 일어난 증거는,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을 순종하여” 사도는 ‘단순히 믿었다’고 말하지 않고 ‘순종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복음진리를 지적인 동조로만 생각한다면, 말잇기 퍼즐하는 것처럼 교리를 가지고 희롱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그들의 생명에는 아무런 것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구원에는 전인이 수반된다. 칭의와 성화를 따로 떼어 놓는 것처럼 비성경적이고 전적으로 악한 것이 없다. 그러나 보편적인 가르침으로 “당신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성화도 믿음으로 받으십시요”라고 한다. 그것은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다. 사람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그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에 순종하는 것이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런 일을 행한 것이다. 사도가 성화의 과정이 시작되지 않고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는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더욱 지으리요” 라는 반대에 대하여 답변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믿는다는 말은 참된 의미에서 이지뿐만 아니라 마음과 의지도 함께 수반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마음으로부터 순종이다.
죄의 진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의 말씀과 그의 방식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의 반대인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다.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순종한다. 순종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 믿음은 어느 것이든지 쓸모없는 것이다. 순종은 더디거나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다. 될 수 있는 한 세상과 옛 죄의 삶에 대하여 가까이 하려 하지 말라. 복음이 요구하는 것이 너무 엄중하다고 느끼는 것은 불쌍한 일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 깊은 변화를 겪은 사람이다. 그는 교훈으로 모양지워진 ‘틀’ 속에 있다. 그것은 회개할 것과, 죄를 떠나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순종할 것을 가르친다. 그 결과 우리는 마음으로 순종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원하는 노예요, 행복한 노예이다.
제 17 장 새생명의 원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8)
사도는 자기의 논증을 끝낸 다음에 그리스도인의 지위를 요약하고 그리스도인에 관하아여 근본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도는 호소와 실천하라는 권면을 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관한 것들 중에 하나를 제시하는 특징이 있다. 18절이 진리이면 필연적으로 19절의 호소가 있어야 되는 것이다. 바울의 말에 반대하여 제기된 15절의 도전은 어리석고 쓸모없는 것이라는 증거를 한 것이다.
첫째, 권면이 아닌 사실을 진술한다. 우리가 죄에서 자유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말하고 있다.
둘째로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진리임을 강조한다. 어떤 특정한(두 번째 체험)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진리인 것이 아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해당되지 않는 한 여러분은 전혀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죄에게서 해방되어” - 우리 속에는 죄가 남아 있지 않다거나, 우리는 완전히 죄와 관계를 끊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죄된 본성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옛 사람’과 죄의 본성을 구분하라. 옛 사람과의 관계는 영원무궁토록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죄의 본성은 아직도 우리의 죽을 몸에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시험에서 자유로워졌다거나, 다시는 죄의 활동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부정적인 면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런 문제로 고심하는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의 의미는 우리는 의의 노예이고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에서 벗어났고, 구원을 받았으며, 더 이상 전의 지위에 있지 않다. 더 이상 죄의 노예와 죄의 폭군과 죄의 지배와 죄의 모든 끈 아래 있지 않다. 사도는 실상 6장에서 여러 번 되풀이 하고 있다.(2,6,7,10,11,17절) 어떤 사람도 죄의 노예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수 없다. 복음을 믿는다는 사실이 그가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증거이다. 그 점에 대하여 분명해야 한다. 그는 더 큰 세력에 의하여 해방되었다.(소극적인 국면)
“의에게 종이 되었다” - 적극적인 국면으로 전에 죄에게 노예로 잡혔으나 이제는 ‘의에게 노예로 인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지위는 의에게 노예가 되었다. 우리가 의의 권세와 의의 통치와 의의 영향 아래로 왔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우리가 중생하는 순간부터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와 성화를 분리시켜 놓는 것은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그릇된 것인가? 성화는 거듭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다시 난다’는 것은 새생명의 원리가 우리 안에 놓여 진다는 의미이며, 그것은 즉시 신적인 권능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신약의 교훈은 특별히 그 일을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한다.(갈5:17)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하는 두 세력을 지닌다. 악과 죄의 세력이 있고, 다른 편에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하고” 있다.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를 의에게 드리게 하여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대로 우리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확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서 시작하신 일은 그것이 완전해지기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빌1:6)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생명의 씨앗을 넣으시는데 그것은 의의 씨앗이다.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행하셔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점없고 흠없게 되기까지 그 과정은 계속되어 나갈 것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우리는 무엇을 행할까에 대해서 매우 주의해야 한다. 그런즉 사도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교훈을 믿는 자가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에 거하겠느뇨”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의의 노예로 삼을 수가 없다. 아는 바대로 이 ‘틀’ 속에 넣어진 것이다. 우리가 죄에 계속 거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기독교 교리를 믿지 않고도 기독교 윤리를 주장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가?
성경 밖에도 도덕 교육이 많이 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영위하며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윤리와 기독교적 특성을 ‘친절’, ‘배려’, ‘도와주고 싶은 욕망’, ‘도덕적 악을 피하고 선하고 깨끗하고 곧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적 특성들은 진정한 기독교 특성을 묘사하지 못하며 그것들은 결국 기독교 윤리의 목적이 아니다. 기독교 윤리는 팔복으로 나아가고 고린도전서 13장으로 나아간다.
사실 휴머니스트들은 최선을 다한다 하여도 기독교의 ‘의’라는 말의 의미에 대하여 어떤 개념도 가질 수 없다. 신약적인 의미에 있어서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윤리와 특성은 한마디로 그것은 거룩이다. 거룩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벧전 :15-16) 그것은 단순히 선한 전환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그것을 무한하게 초월한다. 바울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다”(롬 8:3)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것을 배설물로 여기노라”고 한다.
- 만일 어떤 사람이 기독교 교리가 없어도 기독교 윤리를 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사실상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의 말과 행실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회심하기 전의 다소 사람 바울의 오류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율법의 문자만 취하였지 율법의 정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휴머니스트들의 바리새주의는 하나님의 율법의 참된 의미를 무섭고도 비극적으로 모르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 “저희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3)
- 사람이 자기 혼자서 자기를 책임질 수 있다는 사상, 즉 도덕성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갖는 책임성을 의미하며 강제 제재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상에 관한 문제이다. 그들에게 질문이 있다. 먼저 “내 자아관이 바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가?” 그들은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그런 일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말한 것은 모두 옳다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그들이 도달할 위치는 무정부 상태요 혼돈이고, 사사기의 위치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적 학문적 도덕관은 어렵고 지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전적으로 패배자나 실패자로 여겨지는 사람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 양심은 우리에게 외적 기준과 권위가 필요하다고 말할 뿐 아니라 하나만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양심의 가책이 있고, 그릇 행하였을 때는 비참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실패 가능성과 잘못될 가능성을 알고 훈련받고 배우고 교육받을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 사실 그 자체가 어떤 객관적 기준의 필요성을 입증해 주고 있으며 우리의 도덕성 뒤에 어떤 제재가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떤 유의 종교이든지 그릇된 행동에 대한 형벌의 경고와 궁극적인 규제 조항을 가지고 있는데, 그 종교는 세상이 알고 있던 율법과 질서를 가장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 구속의 교리는 도덕성에 대하여 반기를 든다는 주장이다. 먼저 역사의 증거가 있다. 구속 교리의 진리를 가장 깊이 깨닫던 시대가 영국이 아는 가장 위대한 시대였다. 가장 최선의 법과 질서와 도덕에 대한 최고 관심을 보이고 선한 행실과 행동을 가장 많이 나타냈던 때가 개신교의 개혁이 있은 바로 다음 세대였다. 어째서 그 청교도 시대에는 도덕에 대하여 그처럼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가? 그들은 구속 교리를 믿고 오늘날의 사람들이 집어던져 버리기를 원하는 바로 그 교리들에 의하여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웨슬리 전후의 영국’이라는 책에 의하면 소위 빅토리아식 도덕성을 가져온 것은 은혜의 교리, 특히 구속의 교리이다. 렉키(역사학 교수)가 분명하게 말하기를, 이 나라를 1789년 프랑스 혁명과 같은 혁명에서 구한 것은 이러한 교리들이 전파되고 사람들이 그것들을 믿었던 복음적 대각성이라고 하였다.
개인적인 증거로 죄의 노예였으며 어리석고 야비하고 부도덕한 자들이 완전히 변하여 새 삶을 영위한 증거들이 있다. 그들이 기독교 윤리를 받아들일 결심을 한 결과가 아니라, 그들은 구속의 교리를 믿었고, 그것이 그들의 삶에 큰 능력으로 임했기 때문이었다. 구속은 도덕에 대하여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이 도덕에 대하여 필수적이다. 그 이유는 이 본문에서 말하는 대로 사람은 본성으로 죄에게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적인 휴머니스트들은 그것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뒤로 돌아 앉아 초연하다. 그들의 삶의 진상을 알게 될 때 그들이 도덕적이라고 믿기보다 훨씬 부도덕하다는 것을 발견케 된다.
그들은 우리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과 똑 같이 각 개체가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개들도 본성이 달라 붙임성이 있고 복종을 잘하는 개도 있고, 정반대로 사람을 물어뜯는 개가 있다.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어둠을 사랑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빛을 싫어한다. 필요로 하는 것은 선한 충고나 교육이 아니다. 근본적인 필요는 선한 것을 행할 힘이 없어, 구원이 필요하다.
절망적인 사람을 위한 소망은 구속의 교리에 있으며, 거기에만 있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데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기까지는 어떤 것도 그에게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구속의 교리만이 사람이 구원받고 자기 발로 서게 되는 방식이다. 이 구속, 이 하나님의 은혜, 이 의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값없는 은혜로 우리 안에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그것이 우리 안에서 도덕과 성결을 향한 욕망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것은 도덕적인 삶의 최고 동기, 사랑과 감사의 심정을 산출한다. 도덕과 성결에 대한 가장 위대한 자극은 우리를 위하여 죽었고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욕망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구속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힘을 공급한다. 구속의 교리는 나태하고 게으르고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피조물을 만들거나 삶의 의무에 충실치 못한 사람을 만들어 내기는 커녕,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죽음이 증거하듯 정 반대의 결과를 낸다. 구속이 도덕에 반대 되는가?
이것은 강제가 아니다. 즐거운 자유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다. 그것은 고역이 아니다 그를 섬기는 것은 완전한 자유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주를 기뻐한다는 것은 구속의 교리를 이해하고 그것의 능력을 체험하며 사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니다.
제 18 장 영적 분별력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18절에서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고 진술한 다음에 19절에서 권면과 호소를 한다. 그는 20-23로 계속 이 점을 권면과 호소로 해 나갈 것이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 그것은 그가 하나의 인간으로 말하고 있노라는 뜻이 아니다. 그는 16절, 18절에서 사용해 왔듯이 예화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그는 평범한 사람의 생활에서 취한 친숙한 예화를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째서 그는 이 특별한 용어를 사용하여 하고 있는 일에 주의를 환기시키는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가 예화를 사용하는 데 대하여 양해를 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것은 교육방식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로, 예화나 실물을 사용하여 성경 진리를 밝히고 분명하게 하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사도가 노예제도에 대한 예화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들)
첫째, 주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말하고 노예제도라는 친숙한 사실에서 예화를 든 것은 너희가 모두 노예제도에 대하여 친숙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설교와 교육하는 일이란 언제나 그 의미와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두 극단이 있다. 하나는 너무 유치하고 단순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어린아이로 추급해서 그들에게 숟갈로 떠먹여 주듯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는 결코 이야기나 예화나 유추나 상상을(오락의 방편으로) 사용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극단은 자기들의 학문적인 설교문을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서 흔히 그것을 낭독한다. 회중들은 “아주 훌륭해요. 그 가르침은 따라가기 어려워요. 그처럼 위대한 설교자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정말 어려워요”라고 말한다.
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유추를 사용하는 것은 너희가 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유추나 예증을 사용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결코 즐기기 위해서나 사람이 영광을 받기 위하여 사용 되어서는 안 된다. 설교에 사용하기 위해서 예화를 적은 노트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밑바닥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둘째, 또 다른 입장에서 보면, 그가 그 유추를 사용하는 것은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피하고 막고 싶어서이다. “진리를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를까”(벧후3:15)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어떤 사람도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지 않기를 바란 나머지, 그리스도인은 죄의 노예가 아니면 동시에 의에게 노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또 다른 이유는 “어떤 예화도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진리를 왜곡된 자리에 놓게 될 것이다. 기독교 생활에는 노예성이 있다. 새 노예성은 옛 노예성과 차이가 있다.”라고 사도가 말하는 것 같다. 죄 아래서의 노예성은 강하게 무장된 사람에 의해 행사된 지배를 동반한다. 그것은 가장 악한 전제주의 독재 형태이고 거기에는 자유가 없다. 그것이 마귀와 악의 주권과 지배와 통치와 왕노릇 아래 있는 죄인의 진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노예가 된 이 노예제도는 다른 것이다. 우리와 의와의 관계에는 독특하고 놀라운 성질이 있다. 동시에 그것은 노예제도와 자유의 요소를 병합한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사랑의 노예이다. 사랑의 요소가 들어오면 모든 상황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원하는 노예이다. 바울은 말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 그는 압력을 받고 있으며, 그것은 더 이상 가공할 폭군이 아니라, 사랑이요, 사랑의 폭군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신앙의 역설이요, 전체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대한 역설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사랑의 관계 안에 있다.
그가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두 경우(옛 노예, 새 노예)에 있어서 강제력이 있어 순종은 필연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전에는 죄의 권능 아래 있었고, 그는 이제 의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다. 그는 의가 주도적인 세력이기 때문에 자신이 좋은 대로 행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사도는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들에게 예증을 이용하는 방식에 대해 특별히 주의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 예증은 우리들에게 어떤 요점을 부각시키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 사도가 예증과 유추를 사용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너희 이지와 지력이 약하므로”가 아닌 “너희 육신이 약하므로”라고 말한다. 그는 지력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신약성경 전체는 그런 것을 말하지 않는다.
육신은 죄에 의해서 영향 받고 부패되고 통제받는 사람의 모든 기능을 의미한다. 그것은 육체적인 몸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 교훈에 의하면 사람이 본성으로 당하는 고통은 그가 지력이 모자라는 데 있지 않고 영적인 이해에 있다는 것이다. 타락의 가장 파괴적인 결과는 영적 이해력의 상실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의 진리를 믿고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받아 들이는 문제 전체는 지적인 문제가 전혀 앞서지 않는다. 유대인은 그것을 거치는 돌로 생각하고 헬라인들은 그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겼다. 바울은 더 나아가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조명문제이다.
사도는 고전1:26-29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지성과 천성적인 능력과 이해력과 아무 상관이 없음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면 그것은 무지를 추켜세우는 것인가? 천만에! 그것은 지력이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일 뿐이다. 사람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자기의 무식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어느것이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성령의 조명뿐이다. 영적 분별의 문제들은 성령에 의해서 소개될 수 있는 영역에 속해 있으며, 그 영역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의 결과로 안내를 받아야만 한다. 그것은 영적인 영역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동등하게 무력하고 절대적인 불능의 수준에 머물도록 하셨다. 기독교 진리에 대하여는 우리 모두는 같은 수준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유형의 사람들을 구원할 소망이 함께 있어지게 되는 것이다. 설교자에게는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특징을 알든 모르든 차이가 없는 것이다. 사도는 진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난제란 ‘육신의 연약함’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잘못 이해하지 말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떠나서는 영적 진리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을 받은 뒤에는 이해력의 정도에 있어서는 다양성이 있다는 것이다. 성령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기능이 우리에 의해서 개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3:1)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2)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고전2:6)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여러 단계로 차이가 나게 하는 것은 그들이 성령에 의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이 권능과 기능을 사용한 데 성공하고 실패하는 정도에 따른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5장에서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렵다고 한다. 계속해서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라고 한다. 그들이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현재에는 이 모든 것을 잊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나는 구원을 받았으니 모든 것은 다 잘되었다. 나는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신학자가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도 그런 식으로 어린아이로 남아 있을 권리가 없다. 그들은 또 “그러나 나는 실천적인 사람이야, 나는 위대한 일꾼이야”라고 말한다. 여러분은 그런 식으로 구분시키는 권리가 없다. 은혜 안에서와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야망이어야 한다. 성경을 연구할 때 읽을 수 있는 책 중에서 가능한 가장 좋은 책을 읽으라.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깊고 심오한 지식을 얻으라. 나아가 ‘여러분의 지각’을 행사하라. 왜냐하면 영감된 저자들에 의하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전체 진리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가 충돌하고 있는 것 같은 로마의 그리스도인에게 15:14에서 말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면서도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그들은 빛을 받았고 영적 이해력을 가졌으나, 반면에 바울은 그들이 앞에 제시하고 있는 깊고 심오한 교리들을 따라가기에는 충분치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복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친히 이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여러분은 이 교리를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더 얻게 될 것이고, 여러분이 더 얻게 되면 얻게 될수록 더욱 이해하고 계속해서 그렇게 나아갈 것이다.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기 전에 강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은 자라고 발전하고 우리의 영적 지각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는 대로 유추와 예화의 사용은 갈수록 필요성이 적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유의 식물을 먹는가? 아직도 젖을 먹을 수밖에 없는가? 아직도 예화나 유추가 없어서는 안 되는가? 아니면 우리의 이지가 성령의 조명 아래서 확장되고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기뻐하고 있는가? 우리는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기능을 행사해야 하며, 붙잡아야 한다.
제 19 장 하나님의 합당한 요구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지체’ - 사람의 육체적인 몸의 행동적인 부분을 포함한 이지와 상상과 마음과 느낌과 감수성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지체’라는 용어는 우리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어느 의미에서는 중성적이라는 요점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될 때 새로운 지체나 새로운 기능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회심 전에 가진 재능과 힘과 성향의 문제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여전히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방면에서 모두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이 점이 중요하다. 우리는 같아질 수가 없다. 이단들은 사람의 개성을 묵살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다. 만일 기독교라고 행세하면서 어떤 표준적인 개성의 모형을 산출하고 있다면, 즉각 의심해 보아야 한다. 여러 제자들, 베드로, 요한, 바울의 차이를 보라.
사람의 진수가 되는 개성은 회심에 의하여 바뀌지 않는다. 회심 전에 가지고 있던 능력도 바뀌지 않는다. 기독교가 만드는 차이란, 그의 능력과 기능과 성질들을 전보다 더 좋고 더 부지런한 방식으로 사용하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은사들을 정확히 분배하셨다. 모두가 다 다르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결과를 내는 기계가 아니다. 결코 같아지려고 하지 말라. 우리는 물론 우리의 개성이 제멋대로 굴게 해서는 안 되지만, 우리의 개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도 안 된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것을 옛 생명에 적용하였던 것과 같이 새 생명에도 적용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요,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 이것은 이 성결과 거룩의 교리를 다루는 신약적인 방식의 특징이다.
성결과 성화의 원리)
첫째, 이것이 하나의 권면이면서 명령이다. 사도는 전에 너희가 드렸던 것처럼 지금도 드리라고 한다. 성화와 성결을 취급하는 신약의 방식은 언제나 호소가 아닌 명령형이다.
둘째,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굴복시키기만 하면 저절로 이루어짐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해야함을 명령하고 있다.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하여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에게만 안주하면 승리가 주어지는 신기한 방법을 붙잡으려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이것이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것을 기초로 한 권면이요 명령이라는 것이다. 18절에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라고 하였다. 그것이 우리에게 이미 일어난 일이다. 우리에게 또 다른 체험(두 번째 회심)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의의 왕 노릇이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으며, 의의 권능과 힘이 이미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가졌으며, 우리의 임무는 이제 그것을 의지하여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신약을 관통하는 교훈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벧후 1:2)
넷째, 신약의 성화 방식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위치와 지위를 깨닫게 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게 하는 데 있다.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너희다워라’(be what you are) 이다.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으므로, ‘너희다워라’는 것이다.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어야 한다고 호소하는 적이 없다. 그것은 이미 이루어졌다.
다섯째, 이 요구가 전적으로 이치에 맞는 일이라는 것이다. ‘---였던 것같이 ---또한’이다. 여러분은 옛날 자신을 옛 생명에 드렸지만, 이제 자신을 새 생명에 드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체험이나 감상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이치적으로 생각해보고 그에 맞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옛 것에 반응하였었는데 이제는 새로운 것에 맞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때문에 훨씬 더 커야한다. 새로운 상전과 그 상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 때문에 더 커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깨워 흔들어 행동하라는 호소이다. 신약의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도인들은 전쟁터에 있는 군인으로 싸우고, ‘남자답게 담대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실제적이 되라. 먼저 시간을 보면, 옛 삶에서 그들은 여가시간을 즐거움을 위해 썼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바쁘다는 이유로 주일날 한 번 예배드리는 것으로 족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그를 진정으로 알았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그에게 바쳤을 것이다.
또 정력의 문제에 있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피곤하여 밤 예배나 다른 활동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이 세상에 속해 있었을 때 퇴근 시간 후에 식당, 영화관, 등으로 많은 밤을 보냈을 것이다.
또한 참을성과 열심의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거나 다른 기독교 서적을 읽는 데 인내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것이 어려워서 지친다고 말한다. 그들이 옛 죄의 생활에서 쏟은 열심을 생각해 보라.
사도의 의도는 ‘지체’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 기능, 능력, 잠재력, 그리고 가진 모든 것 - ‘---과 같이 ---또한’ 이라는 논리에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해야 한다. 그것이 거룩에 대한 신약의 방식이다. 감상적이거나 유약한 면이나 심리적인 지름길은 전혀 없다. 대신에 우리에게 이 엄격하고 강한 진리를 보내고 있다.
여섯째, 우리가 성결생활과 관련하여 어려움을 겪고 실패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진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오직 한 가지 길은, 우리를 바르게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진리를 이해하는 길밖에 없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하셨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신약은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새방식이 아니라고 말하며, 독특한 치료법이 없다고 말한다. 여러분 자신을 끌어내어서 ‘---과 같이---또한’을 실천해야 한다. 중요하고 첫째 되는 일은 우리 자신에 관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옛날에는 어떠한 자였으며, 이제는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전에는 우리가 노예였다고 말한다.
-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린 것같이” - ‘부정’은 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로 모든 신자들의 옛 상태였다. 죄는 항상 깨끗지 못하다. 그러므로 죄인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부정하다. 우리의 ‘지체’는 부정의 노예였을 뿐만 아니라, ‘불법’에도 노예였다. 죄는 부정하고 무법하고 추하고 어리석고 범죄로 인도한다. 부정한 행동을 유발하는 것은 부정한 욕심과 부정한 생각이다. 우리의 행동은 사상이 부정하기 때문에 부정한 것이다. 부정은 불법과 무법을 불러온다.(막 7:15-23)
사도가 뜻하는 바는 옛 생활에서 지체들은 부정과 불법에 드려졌으며, 그것은 불법에서 불법의 상태로 이끌어 주었던 악순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노예가 되기까지 계속하게 된다. 바울은 그것이 예전의 사람됨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인가? 아직도 노예이다.
- 그와 같이 “너희 지체를 의에게 노예로 드리라” - 깨끗함과 순전함과 정직함과 선함과 의로움에 대하여 노예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은 본질적으로 바르고, 곧고, 명예롭고, 진실하다. 그것은 정직하고 진실하다. 의이다. 사도는 그것이 거룩함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의와 성결의 차이는 의는 주로 우리의 행동에 대하여 하는 말이고, 거룩은 우리의 상태와 조건에 대하여 가지는 말이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그 안에서 순전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우리의 지체를 의에게 노예로 드리고, 계속해서 이 의로운 생활를 영위해 나가고, 힘과 능력과 시간과 모든 것을 다하여 그것을 실천함에 따라서 여러분은 점점 더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 가깝게 된다는 것이다. 이론과 실제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 보완적이다.
우리는 ‘하늘나라 왕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다. 이것을 기억하고 그에 따라서 살고 우리를 부르신 것과 주의 이름을 자랑할 때, 우리는 의로운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거룩으로 진전되어 나아갈 것이다. 그것은 신약 어디서나 성화와 성결에 대한 원리들이다.
나를 위하여 보혈이 흘려졌다 - ‘그러므로’ 내 모든 것과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옛 악한 방향으로 쓰여 졌던 것같이, 이제 일어나서 이 거룩한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것을 할 힘은 이미 모든 것을 받았다. 또 다른 체험이 필요치 않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받았으며,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책임회피자요, 철없는 아이요,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이요, 진실로 거짓말쟁이이다.
제 20 장 거룩한 삶을 위한 논증들
“(20)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롬 6:20-21)
사도는 이 두 절에서 18절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19절의 명령을 둿받침해 주는 이유들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끝절까지 이러한 주장과 이유들을 계속하고 있다. 22절에서 적극적인 이유, 우리의 현재 조건과 상태와 가능성을 말하고, 23절에서는 앞에서 말한 적극적인 전체 진리를 한 문장의 진술로 매듭짓고 있다.
그것은 사실상 15절의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라고 1절의 억측에 대한 논박을 하고, 여기서는 거룩하고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할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결과 성화는 언제나 하나의 논증의 결과요, 추론의 결과, 논리의 과정의 결과이기 마련이다. 그것은 기독교 교리를 나타내는 신약의 방식이다. 사도는 언제나 명령과 교리를 병행시킨다.
20과 21절에서 우리가 불신자, 즉 죄의 생활의 진상을 보게 되는데,
20절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의 상태와 조건을 다시 한번 상기 시킨다.
그러한 사람은 죄의 노예와 종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노예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다. 그들은 죄의 노예일 뿐 아니라 ‘의에 대하여 자유한 자들’이다. 매우 충격적인 구절이다. 그리고 매우 쉽게 오해될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해석하기를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율법과 제재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하다. 또 어떤 이들은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전적으로 악했음을 말하는 사도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다. 사도는 이미 그러한 자들은 ‘율법 아래’ 있다고 말하였다.
16절에서 그 점을 명백히 지적하였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죄의 노예이든지 의의 노예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18절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특히 22절에는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되어” 이것은 분명히 죄의 종이었을 때에 의에게는 종이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는 의미는 죄의 지배와 통제와 다스림을 받았기 때문에 의의 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동시에 상반되는 두 상전의 노에가 될 수 없다. 이것이든지 저것이든지 해야 한다.
“모든 불신자들이 시궁창에 살지 않고 도덕적으로 매우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일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사도의 역설은 단순히 윤리적 종교와 기독교를 구분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기독교 진리의 가장 큰 원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소위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나는 기독교 윤리는 믿지만 교리에는 관심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저는 그들이 ‘선한’ 사람들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힘을 믿지 않고, 속죄의 절대성을 믿지 않는 자는 불신자요, 가장 위험한 사람이다. 우리 주님께서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어떻게 경고 하셨는가?
20절은 우리로 하여금 그 차이를 알게 해 준다.
첫째, 비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의에 대하여 아무런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인간적인 의미에서 공의와 의라고 부르는 것과 성경의 ‘의’라는 의미는 관계가 없다. 그들을 조정하는 것은 자신이고, 자신의 생각과 사상과 철학이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죄와 사단의 지배를 받는다. 사도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그와 반대로 의의 지배와 조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요점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10장에서 진술한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2-3) 그들이 세우고 있는 의는 자신의 의였지 하나님의 의는 아니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힘써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한다. 그것은 정확하게 도덕적이고 윤리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는 신사들이 행하는 바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며 그것이 여러분을 지배한다. ‘자유하다’는 말은 그것이 삶의 주도적인 원리가 아님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의는 성경은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전혀 참된 의를 가지지 못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자기의 옛 삶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내개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7,8) 그것이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의 죽음 없이도 지낼 수 있다는 사람들의 신기한 정직과 선함과 도덕주의를 묘사하는 바울의 방식이다. 그것은 ‘분토’요, ‘배설물’이요, ‘헛된 쓰레기’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텔레비전 화면에 나와서 끼리끼리 대담하고 토론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인가!”하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서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그것은 혐오거리이다. 의는 그러한 사람들의 생명을 지배하지 못한다. 이것이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고 말한 의미이다.
무엇이 의인가? 본질에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의 종이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의와 하나님의 의에 관해서 무엇이든 다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를 정확히 알고 자기의 부족과 자기의 절망적인 궁핍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의 표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잘 만족하고 주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바리새인과 같다. 그는 자기를 얼마나 훌륭하다고 생각했는가? 그것은 자기의 작은 윤리적 표준이 적당하다고 여기며 기독교 교리가 전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독선이다.
둘째,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어떤 개념이든지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부족을 예민하게 깨닫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 시작한 사람이다.(마5:6) 그러나 자기의 표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자기만족을 드러내고 겸손이나 온유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러한 사람들은 의에 대하여 완전한 외인이요, 의에 대하여 자유하다. 하나님의 의의 영역 밖에 있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다. 죄에 빠진 사람들이 그것이 아무리 큰 인상을 끼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구역질나는 삶이다. 그것이 20절에 잇는 첫 번째 진술이다.
21절에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유형을 보게 된다.
첫째, “그 때에 너희가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 열매 없는 삶이다. 전적으로 유익함이 없는 생활이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삶이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1:3),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라”(전2:11) 전도자는 애써 지혜를 구했고, 배웠고, 큰 궁전을 지었고, 말할 수 없는 부요를 누리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보았다. 전도자가 내린 결론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진리인가 하고 물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가치와 열매와 유익을 무엇으로 평가하는가? 즐거움과 행복이 아니다. 죄의 생활이 즐거움을 주고 일종의 행복감을 줄 것이다. 곧 죄악의 낙은 잠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괘락과 행복은 인생의 유익과 가치를 시험하는 참된 길이 아니다.
참된 만족의 차원에서 그것을 시험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두 부름, 세상과 기독교의 부름에 직면해 있다. 확실한 시금석은 그 부름이 이지와 마음과 영에 만족을 주느냐이다. 세상은 안식이 없으며, 거기에 속한 사람들은 안식이 없다. 그들은 이것에서 싫증내고 또 다른 유행, 또 다른 흥분으로 바꾼다. 원을 돌고 도는 그들은 진정한 만족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시금석은 그것은 세워주고 생명력을 주는 것인가? 나로 하여금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행하도록 하는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밖에서는 삶을 고양시키는 것이 하나도 없다. 또 다른 중요한 시금석은 내 삶의 방식이 나로 하여금 훗날의 종말을 예비케 도와주는 것인가? 내가 늙었을 때 나를 도울 것을 제공하는가? 내가 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대답은 세상의 삶은 무엇이든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시험하는 방식은 이 모든 것에서 갑자기 끊겨지게 되었을 때 어떠한 입장에 놓이게 될 것인가를 상상하는 것이다.
둘째,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 그것이 수치의 삶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삶에서 이러한 일들과 너무 친숙해 있다. 그것은 본래 자체가 부끄러운 삶으로 성경은 밤과 어두움 가운데서 행해진다고 하였다. 위선이라는 것은 악이 선에게 바치는 찬사이다. ‘밤’이란 말 자체가 거기에 속한 수치에 대하여 말한다. 수반되는 사기, 부정함, 무가치를 생각해 보라. 인생의 존엄함과 가장 고상한 것에 관하여 하는 ‘농담’을 보라. 악을 오락으로 여기고 자신들의 아주 높은 능력을 고갈시키는 것을 보라. 현대인의 삶을 특징짓는 악용과 어리석음을 생각해 보라. 때로는 양심의 가책과 역겨움을 느껴 수치감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악한 것은 수치감을 잃기까지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상 “악이여 너는 얼마나 선한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렘8:12)고 했다. 그들은 선악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바울의 편지를 받아보던 자들의 옛 삶이 그리하였던 것이다.
“그 마지막은 사망이라” - 사망은 언제나 죄의 마지막이다. 그것은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혼자 버려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일만큼 무섭고 떨리는 일은 없다. 이런 일들은 거룩한 생활을 논할 때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해야 하는 일들이다. 그것이 바로 죄를 억제하는 길이다. 스스로에게 “아니다. 내가 그것을 행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내가 만일 그렇다면,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고, 열매 없고 부끄럽게 끝내 사망으로 끝날 삶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난 그렇게 할 수 없다”라고 우리 마음속에 하나의 논리로 간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이것을 여러분의 마음 앞에 끊임없이 간직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죄와 시험에서 건져줄 기가 막힐 어떤 공식과 방식을 찾고 있지는 않는가? 여러분은 제가 말하고 있는 이 죄의 방식과 결과에 대한 분석을 전적으로 소극적인 것으로 여기는가? 여러분은 “나는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믿고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부정하고 영감을 받은 사도의 교훈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 앞에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싸우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여러분은 옛 죄의 삶의 성질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그 속에 계속해서 거한다는 것은 아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런 삶을 산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그것이 죄를 피하는 길이다.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더 거하겠는가? 그것이 성결과 성화에 관한 사도적인 방식이다.
“주님을 바라보고 그 안에 거하라”는 것이 아니다. 시험이 올 때 옛 죄의 삶을 바라보고 그것을 분석해 보고 물으라.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요청하고 있는가? ‘그럴 수 없느니라’ 나는 내가 살았던 열매 없고, 부끄러운 삶에 속한 것은 어떤 것이든지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죽음과 영의 생명에 대한 죽음밖에는 가져오지 않는다.” 그것이 사도의 위대한 부정적인 논증이다.
제 21 장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우리가 무엇을 행할 것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렇게 행할 이유를 제시한다. 우리는 이미 20, 21절에서 옛 삶이 무가치한 생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이 22절에서 적극적인 이유들을 대하게 된다. 바울은 소극적인 데서만 머물지 않고 으레 적극적인 대로 나아가는 것을 반복한다.(11,13,17-18) 그러한 일들을 되풀이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은 우리 믿음의 이해 깊이를 알아보는 척도가 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런 일들을 아무리 들어도 지치지 않는다. 그는 복음 듣기를 좋아하고 심지어 가장 단순한 형태의 복음 듣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 복음의 중심적인 영광과 그 복음의 본질적인 놀라움 때문이다. 사도는 반복하지만 단순한 반복만이 아닌, 언제나 더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 첫 번째, 그리스도인은 심오한 변화를 겪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때’와 ‘지금’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제는 ---’ - 완벽한 전환이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다. 이제는 전혀 달라졌다.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그러나 이제 그것을 가지고 있다. 아무도 그리스도인 외에는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러나 이제는’을 자랑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말을 바라볼 때 그의 존재의 깊은 데서부터 나오는 감동이 없을 수 없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가장 훌륭한 시금석이다. 이런 말들이 우리를 감격시키거나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자신의 위치를 재점검하는 것이 좋다.
이 위대한 변화에 대하여 강조하고 싶은 것은 첫째, 변화의 완전성이다. 그것은 무엇을 조금 첨가하는 것이 아닌 완벽한 변화이다. 점차적으로 변하는 단계가 없다. 또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진 무엇이며, 우리가 결정한 변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수동형이다.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렘13:23) 더 좋은 번역은 ‘해방되고’가 아닌 ‘자유케 되었고’로,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를 ‘하나님께 노예가 되었다’로 강하게 표현해야 할 것이다.
둘째, 변화의 본질을 살펴보면, 이것은 우리를 해방시킨 진리이다.(요8:32) 이것이 이미 우리 것이 되었으며 우리는 이미 자유케 되었다.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아직 가질 수 있는 어떤 새롭고 가능한 체험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함께 장사 되었으며, 함께 살아나서 그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된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죄로부터 자유케 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아야 된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죄 없는 완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죄가 우리 죽을 몸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죄는 죽을 몸에 왕노릇할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죽을 몸에 죄가 왕노릇하고 통치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상전이 아니고 귀찮게 구는 존재이다. 죄는 더 이상 나의 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귀찮게 구는 것이요. 골칫거리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을 때, 그는 전적으로 들을 필요가 없는 음성에 귀 기우리는 어리석음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마귀는 길 건너편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을 뿐이다. 비그리스도인과 달리 그리스도인은 죄로부터 해방되었고, 그래서 이제 ‘마귀에게 저항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 마귀는 그를 피하게 된다.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마귀를 대적할 수 있고, 물리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다.(벧전5:8-9) 사도 요한은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하였다.(요일5:18)
이것은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진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하나님의 종이 되어’ -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고, 하나님의 노예가 되었다. 옛 영역으로부터 ‘하나님의 노예’에로의 완벽한 이주가 이루어졌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6:19-20) 사도는 일련의 단계로 노예를 말하고 있다. ‘순종의 노예’(16절), ‘교훈의 본의 노예’(17절), ‘의의 노예’(18,19절), 이제 이 22절에서는 산 정상에 이르러 ‘하나님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결의 비결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체험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 된 것을 이해하고 우리가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결과 성화에 대한 비결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해 살 아무 권리가 없으며,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죄를 지을 권리가 없다.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은 마치 적과 내통하고 있는 군인과 같다. 사람이 최고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것은 전체를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의 것이며, 영원토록 그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킨다”(요2:17)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와 같이 되어야 한다.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열심히 소멸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어려움이 크다고 장황하게 늘어놓고, 동정을 구하고, 쉽고 빠른 탈출방법을 열망한다. 사도의 교훈을 얼마나 왜곡시켜 놓은 것인가?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는 적게 이야기하고 그분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라. 여러분이 할 일은 그가 여러분에게 하길 원하는지 아는 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가 여러분을 그렇게 값비싼 대가로 산 것은 여러분이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결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나는 내 뜻을 행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씀 하셨다. 비록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자신을 낮추시고 자원하사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 주셨다. 그것이 그가 이 세상에서 살아간 방식이다. 성결과 성화의 절대적 완전성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체험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노예이며 전적으로 그의 임의에 따라 사는 자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요구가 어떠하더라도 그것을 그가 행하신 방식대로 부딪쳐야 한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것이 순종의 극치이다. 그것이 모본이요, 양식이요, 모범이다. “하나님께 종(노예)이 되었느니라”
우리가 생각할 것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들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또한 더한 것은 우리의 노예 신분이 그렇게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얼마나 용기를 북돋는 일인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 그리스도인은 깊은 변화를 겪었던 사람이다. 이제 그 변화의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다는 것이다. 옛 생활에는 없었던 열매가 있다. 여러분이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노예가 되지 못하였으면 이런 열매를 내지 못한다. 거듭나지 않고 이 열매를 내기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열매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너희가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행위에 의한 칭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된다. 영생은 마지막 목적지이지 열매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다. 그 열매는 성결이요 성화이다. 거룩함이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바쳐지는 것이다. 성결은 느낌이나 체험이 아니다. 성결은 그를 섬길 양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엡2:10)
또한 그것은 우리가 더욱더욱 드러나게 된다. ‘더욱’을 강조하는 것은 성결은 전진하는 것이고 증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화는 진행해 가는 과정이요, 그것에 대한 진리는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성도는 성숙해가고 자라갈수록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가는 것이다.
그것이 큰 변화의 첫 번째 결과이다.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
제 22 장 궁극적인 결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6장은 기독교 교리와 구원 방식의 입장에서 로마서의 중추가 되고 사활을 좌우하는 장이다. 그것을 이해하고 추종하는 정도와 범위는, 그리스도 예수를 기뻐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한 해방을 기뻐하는 정도에 따를 것이다. 로마서 6장을 연구하고 나서 어떤 사람도 멍에 아래 있지 않게 될 것이다.
이 구절은 6장 전체 논증의 요약이며, 사실상 5장 마지막 절의 반복이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5:21) 6장은 삽입장으로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진정으로 이해한 자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임을 논박하여 보여주고 있다. 23절은 구원의 복음 전체를 한 절 가운데 진술하고 있다.
첫째, 이 세상에 온 사람은 누구든지 두가지 가능성만이 있다.(사망-영생, 넓은 문-좁은 문)
둘째, 이 두 가능성들은 완전히 서로 다르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영적 의미에서 공통되는 점이 전혀 없다.(백-흑)
셋째, 본질적으로 이 둘은 각자 냉혹한 법칙에 의하여 아주 필연적인 귀결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사도는 마지막 다른 종말을 강조하고 있다.
대조를 살펴보면 첫째, 섬기는 상전 - 죄, 죄의 삯과 하나님, 하나님의 은사 둘 중에 하나이다. 영적 영역에 중성지대란 없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문제는 너희가 누구를 섬기느냐, 너희가 누구를 위하여 살고 있느냐, 너희 상전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위한 대 싸움의 중추신경이다. 사람들은 멋지고 교양을 갖추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훌륭한 사람들, 선행과 윤리에 대하여 박식하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다. 사도는 그 사람들이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만일 그들이 하나님과 그 영광을 위해서 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죄의 노예라는 것이다.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괴롭게 하는 그런 ‘거짓 사도들’로부터 그들을 건져내려 하였다.(고후11:12-15) 그런 사람들은 자기를 ‘의의 일꾼들’로 나타낸다. 그들은 자기들을 ‘광명의 천사’들로 가장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결국은 우리가 그들이 하는 말과 그들이 행하는 선에 의하여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해지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선함의 외양만으로 미혹당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들인가를 결정짓는 것은 우리가 섬기는 상전이 누구인가에 따른 것이다.
둘째, 두 상전을 섬기는 조건 - 한쪽은 ‘삯’이요, 다른 한쪽은 ‘은사’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 삯보다 ‘배급’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사도가 사용한 말은 로마시대 군인과 노예들에게 주어졌던 배급에 쓰였던 말이다. 그것은 벌어들인 것이고 응당 받을 것이다. 곧 죄의 배급이다. 율법은 그런 삶과 행위의 결과로 돌아갈 것을 아주 명백하게 설정해 놓았다.(롬5:20-,4:15,8:2) 율법, 죄, 사망은 언제나 함께 간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15:56)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히2:2)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율법이 냉혹한 법적인 방식으로 결정한 삯과 배급을 가지고 있다. 죄를 짓는 영혼은 죽으리라고 율법은 천명하고 있다. 그것이 주어지고 받은 할당량이고 공변된 보응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은사’ ‘값없는 은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정반대이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은혜는 공로에 따라 베풀어지는 은총이 아니며 전혀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진 자비이다. 이것은 시종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원리이다. 그것은 5:21 이후에 우리 앞에 있는 죄와 은혜 사이에 있는 큰 대조 중 가장 영광스러운 국면이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과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하고 있으며, 그것이 전체 구원 방식의 진리이다. 사도는 1:16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셋째, 이르게 되는 마지막 - 죄는 불순종-불의-부정과 불법 단계를 거치며 죄의 노예는 언제나 그 노선을 따라간다. 죄가 이르게 되는 결국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의 의미는 모든 형태의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며 사람이 불순종하는 순간 영적, 육체적으로 죽게 되었다. 사도는 죄의 노예가 얻는 결과를 ‘부정과 불법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여 왔으나, 이제 그는 그것의 최종적인 결과, 궁극적인 운명이 사망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죄의 삯, 죄가 이르게 되는 마지막은 ‘둘째 사망’이다.(계20:)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분리를 의미하며, 그것은 하나님이 없는 자의 궁극적인 운명이다. 그것은 ‘불못과 유황못’에 던져지는 것이고 사망과 음부가 거기에 던져지고, 짐승과 마귀 자신도 던져지게 된다. 그것은 죄의 노예들이 가는 종착역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노예들의 마지막은 ‘영생’이다. 그것은 다른 이들과 같이 계속 존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생은 특별히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17:3) 그것이 참된 삶이다. 단순히 하나님의 관하여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복됨과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거룩함과, 없어지지 않을 영광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계속 존재할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우리가 계속 하나님의 존전에서 살아가고, ‘하나님을 보며’, ‘어린 양의 빛 안에서’ 살고, 영원히 거룩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결국 영화롭게 될 것이며 우리의 복된 주님과 같아질 것이다.(요3:1-2)
사도는 딤후4:8에서 그것이 ‘면류관을 받을’ 것임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러분과 저는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완전 성화이다. 우리는 ‘점도 티도 주름잡힌 것이나 그런 것들이 없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 황홀한 정경을 즐길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죄가 없을 것이고 탄식함이나 슬픔이나 눈물이나 이별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섞이지 않는 절대적인 영광이요,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 자신의 완전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담까지도 누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영생은 이 세상에서 시작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영생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였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그것을 받으려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 이 땅에서 먼저 구원을 맛보았으나, 그것의 충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 대조점은 셋이다. 곧 두 상전, 두 섬김의 조건, 우리가 도달할 목적지이다. 사도는 대조를 묘사하고 난 뒤에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이것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고 묻는 것 같다. 또 다시 한번 복되신 이름 -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 이란 말을 한다. 사도는 이 말을 하지 않고서는 말을 끝낼 수 없다. 그는 결코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이 우리에게 온 길과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었던 길을 상기시키는 것을 빠뜨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 주님을 잊고서 분류를 마치지 않는가? 우리는 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것인데 말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 그로 ‘말미암아’ 서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제공되고 약속된 복된 장래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은 그리스도 그분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다. 그리고 우리와 그리스도를 연합시키신다. 그것은 이 6장의 교리의 큰 테마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게 하려 하심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는 그와 연합되어 그 안에 있다.
때문에 바울은 추론들을 끌어낸 것이다.
첫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었으며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죄는 더 이상 권세와 통치와 지배권을 우리에게 행사하지 못한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다. 그리고 우리는 믿는 우리에게 대한 그의 능력이 지극히 크심을 안다. 그는 창세 전에 나를 아셨고, 나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안에 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있으며, 나는 그 안에 있다. 그는 포도나무요, 나는 가지이다. 그는 머리요,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이다. 그분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받고, 그 안에 있는 성령이 우리 안에도 계신다.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고 안내하고 지시하고 가게 하신다. 또한 우리를 성경으로 인도하여 주시고 우리의 이해하는 힘을 열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열으신다. 우리로 거룩함을 이루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그것은 그와 연합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들로 하여금 주름잡힌 것이나 그러한 것들이 없는, 완전하고 점없고 죄없게 될 그 영광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설교가 사람들로 하여금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라고 추측하게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으며, 사단의 노예이며 이 세상 신에 의해 눈먼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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