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 12:1-2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기자의 강력한 권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였지만,
율법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그 율법에 따라 제사를 드리면서도,
그들의 시선과 관심은 세상과 그 소유물과 쾌락으로 향했다.
우리의 시선과 관심이 어디로 향하느냐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바라보게 마련이다.
바라보면서 그것을 구하고 탐하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어느 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은 무화(無化)시킨다는 뜻도 된다.
두 가지를 동시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의 책 제목이 ‘존재와 무’인데 바로 그러한 뜻이다.
사람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재물도 섬기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 없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비웃거늘”(눅16:13-14)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겠지요.
이 주인을 사랑하게 되면 자연히 다른 주인은 미워하게 되겠지요.
한 주인을 중히 여기게 되면 자연히 다른 주인은 경히 여기게 되겠지요.
그와 같이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해서, 이 모든 말씀을 비웃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도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로 바리새인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고 싶어한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오늘날 우리 대부분의 교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서 교훈을 받아야 한다.
구약백성이나 신약백성이나,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산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과 벗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하신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4:4)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우리를 구원하셔서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돌이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를 바라볼 때 하나님을 보는 것이요,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는 우리에게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이기 때문에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1. 예수는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이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예수는 우리 믿음의 주님이시다.
우리가 믿는 주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예수를 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예수를 주로 믿고 주로 영접하였다면, 다른 것이 주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나도, 세상도, 돈도, 재물도, 사람도,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의 주만 섬기고 다른 것을 섬김으로 그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
예수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이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믿음의 주 하나님이 되신 것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분을 주 하나님으로 믿는 만큼 그분을 닮고 그분과 같이 온전하게 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성품과 삶이 온전해 지기를 원하시고, 온전해지도록 주관하시고 역사하신다.
믿음의 주가 되시고서 무책임하게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우리가 바로 믿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 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녀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13:5-6)
돈을 사랑하면 주님을 바라보지 않게 된다.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여기지 아니하면 마음에 평안을 갖기 어렵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신다.
그러니 우리는 담대하게 생각하고 말하며 살아야 한다.
“주님이 나를 돕는 이시니 어떤 형편도 어떤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라고 선언해야 한다.
힘있는 사람을 무서워하면 그는 종처럼 사람을 부릴려고 할 것이다.
나를 돕는 분이 주님이시니, 우리는 불의한 일에 대해서는, 담대하게 아니라 해야 하고
정직하고 의로운 일에 대해서는, 담대하게 예라고 해야 한다.
돈이나 재물이, 권력이나 힘이 정의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담대해져야 한다.
이러한 믿음의 담대함을 통해서 우리의 성품과 삶은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매사에 주님을 믿는 우리가 주님의 법도와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이 될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3%만 의식화하면 나라 전체를 공산화 시킬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20%, 10%라고 자랑하면서도 세상에서 소금 역할, 빛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교회와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수를 주로 믿는다면 우리는 주님과 같이 온전해지는 길을 가야 한다.
복과 형통이 우선이 되고 목적이 되는 곳에서는
탐욕과 악독이 성품과 삶을 일그러뜨릴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만큼 우리의 성품과 삶이 온전해지기를 주님은 원하신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볼 수 없다.(히12:14)
주께 소망을 두는 자마다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깨끗이 하여야 한다.
2. 예수는 십자가를 참으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성자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사람으로서 그분도 고난을 통해 온전해지셨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2:10)
만물이 그를 위하여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
그런데 그분이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그분이 구원의 창시자로서 본을 보여,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셨다.
하물며 죄많은 우리가 고난을 피할려고 하고 무서워하고 세상 방법으로 해결할려고 하면,
우리는 결코 온전해질 수가 없을 것이다.
고난을 통해 온전해 지는 과정 없이 형통과 복을 약속하는 자들은 사탄의 하수인들이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그분이 어떻게 온전하게 되었는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그 고난의 과정, 연단의 과정을 통해 그분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그냥 고난을, 십자가를, 참는 것이 아니다.
그 앞에 있는 기쁨, 앞으로 우리가 받을 영광, 앉게 될 보좌 우편을 위해, 참는 것이다.
많은 아들들이 영광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주님이 친히 고난을 통해 온전해지는 본을 보이셨다.
고난을 통해 온전이 이루어지고, 온전을 통해 영광의 축복이 이루어진다.
고난, 온전, 영광! 이것이 순서이다.
고난과 온전을 생략하고 영광과 축복을 말하는 감언이설에 속지 말라.
그들은 그 앞에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우리 주님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이요, 욕되게 하는 자들이다.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 고난 속에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참아야 한다.
그 고난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아야 한다.
그 결과, 하나님 보좌 우편의 영광에 앉게 됨을 믿고 소망해야 한다.
3. 우리도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해야 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13:1)
믿음의 길은 항상 고난을 통해 온전해지는 길이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요셉도 다윗도, 기독교 역사에도,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도 이 허다한 증인들을 본받아 믿음의 길이요 온전해지는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은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믿음의 경주이다.
경주를 잘할려면 모든 무거운 것들을 내려 놔야 하고, 얽매이기 쉬운 죄들을 벗어버려야 한다.
미친년처럼 이고 지고 끌어안은 것이 많아가지고서는 달려갈 수 없을 것이다.
나를 위한다고 여기고 끼고 살던 모든 무거운 것들을 내려놔야 한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 욕심과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
어때요? 우리도 이런 자세로 달려가야 하지 않겠어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시 일깨워, 부름의 상을 향하여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자.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닌 것이 분명하니까요.
온전해지기 위한 고난의 인내가 영광을 이룬다.
베드로 사도도 동일한 뜻을 다른 표현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준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5:10)
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다.
그리고는 우리를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다.
영원한 영광이다.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영광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다.
그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우리를, 고난을 통해 친히 온전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우리가 받는 고난은 잠깐이라고 하신다.
잠깐 고난을 당한 우리를, 그 고난을 통해,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겪은 고난의 세월들을 돌아보면,
그 고난들을 통해, 친히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그전보다 우리는 온전하게 되고, 굳건해지고 강하게 되고 터가 견고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 광야의 고난 끝에, 마침내, 영광이 기다리고 가나안 기업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
구원의 창시자로서 그분이 친히 고난과 온전과 영광의 본을 보이셨다.
그리고서 우리 더러 그 자취를 따라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0-21)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
그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
그리고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 고난과 연단의 과정을 통해 온전하게 되고 영광에 오른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있다.
이제 우리도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잘 달려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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