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일 3: 21-24
사랑은 믿음에서 나오고,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믿음이 고장나면 사랑이 없어지고, 사랑이 없으면 그 믿음 또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사랑할 때 사람의 마음은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 자신부터 긴장하게 되고 평화를 잃게 된다.
나의 긴장은 공격으로 나타나고 상대방의 긴장과 공격을 불러온다.
원수 갚는 것은 주께 있다고 하셨으니, 분하고 억울한 마음은 속히 진정하는 것이,
내 마음의 천국과 평화를 지키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사람이 억지로 지어먹은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한다.
오래 가는 사랑, 변치 않는 사랑은, 믿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을 때, 하나님으로 우리 마음을 채울 때,
우리의 이웃을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세상에 사랑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가 많고 교인이 많은데도 사랑이 없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껍데기요 헛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메마르다면, 그 원천이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부터 점검해 보아야 한다.
1. 그의 계명은 아들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3:23)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면,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는 항상 붙어다니는 것이다.(살전1:3)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다.(고전13:13)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다.(롬13:10)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믿음으로 역사하는 사랑으로 세운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6)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가 몸된 교회의 머리이시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된다.
그 몸을 이루는 우리 지체들은 서로 연결 마디가 있어야 하고 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 연결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야 한다.
슬그머니 왔다가 사라지는 교인들은 연결 마디가 없어 그 몸으로 결합될 수가 없다.
교회는 그 몸을 이루는 지체들끼리 서로 연결 마디가 되어 결합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교회의 연결 마디이고 고리인 줄 알았는데, 여러 이유를 대며 사라지는 사람들을 보아왔다.
진정한 연결 마디가 아니었음을 알게 해줄 뿐이다.
그 시련을 통해 교회는 그 뿌리가 견고해지고 그 몸이 더욱 튼튼하게 성장하는 것을 믿는다.
교회는 각 지체들이 자기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고
서로의 연결된 사랑으로 세워져가는 것이다.
자기의 믿음의 분량대로 역사하지 않으면, 서로의 사랑이 없으면, 교회는 자라지 못한다.
내 육친의 부모형제보다 더 사랑해야 하는 것이 교회 마디들끼리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생을 함께 할 사람들은 바로 마디를 형성한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부모 형제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7-38)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주께서 사랑하는 형제들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불렀다.
베드로도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한다.(벧전1:22)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몸을 이루는 지체들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주님은 성도들을 박해하는 사울에게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셨다.(행9:4)
하나님은 자기의 성도들을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고 보호하신다.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2:8)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32:10)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아들의 이름들에 그분의 인격과 사역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였다.
그분은 주 하나님이시요, 만왕의 왕이신 메시야 그리스도시요, 성자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분은 자기의 백성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이시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이신 것이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완전한 사람인 것을 믿는 것이다.
그분이 메시야로 오셔서 십자가가에서 이루신 구원 사역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만왕의 왕으로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심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계명대로, 먼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그와 같은 마음으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주님의 계명이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끼리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 이웃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행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면,
그분의 성품과 삶을 닮아야 할 것이고, 그분의 향기를 나타내야 한다.
악취를 풍기는 교인들은 그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2.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신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신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8:9)
성령은 성령 하나님으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는 독립된 위격이시다.
그렇지만 성경은 또한, 성령은 아들의 영이시면서, 그리스도의 영이심을 말씀해 주신다.
성령은 또한 아버지 하나님의 영이심을 말씀해 주신다.
성경의 계시를 통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는 알 뿐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 안에 계시고, 아들 하나님도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는 것이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의 영광은 주 안에 거하고 주님은 그의 안에 계신다는 영광이다.
그가 우리에게 주신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이다.
지체들끼리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만유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는 영광보다
더 한 것이 있겠는가?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느니라”(골3:11)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시103:19)
세상의 권력자들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만유,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은 그리스도시요 주 하나님이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셨다.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분도 그분이신다.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을 앞에 놓고, 천국과 지옥의 운명을 가르는 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만유의 주인이시고 만유를 통치하시는 그분이
서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 안에 거하시고 그분 안에 거하게 하신다고 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계명인지 다시 마음에 새겨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전13:4-6)
이렇게 서로 사랑할려고 마음을 다하는 이들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은 그 안에 거하신다.
만유이시고 만유 안에 계시고 만유를 통치하고 심판하시는 그분이
우리 마음에 편안히 거하실 수 있도록 더욱 서로 사랑하자,
그리고 그 사랑으로 그분의 몸인 교회를 세워가자.
3.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담대함을 얻고 구하는 바를 무엇이든지 받는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축복의 약속이 있다.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는다는 축복의 약속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1-22)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면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주님 앞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은 책망할 것이 없게 되고,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할 때 담대하게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게 되고
그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게 된다는 축복의 약속이다.
사랑해서 좋고, 영광과 축복이 함께 하니 좋다.
주님의 계명을 지켜, 서로 사랑하면 그것이 바로 천국이요,
주님이 그 안에, 그 안에 주님이 계시는 영광이요,
담대하게 무엇을 구하든지 받으니 응답의 축복이다.
주님을 마음으로 사랑하지도 않고, 형제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탐심만이 가득하여, 무엇을 구하든지 받는다는 문장에만 눈독을 드린다.
마음에 죄악을 품은 자들은 주께서 들을 리가 없고(시66:18),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않으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다(잠28:9)고 하였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는다는 것은 사랑의 실천과 주님의 거룩한 영광에 일치하는 것이요,
구하여 받는 것은 우리 자신의 영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 관계에 있어서 대전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4-15)
왜 그런가?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신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연합함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머리이신 주님과, 목숨을 버려 사신 그 몸의 지체들은, 뗄레야 뗄 수가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우리가 먼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하셨다.
우리가 아는 사랑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어 그 사랑으로 같은 믿음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 하나 우리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받고 행하는 것이다.
주님의 우리 사랑이 먼저요, 그 다음은 우리의 주님 사랑이요,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그리스도인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는 형제사랑이다.
서로 사랑의 실천적인 문제를 사도 요한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요일3:17-19)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이루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 사랑하자.
서로 사랑하는 것만이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될 것이고,
그 사랑만이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고 담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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