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호튼,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김재영역), 1996, 2009(7쇄), 나침반출판사
차례 ---------------------------------------
이 책의 저술 동기/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
제1장
민주주의의 시녀가 된 하나님
제2장
실용주의적 복음주의
제3장
소비자 중심주의
제4장
구원으로부터 자기 존중으로
제5장
감정 중심의 신앙
제6장
이교도(異敎徒)로의 복귀
재7장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제8장
공동체의 상실
역자후기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
“복음주의를 파괴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복음주의라는 명목만을 가진 복음주의다.”- 프란시스 쉐퍼
옛날에 한 임금님이 살았는데 세상의 다른 어떤 임금들보다 자기가 더 좋은 옷을 입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 나라의 모든 재단사들에게 임금의 옷으로 가장 품위 있고 멋있는 옷을 만들도록 분부했고 만약 자기를 실망시키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처형하겠다고 엄명을 했다.
드디어 왕실 전속 재단사가 그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이 완성되었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보석으로 장식된 옷 상자를 열기 전에 그 재단사는 임금님과 조정의 신하들에게 이 옷은 지혜 있는 사람들에게만 보인다고 말했다. 임금님은 자가 지혜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히고 싶지 않아서 사실은 자신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옷이 보이는 듯 큰 소리로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임금님의 주문은 완벽하게 충족되었다.
그 다음날 임금님은 새 옷을 입고 그 옷을 과시하면서 도성 거리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지혜있는 자만이 임금님의 새 옷을 볼 수 있다는 소문을 들은 거리의 백성들은 자기들에게도 임금임의 새 옷이 보이는 것처럼 옷의 아름다움에 열광한 듯 환성을 질렀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아이 하나가 임금님의 행렬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임금님은 아무것도 입지 않으셨잖아요. 임금님은 벌거벗었네요!” 하고 외쳤다. 순간 백성들의 환호는 사라지고 어쩌다가 말을 뱉어버린 이 순진한 어린아이에게 그들은 따가운 눈총을 보내며 말을 더 이상 하지 못하도록 그 아이를 제지하기 위해 몰려갔다.(안델센 동화)
왜 사람들은 어떤 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사실인 것처럼 주장하는지 의아하다. 어떻게 사람들은 지혜로운 것보다는 어리석은 것에, 지식을 추구하기보다는 무지를 좇아가는 것일까? 근자에 나는 “임금님이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느 시점에서 터뜨리는 것이 안전할까 생각하곤 한다. 낙태 반대 운동이 상당한 지지를 얻기 전까지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성가스럽고 위협적인 인물로 낙인 찍혔다. 쉐퍼는 우리에게서 복음적 기독교를 파괴시키고 손상시키는 것은 다름아닌 복음주의라는 명목만을 가진 잘못된 복음주의임을 경고했고(‘20세기말의 교회’), 또한 오늘날 기독교가 우리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 되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호나 만족시켜 주는 대용품으로 전락하고 천박해졌으며 피상적으로 되어가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 계속 개혁해 나가야 한다”는 개혁주의 운동은 개혁을 회피하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에는 너무나 거만해진 공허한 보수주의로 굳어져 가고 있다.
복음주의 기관이나 교회들은 교인의 숫자가 늘고 자기네들이 발행하고 있는 신문의 부수가 늘거나 정치적인 영향력이 커지며 물질적으로 번창하는 것과 같은 세상적인 성공에 만족하고 있다. 그것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사실을 사실대로 아야기하여 각성을 촉구하는 용기를 택하기보다는 임금님이 마치 새 옷을 입고 있는 양 열광하며 환성을 지르고 있는 상황이나 무엇이 다를 바 있겠는가. 사실을 사실대로 시인할 경우 닥쳐올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자주 교회가 개혁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러나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다. 기독교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나 주장들이 검증 받아야 하는 것처럼 똑같이 검증을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한다. 만약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지느냐 혹은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 혹은 얼마나 중요한 체험 등을 제공하느냐로 기독교의 성패가 좌우된다면, 그런 식의 성공관은 성경적 기준과 판단에 비추어 보아서 분명히 잘못된 것임을 지적받아야 한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진리인가 아닌가는 하는 시금석은 다른 데 있다. 종국에는 기독교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 현실을 옳게 설명하고 있느냐 하는 점에 그 기준을 두어야 할 것이다. 만약 기독교가 이러한 의미에서 진리라면 이 책과 같은 책이 결코 기독교를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세 교회처럼 오늘날 복음주의는 자주 복음주의를 비판하는 자들을 침묵시키기 위하여 성령의 하나됨의 원리를 악용하고 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 우리는 이 말씀을 교리적 논의나 논쟁은 위험하다는 식으로 이해해 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하나된 기준이 어떤 공통적인 경험에 기초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통적인 경험은 자주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십시요”라든지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에 영접하십시요”라든지 ”예수님이 당신을 지배하도록 하십시요“라는 구호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런 생각들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우리는 같은 편이고 따라서 신뢰할 수 있다는 정도의 표지(標識) 역할을 할 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는 올바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올바르게 생각을 하려면 “비판”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명했을 때, 도대체 그는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는가?
첫째, 사도 바울은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임을 상기시키고 있다(엡4:4,5).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 외에 우리 믿는 자들의 공통의 소망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 한 분 하나님을 예배드리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하나이어야 한다. 우리가 동일한 믿음,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동일한 신조(信條)를 갖고 있지 않고 성령 안에서 하나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 인간, 구원 혹은 예수님의 인성(人性) 등에 관하여 우리가 어떻게 믿고 고백하는가와 상관없이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세례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4:13,14).
초대교회 성도들이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들이 배교하지 않고 순교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서로 다른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순교할 수 있었던 그 능력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동일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같은 언어, 같은 문화를 가졌기 때문도 아니다. 그 무자비한 압제와 공포 앞에서도 죽음까지도 함께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그들의 동일한 믿음, 동일한 신앙고백 때문이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교회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대해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성도가 무엇을 근거로 한 몸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점점 더 분명하게 정의를 내리고 입장을 밝혀왔다. 니케아 신조, 칼케돈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경, 그리고 우리가 매주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 등이 이런 목적 때문에 작성되었다.
오늘날, WCC(세계 교회 협의회)는 “신앙고백은 달라도 하나님 나라는 함께 건설해 나갈 수 있다. 교리를 너무 주장하면 기독교계는 분열되고, 세상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사역에 초점을 맞추면 기독교계는 하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WCC의 한 고위 책임자는, 어느 날 내게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 현상이 실제 일어나고 있음을 인정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 현장에 뛰어 들어가 일하다 보면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것은 교리이다. 교리를 무시한 채 사역의 전략에 초점을 맞추 일하다 보면 오히려 하나되지 못하고 갈등을 빚게 된다. 우리가 교리에 대해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함께 일할 수 있다고”고 고백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처럼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우리는 “교리는 우리를 분열시키지만 신앙의 경험은 우리를 하나되게 한다”는 식의 공식을 마음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정통) 기독교는 이러한 피상적인 하나됨에 타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는 식의 설교만 하고 진리를 무시한 거짓 선지자들을 보면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경고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6:14).
만약 교회가 하나됨의 근거로 기독교 진리가 그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대안적인 기초도 기독교인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결코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죠지 마스던은 “미국의 복음주의는 마치 중세의 봉건 제도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동일한 대상(그리스도인들 또는 예비 그리스도인들)을 목표로 삼아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한편으로는 외견상 서로 서로 우호적인 연합을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경쟁하는 제후국들을 형성한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봉건 제후들은 한 사람의 왕에게 신하로서의 충성을 맹세한다”고 말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
기독교 잡지의 수많은 글들과 기독교 서적 그리고 기독교 계통 방송과 TV에서 방영되는 수많은 기사와 프로들을 통해서 우리는 복음주의가 얼마나 급성장하고 열정과 흥분으로 넘쳐 흐르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미국 복음주의권은 방송망, 출판사, 광고 대행업, 위락 시설들을 갖춘 관광지 그리고 유람선까지 자체적으로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복음주의의 마케팅이 성공하자 이러한 복음주의의 성장을 하나의 영적인 부흥으로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여론 조사가인 죠지 바나와 윌리암 메케이에 의하면, “수백만 달러를 라디오, TV등을 통한 미디어 사역과 전도를 위한 출판물에 투자하는 데도 불구하고 지난 5년간 기독교의 실질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평가하고 있다.
1976년도에는 미국 건국 200주년 기념의 해가 아니라 개신교 정통파인 “복음주의의 해”라고 뉴스위크는 썼다. 보수파에 속하는 레이건 대통령의 당선과 재선 덕분에 복음주의 운동은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자신감에 들떠 있는 목사들은 만약 우리가 자기네들의 지시대로 따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고 다시 들어 쓰실 것이라고 설교했다. 얼마 전, 죠지 부시가 대통령 선거에서 클린턴에게 패하기 전까지는 공화당원들에게는 하나님은 자신들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일종의 마스코트와 같은 것이었다.
여론 조사가인 루이스 해리스는 이제 미국 국민들은 공직에 선출된 복음주의 신자들과 TV에 나오는 몇몇 유명한 목사들이 연루되어 있는 추문(醜聞)으로 식상하게 되어 그리스도인 공직자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유명한 연구 기관인 「옥스포드 분석」에 따르면 최근에 기독교계가 부흥하고 있다고 이야기들 하고 있지만 말뿐이지 실질적으로는 제시할 만한 근거가 없다고 지적한다. “인상적인 통계 수치 그리고 외견상의 놀란만한 부흥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기독교는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하고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하에 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에 관한 지표들은 하향 곡선을 긋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권력, 인기 그리고 성장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과 환상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내에 성공에 대한 건전하지 못한 선입견과 복음의 메시지보다는 방법론을, 진리보다는 기법을, 질보다는 양을 추구해 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마틴 마티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참된 신앙은 정확한 실체를 요구한다. 참된 신앙에는 사실과 다른 환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말과 행동이 달라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종교적 환성을 따라가기를 원한다면 동시에 우리는 그러한 종교적 환상에서 생길 수 있는 어떤 불화, 혼란, 그리고 반대도 각오해야 한다. 우리가 종교적인 잘못된 환상을 추구하고 세상적 가치관을 따라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종교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을 때, 그리고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우리가 참으로 영적이며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추켜세우는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에 만족해 할 때, 그때 우리는 가장 잘못되기 쉽다.”
로마서 12장2절은 우리에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지성)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명하고 있다. 기독교의 수많은 가르침과 노력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도록 하는 데 집중되고 있지만, 정작 성경은 우리의 우선적 과제가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들의 마음(지성)이 새롭게 변화되는 일은 요술과 같은 미신적인 기교나 혹은 피상적인 종교적 열심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진지하며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노력과 연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보다는 이 시대 정신에 의해 우리의 삶의 영역들이 더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 우리의 삶에 대한 건설적이며 비판적인 검토와 도전을 거부하며 우리가 경건한 체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일 것이다.
도날드 블뢰쉬는 다음과 같이 개탄하고 있다. “미국 기독교인들의 교회 생활 속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 중의 하나는 교리적이며 사도들로부터 전승되어 오고 있는 기독교의 본질적 내용들이 교회 안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내면적 영성의 개발이나 영혼 구원에 관해서는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종교개혁으로 재발견되고 그 가치가 새롭게 증거된 사도적 신앙에 대한 신뢰는 형편 없을 정도로 부족한 지경에 있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에 있어 진리의 위기는 복음주의적 교회 안에서까지도 대단히 심각한 상태에 있다. 그리고 부분적이나마 이렇게 된 책임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속 문화에 물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성경적 가르침들과, 복음주의적 기독교인인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시대 현실 사이의 관계를 검토하는 데 있다. 이론이나 실천 면에서 공히 사도적 신앙의 당당한 계승자로서의 복음주의로 복귀하는 복음주의 형제 자매들의 순례 여정에 나 스스로 동참하고자 한다.
블뢰쉬는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복음주의 신앙은 사도적 증거에 기초하고 펠라기우스주의와의 투쟁 과정에서 어거스틴에 의해서 재확인되고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에 의해 재발견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다. 이러한 역사적 복음주의는 오늘날 미국 기독교계에 참으로 심하게 침투되어 있는 관념화된 복음주의 혹은 세속 문화에 오염된 복음주의와는 명백히 구분되어야 한다.”
세상이 생명의 떡을 필요로 할 때 더 이상 위선자들의 은신처가 아닌, 더 이상 율법주의의 온상이 아닌 그런 소박하고 겸손한 교회를 세상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꿈꾸어 본다. 슬로건이나 천박한 독단이나 근거 없는 황당한 종교적 환상으로 국가적 영적 각성을 꾀하지 말고 세상을 향해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1:18) 하며 담대히 초대할 수 있는 그런 교회를 꿈꾸어 본다.
“시온에서 안일한(교만한) 상태”(암6:1)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화가 임할 날이 머지 않았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의 기호에 따라 눈이나 귀를 즐겁게 해주는 대중 종교의 옹호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기도해야겠다. 또한 열정적이며 자비로운 본래의 전통 신앙의 회복과 미국적 전승(傳承)으로가 아닌 기독교 진리들로 구성된 역사적 기독교의 연속성이 회복될 그 날을 위해 함께 기도하자.
- 同書, e-book, pp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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