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PURITAN), 이 말은 늘 묘사라기보다는 무기인 경우가 더 많았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가 던진 진흙에 맞아 우스꽝스러운 몰골이 되었는데도 시치미를 뚝 뗀 채 아무 일이 없다는 듯 점잔을 뺀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청교도’라는 말은 그런 말이다. 그러나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이 말은 가장 완벽한 신학적 영적 인증서를 지닌 황금의 단일팀을 묘사한 찬란한 말이다.
이 말은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된 직후에 욕설로 만든 말이었다. 잉글랜드의 보통 사람들이 볼 때, 한쪽에 가톨릭교를 믿는 ‘교황주의자’가 있다면 이와 정반대 극단에는 ‘엄격주의자’ 혹은 ‘청교도’가 있었다. 이는 곧 그들이 자신들을 다른 나머지 사람들보다 더 정결하다고 여기면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나는 너보다 더 거룩해’ 부류임을 암시했다. 이는 분명 공정한 묘사는 아니었다. 이런 말을 분명 자신들을 정결한 자라고 생각하지 않던 이들에게 적용했기 때문이다(청교도가 끊임없이 자신들의 죄악을 증언한 사실이 증명하듯이, 청교도는 결코 자신들을 정결한 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청교도라고 하는 사람들도 서로 달랐으며, 그 차이가 확연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들은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놓고도 의견을 달리했으며, 정확히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놓고도 의견을 달리할 수 있었다. 시인 존 밀턴은 누가 봐도 청교도였지만, 모든 기독교 신경이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는데도 이를 믿지 않았다.
청교도는 누구인가? 존 밀턴은 ‘종교개혁을 개혁하는 이들’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어쩌면 그가 한 말이 가장 좋은 정의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모든 청교도가 이구동성으로 추구하는 목표였기 때문이다. 청교도는 자신들이 정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 안과 그들 자신 안에서 아직 정결해지지 않은 것들을 정결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그들은 개혁을 원했다. 다른 생각들을 갖고 있었지만, 종교개혁을 아직 종교개혁이 미치지 않은 모든 것에 적용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종교개혁이 좋은 것이지만 아직 미완성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청교도를 이해할려면, 그들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들이 맞은 진흙부터 깨끗이 닦아내야 한다. 검은 옷을 입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째려보는 사람들이 아니다. 청교도를 그린 초상도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차림이 그들의 가장 훌륭한 주일 복장이었다. 그러나 청교도는 다른 날엔 무지게처럼 온갖 색깔 복장을 다 입었다. 가장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라 할 수 있는 존 오웬은 “머리에 분을 뿌리고, 값비싼 큰 머리띠용 실로 만든 삼베 머리띠를 하고, 벨벳 재킷을 입고, 무릎에는 리본으로 포인트를 준 승마용 바지를 입은 뒤, 삼베로 윗부분을 만든 에스파냐산 가죽 구두를 신은 채” 옥스퍼드를 활보하곤 했다. 그들은 완고하고 음침한 무리가 아니었다. “청교도는 결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결코 거친 모직 셔츠나 딱딱한 빵을 칭송하지는 않았다. 청교도는 좋은 음식과 좋은 술과 포근하고 안락한 것들을 좋아했다. 청교도는 모기에겐 웃어 주었지만, 맥주가 떨어져 물을 마셔야 할 때는 정말 괴로워했다.”
요컨대 모든 청교도가 이랬다고 말하려 하다간 자칫 오해를 낳을 것이다. 청교도 자체가 큰 무리였고, 그 안에는 종종 다양한 그룹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주 완고하고 음침한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의 청교도 법률가 윌리엄 프린은 “우리의 본보기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늘 슬퍼하시고 결코 웃지 않으셨다”고 쓸 정도였다. 하지만 청교도 가운데 삶 전체를 개혁하려고 열심을 내다가 그 열심 때문에 현학에 빠질 뻔했던 이들이 많았다는 말은 할 수 있겠다.
청교도를 오해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실제로 그들 전체를 하나로 묶어 주었던 한 가지 모습이다. 즉, 청교도는 성경과 성경공부와 설교 듣기를 열렬히 사랑했다. 듣고 또 듣는 말이지만, 청교도는 좋으면서도 긴 설교는 몇 시간이나 들어도 행복해했고, 좋은 성경 공부가 춤을 추며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 무려 일곱 시간에 걸친 설교도 귀를 기울여 들었다. 청교도를 길러낸 모판이었던 케임브리지 임마누엘 칼리지 학장이요 남달리 장수했던 로렌스 채더턴(1536-1640, 잉글랜드의 청교도 신학자로, 킹 제임스 성경 번역자 중 한 사람)은 일찍이 설교하다가 자신이 쉬지 않고 두 시간이나 설교했다며 회중에게 사과했다. 그랬더니 회중은 “천만에요, 계속하세요. 계속하세요!”라는 외침으로 대답했다.
성경이 스릴 넘치는 책이라는 사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볼 때, 이렇게 긴 설교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지루한 일이요, 아주 나쁘게 생각하면 미친 짓거리였다. 그러나 유럽에는 거의 천 년 동안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하나님 말씀을 읽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되 이 죄인들이 얼마나 제대로 참회했느냐를 기준으로 구원하시지 않고 오로지 당신 자신의 은혜로 구원을 베푸신다는 좋은 소식을 본다는 것은, 마치 지중해의 찬란한 햇빛이 죄가 뒤덮은 음울한 천지에 뚫고 들어오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마치 사람을 황홀경에 빠뜨리는 것처럼 매력 있고 근사한 일이었다.
실제로 그런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청교도를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 청교도에게는 성경이 이 세상 전체를 바꿀 수 없을 만큼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청교도주의는 성경의 유일한 권위를 앞세워 삶 전체를 개혁하려 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모든 권위 속에 집어넣으려 한 것이었다.
- 마이클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pp 23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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