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제사장과 제사장의 직분을 본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는 왕과 왕으로서의 능력을 본다. 죄의 사면과 정결하게 함과 의롭게 함은 제사장에게 속한 일이다. 죄 사람을 받은 자와 정결하게 된 자, 그리고 의롭게 된 자에게 복을 베푸는 것은 왕에게 속한 일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우리에게 생명이 왔으며 십자가의 심판으로부터 죄 사함과 의가 왔다는 것을 알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이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엡1:7) 받았다. 번제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의가 선포된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서 흘러넘치는 풍성한 복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경의 어디에서도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때때로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되는 구절은 실상 오히려 정반대의 주장을 선포한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왜냐하면 이 말씀은 사실 다음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범죄하였기 때문에 내줌이 되셨고, 우리로 의롭다 하신 것 때문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수 있었던 것은 의롭게 하시는 사역이 이미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분은 무덤의 권세 아래 계속 누워 계셨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가 주님의 교회의 의를 이미 완성하였다. 그래서 주님은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수 있었다. 죽음은 더 이상 주님을 지배할 수 없었다. 그 사역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빚이 완전히 지불되었고, 보증자는 자유롭게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셨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사망으로부터 일으키시면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고 무덤으로 끌로 내려 갔던 전가된 죄로부터 그분을 깨끗하게 하셨다.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딤전3:16)
주님의 부활은 주님을 의롭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롭게 되신 것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롬6:5)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음을 선포할 뿐이다. 주님의 피와 죽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속에 관한 한, 우리는 오직 십자가와만 관계해야 한다. 그것은 참으로 사망의 자리였으나,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생명의 자리이며 부활의 보증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 이렇게 덧 붙인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6:7). 성령께서는 여기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칭의를 가르쳐 주신다.
- 호라티우스 보나르, 「영원한 의」, pp 6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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