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의 글(박순용)
호라티우스 보나르의 책을 접해 본 사람들이라면 그의 글 속에 깊이 배어 있는 생기와 감동을 잘 알 것이다. 그가 복음의 능력과 생기로 충만했기 때문에 그가 남긴 글 속에서 우리는 금방 ‘살아 있는 글’, ‘이지적인’ 자극을 넘어 우리의 심령을 만지는 감동과 고전을 얻게 된다.
호라티우스 보나르는 이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의’가 있다고 외치고 있다. 그것으로 인한 영혼의 자유와 기쁨, 우러나오는 헌신과 거룩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될 내용을 호라티우스 보나르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으로 의로워질 수 있는가?”라는 난해한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명쾌한 응답을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어떻게 죄인들의 대속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다 이루었다”(요19:30)라는 말씀은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죄인들을 하나님 앞에서 제사적으로 온전하게, 그리고 법적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도록 하는 일을 ‘다 이루셨다’는 것임을 저자는 이 책에서 생동감 있게 전한다.
죄인된 인간의 대리자로서 죽임 당하신 그리스도는, 그의 거룩한 죽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에게 “의롭게 된 자들아, 거룩한 삶을 살라”라고 간곡하게 말씀하고 계시다고 저자는 전한다. 저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원한 의’가 있다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말라고 정감 어린 속삭임으로 말한다. 복음의 기초 위에서 더욱 풍성하고도 견고한 신앙과 삶을 세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은이 머리말
의롭게 하는 믿음은 세상을 이기게 한다
16세기의 각성한 ‘양심’은 전심을 다해 ‘하나님의 의’를 의지했다.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면서 그들은 정죄와 경건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즉시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발견했다. 그 정죄와 경건하지 못한 것은 오직 ‘의’를 통해서만 가라앉히고 해결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의’를 십자가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의는 인간적인 동시에 신적이다. 하나님이 양심의 구원과 생명의 칭의를 위해 인간에게 이 의를 제공하셨다. 천국의 안식처와 같은 한 마디, “다 이루었다”(요19:30)라는 말씀을 통해 지친 영혼들은 드디어 정착하고 새 힘을 얻는다. 수많은 상한 심령들이 그곳에서 치유와 평안을 찾는다.
칭의에 대한 지식은 첫째로 영적인 건강함의 진정한 원천, 즉 인간의 양심이 하나님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둘째로 영적인 건강함을 유지하는 것, 즉 양심을 의로운 상태로 계속 유지하는 것에 대하여 인간의 이성을 위한 새로운 사고를 제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위한 새로운 발견, 그 자체가 되었다.
그로 인한 열매는 개인의 건강한 신앙뿐만 아니라 새롭게 된 지성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순전한 예배로 나타났다. 그것은 곧 부활의 시대를 의미했다.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의 모임이 산 자들의 교회가 되었다. 기독교가 각성했으며, 다시 살아났다. 부활의 이슬이 먼 곳까지 널리, 고루 임하였다. 그리고 그 이슬은 지금도 여전히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다른 이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교리는, 1세기의 사도들과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을 하나로 이어 주는 연결 고리 중 하나이다. 종교개혁의 신조는 15세기라는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단번에 우리를 로마서의 세계로 인도해 간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법적이며 도덕적인 정결함이었다. 이 로마서를 통해 우리는 전가된 의와 본성적 의를 동시에 소유하게 된다. 전가된 의는 본성적 의의 뿌리요, 근간이다. 그러나 본성적 의가 없다면 전가된 의도 존재할 이유가 없다. 이 두 가지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면서 각각의 질서 속에 존재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1:17). ‘하나님의 의’라는 루터의 기반 위에 두 발을 견고하게 딛고 서 있는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평안으로 변화되어 교회 안에서 위대한 일들을 감당한다. 영적으로 건강하고 튼튼한 사람은 바로 루터처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떤 싸움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으며, 어떤 고난에도 지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행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출발해서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믿음으로 끝을 맺는다. ‘의롭다 하는’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다(요일5:4). 믿음으로 우리는 인간으로부터 ‘증거’를 얻는다(히11:2).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행10:43). 믿음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일하고 견뎌 내며 고난을 감당한다.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분께서 나타나시는 그날에 우리의 것이 될 의의 면류관을 얻는다(딤후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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