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죄를 보는 것과 예수님을 보는 것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12:10)
1. 죄와 예수님을 동시에 바라보게 하는 십자가
우리가 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대응할 수 있는 때는 오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알고 교제할 때뿐이다. 믿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이 없이 죄를 영적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 영혼은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죄책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는 예수님의 보혈도 바라보아야만 한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죄의 사악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십자가를 통해서 죄의 완전한 용서도 보여주는 것이다. 십자가에서처럼 죄와 예수님을 동시에 가장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우주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온 우주를 통틀어 죄를 가장 많아 짊어지시고, 죄에 대한 형벌을 가장 많이 받으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시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우리 대신 지옥의 모든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의 은혜의 그 무한한 깊이를, 우리는 얼마나 피상적으로만 선포하고 가르치는지! 예수님의 은혜의 무한한 깊이를 알고 십자가의 죽으심이 얼마나 보배롭고 강력한지를 체험해야만 풍성한 위로를 누릴 수 있고, 온전한 거룩에 도달할 수 있으며, 견고한 소망을 붙잡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요소이며, 사실상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선 우리의 죄가 완전하게 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셔야 했던 그 죄들을 반복해서 짓지 않도록,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지 않도록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죄와 예수님을 동시에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앙 여정에서 가장 거룩하고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 속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사실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기 전에는 결코 죄를 정확하게 볼 수 없으며, 죄의 존재와 죄책과 권세를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죄책과 저주받은 상태를 알아야만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을 영접하며 믿음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될 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에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악한 것인지를 깊이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은혜로 죄책과 압제와 저주로부터 얼마나 완전하고도 영원하게 구원받았는지를 분명히 확신하게 된다. 어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죄와, 빛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리스도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이런 믿음의 삶이야말로 신앙의 여정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이다.
2. 회개의 은혜
참된 회심의 필수요소인 참된 회개는 십자가에 대한 선명하고도 복음적인 이해와 분명한 믿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초기 단계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회개의 은혜는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는 은혜이기 때문에, 성장하고 성숙할수록 이전보다 덜 율법적인, 즉 복음적인 회개로 변하게 되어 있다. 이전에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회개였다면, 이후에는 천국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되는 회개로 변하게 된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참된 회개
본문의 말씀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를 믿음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죄로 인해 철저히 깨어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진실하고 거룩한 회개를 하게 된다는 진리이다. 이 놀라운 예언이 지금도 복음적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초기 단계의 회개는 그 출발이 율법적이고 그 특성이 노예적이다. 그러나 참된 회개는 설령 율법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복음으로 끝나게 된다. 가장 감미롭고 깊은 회개는 갈보리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지고 결국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하게 된다.
죄에 대한 슬픔을 가지고 있지만 그 슬픔이 좀 더 진보하여 복음적인 슬픔의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한 분들을 격려하려 한다. 죄에 대해서 지금 여러분이 느끼는 슬픔 속에는 율법적인 요소와, 종들이 느끼는 두려움, 영원한 형벌에 대한 공포가 많이 섞여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의 회개가 거짓된 것이며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모든 천사들이 여러분의 그런 회개를 기쁘게 지켜볼 것이다.
자, 여기서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고 여러분의 심령이 통회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진정으로, 또한 경건하게 회개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죄를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만한 성경적인 타당한 근거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참된 회개를 통하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회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보다 먼저 있어야한다. 물론 회개와 믿음이라는 두 가지 은혜는 각각 구별되는 성령의 은혜이지만, 영혼의 구원에 있어서는 모두 필수 불가결한 요소요, 반드시 함께 존재하는 은혜이다.
우리의 목표는 십자가 아래서 경험할 수 있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는 마음으로 바라보는데서 파생되는 좀 더 차원 높은 회개, 곧 복음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회개의 위대한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가장 온화하고 가장 거룩하며 가장 평안한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나 감정도 일어날 수 없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사악함을 뼈저리게 인식하면서 십자가 앞에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모든 아름다움, 모든 탁월함, 모든 영광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한 분 안에 총집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하여 아름다움을 창조하셨고, 사람에게 아름다움을 기뻐하는 마음을 주셨다. 만일 인간이 죄 없는 상태에 머물렀다면, 틀림없이 예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이 흘러나왔을 것이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다. 오히려 아름다움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죄이다. 사람은 아름다움을 풍부하게 가진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사람 자체가 완전한 아름다움이었다. 세상은 사람이 거하기에 딱 맞는 장소였다. 창조된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봄은 우리에게 의인의 부활을 가르쳐 준다. 여름은 의의 태양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풍부하고도 따뜻한 영향력 아래서 많은 열매를 맺고 성숙해 가는 신앙을 우리에게 상기 시켜 준다. 아름다운 가을은 은혜 안에서 무르익어 가는 성도들과 영광을 위해 준비되는 은혜를 상기시켜 준다. 겨울은 우리의 머리가 다 희어져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푸른 하늘은 천국의 순결함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광대한 대양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영원함과 능력의 상징이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한결같이 하나님을 증거한다. 세상에서 악한 것은 오직 사람뿐이다.
세상의 것들의 아름다움을 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아름다움을 신령한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영적인 빛 안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의로움과 불의함을 볼 수 있는지요! 그 분의 영적인 이름다움을 통해서 죄를 바라보게 되면, 마음에 한없는 겸손함이 심겨져서 마음이 철저히 낮아지고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면 선지자 이사야처럼 절규하지 않겠는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우리를 낮추고 겸손하게 하여 예수님의 발아래 끊어 엎드리게 만드는 데는 우리 주 예수님을 선명하게 아는 것만큼 좋은 약이 없다. 십자가 서있는 곳은 너무나 밝기 때문에 우리의 죄악이 보이지 않을 수 없고, 그곳은 너무나 순결한 곳이기에 우리의 죄악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곳은 너무나 은혜로운 곳이기에 우리의 죄악이 용서되었음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죄가 자신을 가리기 위하여 뒤집어 쓰고 있는 위장을 모두 벗기고, 죄가 우리를 현혹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모든 궤변을 분리시키고, 죄의 원인이 되는 것들을 끊어 버리고서 죄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보게 된다. 죄의 모습 그대로 적나라하게 볼 때, 완악한 마음이 녹아내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깊고도 거룩하며 철저한 회개로 들어가게 된다.
3)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라볼 때, 죄에 대한 거룩한 회개가 본질적으로 촉진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빛이 아무도 가까이 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듯이, 그리스도의 수난도 아무도 근접해 본적도 없고 근접할 수도 없는 수난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절규하셨을 때 겪으셨던 예수님의 고통, “할 수만 있으면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셨던 그 쓴잔이 어떤 것인지를 이 세상 어느 누가 정확히 알 수 있을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신 주님의 고통을 이 세상 어느 누가 정확히 알 수 있을까? 기껏해야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모든 질고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담당하셨다는 것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여이고 슬픔과 고통으로 눈이 짓무른 사람을 바라볼 때, 어떻게 아무런 느낌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마음에 어떤 감정이 일어나야 마땅하겠는가? 당연히 가장 깊은 부끄러움과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생각이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십자가에서 극한 고통을 당하실 때 태양은 자기의 얼굴을 가렸고 하늘은 슬퍼 울었으며, 땅은 진동하였고 바위는 갈라졌으며, 무덤들은 활짝 열렸다. 그 놀라운 광경 앞에서 만물이 그런 식으로 공감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무감각하고도 완고하며, 또 얼마나 냉랭한지요!
만일 우리가 십자가 아래 서게 된다면, 틀림없이 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만 죄를 참으로 알 수 있다.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알아야만 십자가에 못 박힌 죄를 알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의 깊이를 어느 정도 알아야만 우리의 사악함의 깊이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반드시 십자가를 친밀하고도 인격적으로 알아야만 한다.
죄의 능력과 독재와 침식으로부터 돌아서서,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라! 나아가 그 옆에 서 있으라! 눈을 들어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한 번 바라보는 그 일이, 우리의 죄 때문에 창에 찔리신 구주를 희미하게 한 번 바라보는 그 일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고 피 흘리며 죽어 가시는 그리스도를 한 번 바라보는 그 일이, 죄의 관한 여러분의 관점과 감정을 완전히 새롭게 할 것이다. 죄의 사악함과 비열함, 죄의 비참한 결과가 그리고 동시에 속죄의 무한한 적합성과 구속의 무한한 존귀함, 죄 사함의 무한한 완전함, 주님의 보혈의 무한한 능력이 부각될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율법의 의무에 매달려서 종교적인 의무를 성실하게 준행해 왔다. 그러나 여러분의 심령에는 아직도 평강이 없다면, 그 원인은 아직까지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화려한 예배당 안에서 예수님을 찾으려 했고, 멋진 예배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려 했으며, 많은 헌금 속에서 예수님을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지위와 부와 영향력이 있는 경건한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강력하게 역사하는 어떤 힘에 이끌려서, 찾는 이도 별로 없는 길로 들어서서 참혹한 가난과 버림받음이 있는 십자가에서, 철저한 겸손과 슬픔, 고난과 피 흘림과 사망이 드리워진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찾게 된 것이다. 바로 그 곳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평강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이제 십자가 아래서 여러분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제 여러분은 십자가 아래 엎드린 사람이요, 구원받은 죄인이다.
4)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의 마음을 가장 깊이 감동시키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고난을 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대상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고 가장 참혹한 죽음까지도 자청하는 예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가장 거룩하고 가장 섬세하면서도 가장 강렬한 사랑이며 가장 오래된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모든 놀라운 일은 오직 사랑만이 그 모든 일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십자가는 성육신하신 그 사랑이 못 박힌 곳이요, 그 사랑이 슬퍼하고 피 흘리며 죽으신 곳이다. 바로 그 십자가 아래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녹아내리고 깊고도 참된 회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3.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은혜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바라본다고 할 때 거기에는 그리스도를 믿고 영적으로 이해하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도 깊은 감수성이 있기 때문에 감동을 받아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듭나지 않은 본성에서 나온 육신적인 눈물일 뿐이다. 거듭나지 않은 본성이 하는 일을 은혜의 역사로 착각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눈물샘이 자극을 받아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의 눈물로 착각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바라보는 눈은 믿음의 눈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며 영원한 세계를 들여다보고 장래의 일을 현재의 일로 만들 때, 우리의 완악한 마음이 녹아내려 회개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시내산 꼭대기에 내리쳤던 번개와 천둥보다도 믿는 마음으로 소박하고도 친밀하게 십자가를 한번 바라보는 것이 더욱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낮춘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세상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이제 사람들은 모세와 율법과 여러 제사로부터 눈을 돌릴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죄와 범죄로부터도 눈을 돌릴 것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그것을 주목해서 볼 것이다.
4. 참된 회개로 이끄는 믿음의 눈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깊은 회개의 특징)
첫째, 이런 회개는 그 본질이 복음적이다. 심령에서 우러나오는 정서이다. 이런 회개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그리스도로 가득하다. 이런 회개는 십자가 아래서 만개하는 한 송이 꽃과 같다.
둘째, 이런 회개는 그 본질이 거룩하다. 세상의 슬픔과 반대되는 경건한 슬픔이다. 우리 영혼이 가장 거룩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은 십자가 아래 있을 때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놀라운 광경 앞에서 마음이 녹아내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의 회개는 그 본질과 열매가 거룩할 수박에 없다.
셋째, 이런 회개는 매우 강렬하다. 인간의 영혼에서 우러나올 수 있는 가장 깊은 감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경험할 수 있다.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가문을 이어가고 재산을 물려받을 상속자, 그 장자를 잃은 아버지의 슬픔보다 더 강렬한 슬픔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엎드려 있는 영혼이 느끼는 슬픔은, 장자를 잃은 아버지의 슬픔보다 훨씬 더 깊고 통렬하다. 그 슬픔은 인간의 영적인 감정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흔들어 놓는다. 그 슬픔에는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깊은 죄책감이 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7:11)
넷째, 이런 회개는 기쁨의 예고편이다. 자신의 죄와 예수님을 동시에 바라보면, 우리의 심령 속에는 가장 깊고도 순결한 기쁨이 자리 잡게 된다. 경건한 슬픔의 눈물은 거룩한 기쁨을 싹트게 하는 씨앗이다. 눈물을 흘리며 이 귀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되어 있다.
우리의 죄가 모두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있다는 복음의 진리를 아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천국이 확실히 우리의 것임을 아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아, 이런 기쁨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1:8)이다.
오, 하나님, 우리의 목숨이 다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로 십자가 아래서 슬피 우는 자가 되게 하소서, 존귀하신 구주여, 우리의 죄와 악함을 보면서, 또 영원한 세상의 두려운 엄중함을 보면서 주님의 십자가에 의지하는 것 외에 제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나이까? 오, 주여, 죄 때문에 당하는 현재의 모든 슬픔을 변하게 하사 완전한 거룩으로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게 하소서. 그 복된 시간을 간절히 고대하고 고대하나이다.
“언제 안식을 누릴 수 있을까?
주님 계신 그곳에 나 있어 안전하면 좋으련만.
지금 안식을 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눈물을 닦아 주시는 손길을 느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런 불평이 어찌 내 맘에 있을까?
주님은 단 한 번도
날 위해 마지막 그 깊은 고통도 꺼린 적 없으신데.
내 어찌 작은 고난 때문에 주저앉으리!
오 주님. 주님 때문에 저는 참으로 안식을 누립니다.
그러니 주님.
제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 마음 놓고 제게 얹어 주옵소서.
주님은 항시 제게 자비하시고 신실하시며 진실하심을
나 이제 확실히 아오니
주님 날 위해 피 흘려 주셨는데 나 어찌 주님 위한 고통 피하리이까?
'윈슬로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십자가 아래서", 4장,십자가 아래서의 사랑(강의안4) (0) | 2016.07.03 |
---|---|
[스크랩]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십자가 아래서", 3장,십자가 아래서의 믿음(강의안3) (1) | 2016.07.03 |
[스크랩]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십자가 아래서", 1장, 십자가로 가까이 (0) | 2016.07.03 |
[스크랩]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통과해야만 거룩함과 온전한 성품을 이룬다/ 윈슬로우 (0) | 2015.10.15 |
[스크랩]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의 첫 번째 적은 잘못된 가르침이다/ 윈슬로우 (0) | 2015.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