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7/3 설교,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11:12

강대식 2016. 7. 3. 15:18

2016-07-03

본문: 11:12

제목: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시작되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세례 요한도, 주님도, 주님의 제자들도 똑같이 선포하였다.

 

우리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다.(12:28)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왜 천국이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침노를 당하느냐?

주님이 오심으로 시작되는 천국의 메시지를 처음 전하는 자가 세례 요한이었기 때문이다.

천국 복음의 길을 예비한 자는 오직 세례 요한 뿐이었다.

 

대제사장들도 아니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백성들도 아니었다.

종교의 이득과 그 단물을 빨아먹고 있으면서도 천국과 함께 오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자기들의 종교가 무너질까봐 그분을 신성모독으로 몰아 십자가 형에 처하였다.

 

역사상 이런 비극은 없다.

입술로 찬양으로 제사로 그토록 바라고 노래하던 메시야가 오셨는데,

막상 오시니까, 자기들의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고,

자기들의 손으로 메시야를 극형에 처하는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종교란 항상 당대의 힘있는 자들의 기득권과 야합하여 왔다.

그래야 위험이 없고, 상호협력하는 가운데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독일 히틀러 정권을 만세로 지지한 자들도, 일본 천황 정권을 만세로 지지한 자들도,

구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군사정권을 합법적인 권력으로 지지한 자들도,

항상 당대의 대교단들과 그 어르신들이었다.

 

진리 정의 거룩 이런 말들은 태평시대에나 립서비스로 읖즈리는 단어에 지나지 않았다.

막상 진리와 정의와 거룩이 침해를 받을 때 그들은 꿀먹은 벙어리 개가 되어 그 하수인 노릇을 하였다.

악한 정권의 악행은 항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진정성을 달아보는 시금석이었다.

 

청교도가 정권을 잡았을 때에는 많은 목사들이 청교도 신앙에 동조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1662년 왕정이 복고되고 새 법령이 선포되었을 때, 8천명의 목사들은 무조건 찬성했고,

청교도 신앙으로 맞서 이를 거부한 목사들은 전체 목사들의 5분의 1, 2천명이었다.

대신 그들은 자기들이 맡아 왔던 교구와 사택과 모든 사역을 포기하고 고난을 각오해야 했다.

 

기독교 역사상 예수를 가장 잘 믿은 청교도들의 시대였기에 이런 숫자와 비율이 나온 것이지,

어느 시대에나 나올 수 있는 숫자와 비율이 아니었다.

사사시대, 왕정시대, 포로 귀환시대, 중세 천년시대, 종교개혁 이후 지금. 가능한 숫자가 아니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성경과 계시로 알게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의 탐욕과 미신에 맞는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이다.

 

사사시대에도 구원하면 그때 뿐이었다.

구약시대에 선지자를 보내면 왕들과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선지자를 죽였다.

중세 천년 동안 순전한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불태워 죽였다.

 

지금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천국은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으리라.”

 

1. 천국을 침노하려면, 회개해야 한다.

 

세례 요한의 출현을 마태복음은 이렇게 전한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하였느니라”(3:1-3)

 

메시야가 오신다면 그 오실 길을 준비하고 그 오실 길을 곧게 할 사람이 누군가?

구약 4천년 동안 섬겨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과 왕과 귀족들이어야지 않겠는가?

그들은 어디 가고 없고, 오직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세례 요한 뿐이란 말인가?

 

그들은 메시야 구세주보다, 하나님보다, 세상의 권력과 부를 더 사랑하고 섬겼기 때문이다.

입술로는 성경을 따라 하나님과 메시야를 찬양하고 구하면서도,

실제로 그들이 구하는 것은 그분이 주시는 선물, 축복과 영광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제 일성은 회개하라!”이다.

주님 오심으로 천국이 가까이 왔는데 거기 들어가려면 회개부터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과 그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가지고서는 천국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영국에서 존 라일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다.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와 회심 없이도, 죄를 용서받고 훌륭한 교인들이 되고 있다. 거듭나지 않았어도,

구원받았다는 교인들로 교회는 차고 넘치고 있다. 천국은, 지옥 없이 선포되고 있다. 천국만 말할 뿐,

지옥은 말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예의처럼 상식처럼 되어 가고 있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지옥을 말하지 않고서는 천국을 말씀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성경은 덮어놓고,

넘치는 거짓 선지자들의 달콤한 위로와 평강에 잠들고 있다. 우리가 한 생각의 결과로 재앙을 받게 된다.

생각을 잘 해야 한다. 생각을 잘 할려면 하나님의 바른 율법을 들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도 회개를 강조하지 않는다.

치유와 회복과 축복과 번영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과 교회가 강조하는 것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새삼 놀랄 것도 없다. 종교와 세상은 항상 그래 왔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갈려면, 이 땅에서도 천국을 살려면, 회개해야 한다.

그동안의 사고방식 가치관 행위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그 열매가 없으면, 하나 마나고, 안한 것과 같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3:5-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아야 한다.

자복은 스스로 고백하고 복종하는 것이다.

고백한 후에는 그 죄를 짓지 않는 복종의 열매를 보여야 한다.

 

그런데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이 왔을 때 세례 요한은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3:7-10)

 

여러분은 지금 대교단과 그 지도자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할 수 있는가?

천국 복음을 제일 먼저 선포하고 주의 길을 예비하고 주의 길을 곧게 한 요한은 그렇게 했다.

진리가 어떤 것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면 그렇게 할 수 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돌들로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실 거다.

회개의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나무처럼 찍혀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이다.

 

왜 회개해야 하느냐?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맘씨 좋은 할아버지나 복주머니나 문제 해결사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하나님을 뵈올려면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죄를 가지고 그 앞에 갈 수는 없다.

우리의 죄와 형벌을 대신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증거와 열매가 회개이다.

의롭다 함을 받게 하는 것은 성령의 하시는 일이요,

그 결과 우리에게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 회개이다.

 

성령께서 내적으로 역사하시면 우리는 회심으로 그 회개의 열매를 나타낸다.

지구 중심으로 돌아가던 사람이 태양 중심으로,

세상 중심으로 돌아가던 사람이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난다.

 

생애 가운데 이런 전환이 점진적이든 극적이든 없었다면,

여러분은 아직 거듭나거나 회심하지 않은 것이다.

회심 없는 거듭남은 없기 때문이다. 거듭남은 필연적으로 회심을 낳는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

 

한 번의 회심이 다는 아니다. 출발일 뿐이다.

그러나 천국의 입문을 좌우하는 너무 귀중한 체험이다.

우리는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면서

끊임없이 짓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9-10)

 

2. 침노하려면, “침노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천국을 얻는 침노는 마치 무력으로 성을 빼앗기 위해 끈질기게 쳐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침노란 요한의 사역에 순종하고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의 열정과 열심을 의미한다.

침노는 거룩한 침노이다.

 

안팎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 달리고 씨름하며 싸우고 몸부림치는 거룩한 침노이다.

천국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천국을 얻으려 결단하는 것이다.

축복을 받지 않고서는 그 붙잡은 것을 결코 놓지 않는 야곱의 침노이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32:26).

 

침노는 거룩한 무력을 뜻한다.

거룩한 무력의 첫째 요소는 결연한 의지이다.

죄를 끊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다음에는 그 결연한 의지에 열정이 실려야 한다.

열정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런 믿음은 기름 없는 등잔과 같다.

그 다음에는 그 열정이 계속 지속되도록 힘찬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거룩한 무력으로 진리를 위해 싸울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의 진리를 무너뜨리려는 온갖 세력과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싸워서 지켜야 할만한 가치가 없는 진리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진리이다.

 

진리가 자신을 살리는 영이고, 생명인 것을 체험한 사람은,

이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건다.

이러한 체험과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진리를 살고 지키기 위해 목숨 걸지 않는다.

언제나 없는 것처럼 양보할 수 있고, 무시할 수 있고, 힘 앞에 굴복할 뿐이다.

 

바울은 진리의 복음이 그의 생명이었기에 자기 생명조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진리를 얻기 위해 그동안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다.

이것이 천국을 침노하는 사람들의 자세이다.

 

주님은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하셨다.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하셨다.

돈만 있으면, 권력만 있으면, 살 수 있는, 눈에 보이는 보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이 보화라고 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겉모양만 천국이고, 보화이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과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쉽게 가는 천국을 천국인 줄 알았다가는

그 문턱에 가고서야 천국이 아니고 지옥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쉽게 누구나 발견할 수 있고 조금 값만 치루면 살 수 있는 보화는 천국이 아니다.

 

천국의 보화는 밭에 감추어져 있다.

그것을 발견할려고 수고하고 애를 쓰고 찾아다니는 사람의 것이다.

천국은 결코 빈둥거리는 자들의 안일을 만족시키기 위해 계획된 것이 아니다.

 

수고하는 자들의 안식이 되도록 계획되었다.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날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해서 빼앗는 자의 것이었다.

 

3. 침노하려면, 침노에 힘써야 한다.

 

침노가 무엇인지 알았으면 그 침노에 힘써야 한다.

그것이 바로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요 침노하여 빼앗는 천국이다.

희생 없이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얻는 것은 보잘 것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가야 한다(고후7:1),

완전한 데로 나아가고”(6:2), “온전하게”(고후13:11) 되기를 힘써야 한다.

푯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을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

천국은 요한의 천국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고 세례를 받은 이들의 것이었다.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순종한 사람들은 천국에 있을 법하지 않은 천한 무리들이었다.

세리들과 창기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배척한 세례 요한의 복음을 믿었으므로

그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거기에서 쫓겨나고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은 낯선 복음을 듣고 순종하여 침노함으로 거기로 들어갔다.

 

히브리서 11장은 천국을 향해 거룩한 침노를 하는 믿음의 용사들의 자세를 기록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고,

믿음으로 모세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이를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하셨다.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한 진주 장사도,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산다고 하셨다.

 

기독교의 참 생명과 본질은 여기에 있다. 발견한 기쁨과 감격이 있다.

기독교는 내 생활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것도 아니요, 덧붙이는 악세사리도 아닌 것이다.

회심함으로 가치관과 삶이 획기적으로 전체가 변화되는 것이 참 기독교이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서는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는

그물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는 세리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소유를 다 팔아 샀다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주님의 말씀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7-39)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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