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스크랩] 로이드존스 목사와 설교 서론및 1장

강대식 2016. 9. 8. 09:15

목사와 설교
D.M 로이드 존스

“내게 있어 설교 사역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고귀하고 위대하며 영광스러운 소명이다.“
- 마틴 로이드 존스


오직 설교라야만 한다!

역동하는 생명과 영향력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를 살릴 길은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여러 진단과 해법을 내놓고는 있으나 무기력하고 피상성에 젖어 있는 말씀의 강단을 회복시키고 살리는 데는 역부족이다.

이런 현실에서, “불붙은 논리”의 설교자 로이드 존스의 “오직 설교라야만 한다”는 명제는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할 말이 되었다. 설교는 그만큼 낡고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치부되고 있으며, 강단은 점점 교회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설교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인가?
설교는 성경과 교회사가 지지하는 유일한 해법인가?

이 책은 이 본질적인 질문에서 출발해 ‘설교를 믿는 설교자들’을 구체적으로 도와줄 실용적인 고찰과 권면으로 나아간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확인하는 문제, 설교의 형식을 결정하는 문제, 전달의 문제, 설교자 본인의 삶, 회중과의 관계 설정,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문제, 예화나 유머의 사용, 결단을 촉구하는 문제, 사람의 준비와 성령의 기름 부으심 등 설교자가 민감하게 고려해야 할 모든 측면을 꼼꼼히 짚어 나가면서 때로는 엄중하게 경고하며 때로는 세심하게 조언한다. 그 경고와 조언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그가 제시하는 명백한 성경의 근거와 교회사의 증거들, 40여 년에 걸친 설교자의 삶에서 나온 풍성한 경험과 예증들이다.

이 책은 1969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6주에 걸쳐 강의한 원고 내용을 엮은 것이다. 로이드 존스가 ‘설교와 설교자’를 주제로 16회에 걸쳐 전한 강의한 것으로 우리 시대 설교론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평생토록 설교에 헌신했던 이 강력한 설교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이 영광스러운 직무의 엄중한 부담감과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간절한 갈망으로 외치게 될 것이다.

내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은 「설교와 설교자」다. 이 책은 나에게 완전히 소화되어 내 몸의 살과 피가 되었고, 목회자로서 말씀 중심으로 흔들림 없이 목회하는 데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김서택 목사 | 대구동부교회

이 책은 내가 읽은 모든 책 가운데, 설교에 관한 최고의 책이다. 약 20년 전에 이 책을 읽으며 받았던 감동이 아직도 남아 있다.
김남준 목사 | 열린교회

마틴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를 받은 위대한 설교자였다. 모름지기 설교자라면 누구나, 설교를 가차 없이 깎아내리고 있는 이 시대의 해독제로서 로이드 존스의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존 파이퍼

1. 설교라야만 한다
2. 대안은 없다
3. 설교문과 설교 행위
4. 설교문의 형식
5. 설교 행위
6. 설교자
7. 회중
8. 메시지의 성격
9. 설교자의 준비
10. 설교문의 준비
11. 설교문의 형태
12. 예증, 웅변, 유머
13. 피해야 할 것들
14. 결단의 요청
15. 함정과 낭만
16.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


제1장 설교의 우위성

Ⅰ 왜 나는 설교에 관해 강의를 하게 되었는가?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설교는 내 일생의 사역이었기 때문이다. 42년간의 목회경력 중에 나의 주요 임무는 설교하는 일이었다. 그 점은 필연적으로 나로 하여금 설교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를 깊이 연구하고 토론하고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도 이 강의를 할 용의를 가진 데 대한 궁극적인 이유는 설교사역이란 내게 있어서 어떠한 소명보다도 가장 높고 위대하고 영광스런 소명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기독교회의 가장 절실한 요구는 진정한 설교이며, 그것은 역시 명백하게도 세상이 가장 크게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1 설교사역의 절실한 필요성

설교가 어떤 필요성이 있느냐?
현대교회와 세상에서 설교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아니면 설교란 시대에 아주 뒤떨어진 것이 되어버렸는가?

이 질문을 던져야 하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사실은 현시점의 교회상태가 어떻다는 것을 가장 잘 반영해 주고 있다. 바로 그 점이 현대교회의 위험한 상태와 무기력함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이 설교에 대한 강의나 특강을 요청할 때, 얼른 그들은 설교방식, 설교방법, 설교수단, 설교기술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이 아주 잘못된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먼저 전제조건, 배경, 보편적인 원리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하다는 것이 참으로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데서 중요한 난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설교의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는가?
현대세계에 있어서 설교의 필요성은 과연 있는 것인가?

우리는 설교하는 문제뿐 아니라 교회 자체까지도 의문시되는 세대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주장하는 교회 자체가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든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보고 싶다면 교회를 없애버리는 것인데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진리와 사람들 사이에 장애물로 서있기 때문이라는 사상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2 교회에 대한 비평 인정

교회가 너무 잘못된 것, 즉 전통주의, 형식주의, 생명이 없음 등이 너무 심하여 이 의견을 부인하는 것은 무모하고 매우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교회 안에 모임에 관해 그것이 교회의 목적에 부합하고 있는가를 자주 물어보아야 한다. 교회는 단체나 또는 사회의 무슨 클럽 같은 것으로 전락하기가 너무 쉽다.

오늘날 설교에 대한 반동을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인가?
왜 설교가 전에 교회생활에서 차지하였던 위치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서 떨어져버렸는가?

기독 교회사를 아무리 건성으로 읽는다 해도 설교가 교회생활, 특히 프로테스탄트의 경우에 가장 중추적이고 우선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이처럼 설교의 위치와 능력이 하향 길을 걷고 있으며, 왜 이 설교가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인가?

Ⅱ 그 문제에 대한 두 가지 객관적인 이유

첫째 일반적인 이유-볼드윈이즘

“일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 밖의 세상에 유행하는 어떤 보통의 사상들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대영제국에서 이 문제를 생각한다면 주로 볼드윈이즘(Baldwinism)을 들 수 있겠다. 영국 스탠리 볼드윈(Stanley Baidwin)이라는 20대의 수상을 지낸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연설과 웅변의 가치에 관한 국민의 생각에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그래서 로이드 조지, 윈스턴 처칠, 로드 버켄허드 같은 사람들에 의해 이끌려 가던 영국의 연립정부 내각을 장악하게 되었다. 볼드윈은 웅변과 연설의 소질이 없었기에, 그는 성공하려면 연설과 웅변의 가치의 중요성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단순하고 정직하고 평범한 영국인으로 등장했다.

자기는 위대한 연설가가 아니라고 말하며 어떤 위대한 웅변가라면 그는 국민들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며 아주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시사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대조법으로 표현했으며 그가 취하는 노선은 웅변이나 상상의 큰 재능에 깊이 심취될 수 없으면서 단순하고 평이하고 정직한 진술을 하는 평범한 영국인의 자세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아주 뚜렷하게 영국 내에, 특히 정치가들 사이에 유행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영향은 교회에까지 파급되었다고 본다. 그것이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더욱 문화적이며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독서를 하지 않았고 위대한 웅변가들에게 의지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에게 책이 있고 도서관과 독서에 필요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더 이상없다. 거기에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있어 진리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안방까지 들어오지 않는가 말이다.

반론:

가장 위대한 활동가는 역시 위대한 웅변가였다. 물론 그것은 민중을 감격시키고 일깨워 행동으로 옮기게 할 수 있는 지도자적 역량의 한 부분이며, 그것은 지도자가 반드시 구비하고 있어야 하는 요점인 것이다. 세상의 일반역사는 역사를 참답게 이룩한 사람들은 말할 줄 알았고 메시지를 전할 줄 알았으며 자기들이 산출해 낸 효과적인 결과로 민중들을 행동케했던 위인들이었다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둘째 교회 자체의 특수한 이유

그러나 우리는 설교의 위치가 하락된 이유를 설명하는 교회 자체 내의 이유와 태도에 대해 좀더 관심이 있다. 이 방향에서 주요 동인이 있는데, 첫 자리에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심 상실, 진리에 대한 신앙의 감소 등이다. 위대한 설교는 위대한 주제에 달려있고, 위대한 주제는 언제고 어떤 차원에서든지 위대한 웅변을 산출한다. 물론 이것은 특별히 교회의 경우에서도 동일하다.

사람들이 성경을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권위에 입각해서 말하는 동안 위대한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성경의 위대한 원리들에 대한 신념이 없어지기 시작하고 설교가 윤리적인 위대한 강연이나 훈계 그리고 도덕정신의 함양, 설교보다는 사회-정치적인 대화로 자리바꿈을 함으로 퇴보하였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바로 그 점이 이러한 하향추세에 대한 첫째되고 가장 큰 요인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인가? “설교꾼(Pulpiteers)”이라 불려지는 사람들 때문이다. 특히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그렇다. 가장 전형적인 인물은 헨리 워드 비쳐(Henry Ward Beecher)라고 생각한다. 강단을 점령해서 그것을 지배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직업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겐 쇼맨적인 요소가 매우 많았고, 집회를 인도하거나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는 데 명수들이었다.
결국 형식이 알맹이보다 더 중요하게 되고, 웅변과 능변이 그 본질이 되어버려 결국 설교가 오락거리가 되어버렸다. 진리는 외면해 버리고 중요한 것은 모양이 되버렸다.

또 다른 요인으로 설교집의 발행이 설교하는 일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1890년 이후 스코틀랜드 신학교는 이 점에 있어서 범죄자이다. 문학적인 재능을 부여 받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강조점을 메시지의 진리성에서 문학적 표현으로 옮긴 것이다. 그들은 설교자들이라기보다 수필가들이었다. 현대 설교가 퇴색해 가는 것에 대한 대부분의 책임을 설교라는 이름 아래 발표되었던 그런 문학적인 비류들 때문이라고 본다.

이상의 결과로 설교에 대한 새로운 사상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인가? 먼저 사람들이 예배에서 설교를 “연설(adress)”이라고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설교란 영성이 결핍된 세속적인 것이며, 필요로 하는 것은 대화요 조용한 담화와 설화이다. 그런 사상이 들어오게 된다.

게다가 새로운 강조점을 자주 ‘예배요소’로 불리워지는 ‘예배의식’에 둔다. 설교가 퇴색해 감에 따라 예배의 의식적 요소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비국교도들인 자유교회 사람이 설교가 퇴색해 감에 따라 점점 성공회 예배모형으로부터 이러한 사상을 어떻게 빌어오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그들은 주장하길 사람들이 예배에 더 많은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데 그래서 자기들은 교독문과 더 많은 음악과 노래와 영창 등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설교가 하향길로 감에 따라 이런 일들이 강조되고 있다. 사람들은 의식과 형식, 예식에 더 큰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더 위엄이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더욱 나쁜 것은 공적 예배에 흥미본위의 요소가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영사기를 사용한다든지 더욱더 많은 노래를 도입하여 말씀을 읽거나 기도하는 시간은 사정없이 짧아져 버리고 찬송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교회의 새로운 직책으로 ‘찬송 인도자’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 다음에 여기에다가 간증이 주어진다. 설교가 설교로서의 제구실을 못하도록 하향추세에 있을수록 설교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간증하도록 이용한다는 것을 관찰할수 있다. 간증이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복음을 듣게끔 한다는 것이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사람을 찾아 간을 시킴으로 그것이 설교나 복음강해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이와 관련해서 또 다른 전체적인 추세는 소위 ‘상담’이란 것을 점점 더 강조해왔다는 것이다. 이점은 제1차대전 후에 더 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설교가 하향함으로 인해 상담은 상승하는 양상을 보게 된다. 현대에는 일상생활에 새로운 긴장감과 긴박감, 어려움이 조장됨으로 인해 사람들은 더 많은 개인적인 배려를 필요로 하며, 목사들은 그들 나름의 특정한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사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대신 행동하라는 외치는 사람들

교회 자체가 장애물이 되고 참으로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교회를 폐지해야 한다고 억측을 부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어느 의미에서 우리가 물려받은 모든 전통을 일소해야 하며, 만일 우리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 한다면 그들과 섞여서 그들 가운데 살고 그들과 함께 삶을 누리며 서로 다른 사람의 짐을 져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줘야 한다.”

이런 주장이 설교자들에게도 말하는 것을 들을 적이 있다. 그들은 교회 출석률이 낮아지고 있는 현실 앞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놀랄 만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설교자가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설교하는 한 그와 다른 어떤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교회의 설교에 흥미를 잃었고 정치적인 문제와 사회상황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여러 가지의 부조리 그리고 전쟁과 평화에 관심이 있다. 그러므로 만일 기독교적인 방향에서 영향을 끼치고 싶거든 말로만이 아니라 활동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설교자가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설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Ⅲ 이 모든 요인과 주장에 대한 답변

그렇다면 이 모든 것에 대한 우리들의 답변은 무엇인가? 이런 것은 잘해야 2차적인 문제, 2차적인 문제도 아니고 최대로 생각해서 2차적인 문제이다. 교회나 기독교 목사의 제일 첫 번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요지이다. 이 진술을 구체적으로 입증하고자 한다.

1 예수 그리스도

먼저 성경자체의 대답은 무엇인가? 구약의 선지자들의 경우에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지만은 신약에만 국한시켜서 우리 주님 자신이 뭐라 말씀하시는가 알아보기로 한다. 분명히 주님의 목회사역에서 다음의 두 방면을 주목해 보는 것 이상 흥미로운 것은 없다.

우리 주님은 이적을 행하셨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적은 주님의 첫 번째 사역이 아니고 두 번째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적은 하나의 표적이다. 그러면 주님의 제1의 목적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하신 말씀 자체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오병이어의 이적이 있은 후 사람들은 억지로 주님을 왕을 삼으려고 노력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요6:15). 그들은 “이제 이 사람이야 말로 우리가 원하던 사람이다. 그는 실제적인 문제, 즉 배고픔과 양식의 궁핍을 해결해 주고 있다. 이 사람만이 왕이 되기에 합당하다. 그는 권능을 가졌고 왕이 될 수가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피해 떠나셨다고 했다.

누가복음 12:14에 나오는 또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거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전도와 가르침을 위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한 사람이 갑자기 불쑥 한 마디 하기를 “내 형에게 말하여 나와 재산을 나누게 하소서”라고 말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요구에 대한 답변 속에서 언뜻 이 전체 문제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해결점을 비추어 주셨다.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으로나 재산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그런 일을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지 않았음을 이 말씀으로 명확히 하셨던 것이다.

“나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해 하늘을 떠나서 땅에 온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내 제1의 임무는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꾸짖으셨다. 정말 우리들은 여러 번 주님께서 몇몇 놀랄 만한 이적을 행하셨을 때마다 사람들이 그를 붙잡고 더 많은 일을 행하실 것을 기대하였던 것을 안다.

주님은 그때마다 일부러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셔서 전도와 가르치기를 계속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이것이 제1되는 일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외의 모든 것들은 후차적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할 때에 그들에게 “가르치고 귀신을 쫓아내라”고 하셨다. 가르치는 일이 첫째 일이다. 복음서에서나 우리 주님의 생애와 목회사역에서 전도와 가르침의 우위성에 대한 이와 같은 명백한 지시를 보게 된다.

2 사도행전

부활하신 후 우리 주님은 택한 자들에게 위대한 사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내 증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하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권능을 주려 하셨으나 그들의 주요 임무는 역시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오순절 날에 성령이 충만해지자 즉시 설교(전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그 다음에 사도행전 3장으로 넘어가면 다시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있는 사람을 낫게 했다. 사람들은 이 두 사람으로부터 큰 이익을 얻을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시 설교를 하여 그들의 생각을 바르게 해주고 즉시 그들의 시선을 자기들이 행한 이적으로부터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에 관한 대 진리로 돌렸다. 사도들은 이 점에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러 방면으로 이것과 관련하여 가장 흥미로운 진술은 아무래도 사도행전 6장에 나와있는 초대교회 생활에서 발생한 커다란 위기에 대한 진술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현재 상태와 교회의 제1차적 임무가 무엇인가에 대해 사도행전 6장보다 직설적으로 말한 것이 있는지 모른다.

(행 6:1-2, 개정)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여기의 문제는 이것인데, 즉 헬라파 과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과부일 뿐 아니라 식량에까지 궁핍해 있었다. 그것은 사회문제이며 아마 부분적으로는 하나의 정치문제였다. 사실 그것은 아주 날카롭고 절실한 사회문제였다. 분명히 기독교회, 특히 교회 지도자들의 일은 이 급박한 요구들을 해결하는 것인가? 그 점은 즉각적으로 교회에 찾아온 커다란 시련이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와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은 이미 가르침으로 주님으로부터 분부 받은 것도 있고 해서 위험을 알아차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다면 우리의 임무를 다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일에 전무하리라.”

이것이야말로 교회와 교회지도자들과 교회에서 권위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제일 첫째의 임무이다. 우리는 결코 어떤 것도 우리를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이유이든, 아무리 큰 필요성이든 그리해서는 안된다. 이 말은 오늘날 이 문제에 관련해서 그럴듯하게 말하고 생각하는 수많은 거짓된 사고방식에 대한 단도직입적인 답변이다.

3 기독교 역사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쇠퇴기에 빠진 시대는 언제나 말씀전하는 것이 감퇴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하지 않는가? 종교개혁이나 부흥의 여명을 알리는 것은 언제나 어떠한 것이었나? 그것은 말씀을 새롭게 전하는 것이다. 말씀 증거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말씀 증거의 새로운 유행이 일어나는 것이다.

참된 말씀전파의 부흥은 언제나 교회 역사상 위대한 부흥운동을 가져왔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그것은 초대교회에서 진리였던 것처럼 그것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 이후에도 역시 진리이다. 루터, 캘빈, 낙스, 래티며, 리들리 등 모든 이들은 위대한 말씀 증거자였다. 17세기에서도 똑같은 사실을 발견한다. 위대한 청교도 전도자들과 18세기의 조나단 에드워즈, 휫필드, 웨슬리 형제, 롤랜드, 해리스, 이들 모든 사람들은 위대한 말씀 전파자들이었다. 개혁과 부흥이 있을 때마다 이것은 항시 피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그러므로 말씀전하는 일이 교회의 제1차적인 임무라는 진술에 대한 해명과 정당성은 그처럼 성경의 증거와 나의 진술을 지지해주며, 일치하는 교회의 역사적 증거에 기초하고 있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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