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스크랩] 로이드 존스 목사와 설교 제2장 대체불가할 수 없는 사역

강대식 2016. 9. 27. 20:48
제2장 대체할 수 없는 말씀증거

1장 요약

1장에서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교회와 목사의 최우선적 임무이며 그 외의 모든 일은 이 일을 수행하는 외적 사역이라는 명제를 전제해 놓았다. 이 명제의 정당성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특히 오늘날 여러 가지 다른 활동양상으로 인해 말씀 증거의 가치를 절하시키는 오늘날의 경향성에 비추어서 신약과 교회역사로부터 증거를 제시함으로 명제의 정당성을 입증하였다.

이제 좀더 나아가 교회역사를 통해 지지받고 예증받았던 신약의 이 증거가 우리들로 하여금 말씀 증거의 우위성을 역설함에 있어 궁극적인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며, 그것이 신학적이라는 결론을 얻게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 전체의 메시지는 이 점을 역설하며 이 결론에 이르게끔 한다는 것이다.

Ⅰ 말씀의 정당성 및 필요성

그 말을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인간의 진정한 필요와, 성경에 나타나고 공언된 구원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교회의 최우선적인 임무는 말씀을 가르치며 선포하여 사람의 참된 필요와 그에 대한 유일한 처방을 보여주는 일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1 말씀증거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게 하는 거짓된 견해

오늘날 사람들이 말씀 증거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것은 거짓된 견해가 횡행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필요성의 문제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을 하나의 질병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말하는 질병이란 단순히 육신적인 아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도 해당되지만 일종의 정신적, 도덕적, 영적 질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참된 궁핍과 진정한 고통은 아니다. 나는 인간의 비참함과 불행, 아울러 환경의 희생물인 인간 존재에 관한 견해도 말하고자 한다. 오늘날 현저하게 나타난 일들이 있다. 인류의 상황을 분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은 병들어 있으며, 불행하고 환경의 희생물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간에게 급선무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며, 사람은 반드시 그로부터 구출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진단에 불과하다. 인간의 참된 고통은 그가 하나님께 반역했고 그래서 부단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인간에 대한 성경의 진술이며 본래적인 인간성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다.

2 성경의 인간의 상태에 대한 진술들

“죄와 허물로 죽었다”
사람이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영적 세계에 대하여, 사람 위에 임한 모든 은혜로운 세력에 대하여 죽은 자이다.
그리고 “사람은 눈이 멀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고후 4:3-4, 개정)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바울은 에베소서 4:18에서 그 점을 다시 지적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고통이란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상태를 묘사하는 다른 일반적인 성경 어휘는 “어두움”이란 말이다. 요한복음 3:19에서는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하였다. 또한 요한일서에서도 이와 같은 사상이 서술된 것을 볼 수 있다. “어두움이 지나고 참 빛이 비추나니”라고 편지하였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5장에서 정확히 같은 개념을 채용하고 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엡 5:8). 이 말씀들은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의 성경적인 진단을 표하는 말씀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그것을 “무지”라고 한마디로 압축시킬 수 있다. “눈멈”, “어두움” 등의 어휘는 무지를 지시하는 말인 것이다.

그리고 성경적 인간관에 따르면 불행이나 참상, 육체적인 질고까지도 그리고 우리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다 원죄와 아담의 타락의 결과이며 열매이다. 그 결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원초적이며 궁극적인 질병의 결과요, 표증이요, 증거라는 데 있다.

인간이 빠진 곤경의 참 모습이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구원기사를 표현한 어휘들이 인간의 곤경을 나타내는 표현과 정반대의 말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 사도는 구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구원이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구원이란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19-20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신(使臣)이 된 전도자에게 부탁한 말은 사람들에게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말을 전달하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 구원이란 사람들이 결(缺)하고 있는 “구원에 대한 지식”으로 사람들을 인도함으로 얻는 결과이며 또한 구원이 이 무지를 해결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구원이 사람에게 가장 큰 요구이며,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곤경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결과인 무지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이것에 관해서 듣는 것이며, 자신의 처지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이것이 처리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교회와 목사의 고유한 임무라고 주장한다.

설교자만이 이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오직 그만이 세상의 가장 큰 요구를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4:17에서 바울은 그 점을 나타내었다. 바울은 자기 스스로를 “복음을 반포하는 책임을 맡은 자”라 했다. 그가 부름을 받은 것은 바로 그것을 위한 것이었다.
복음의 선포!

그래서 에베소서3:8-10에 있는 아주 영광스러운 진술과 같은 것을 대하게 된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게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이것을 알 수 있는 곳은 교회뿐이며, 그것을 알게 하는 사람은 오직 설교자뿐이라는 것이다. 목사는 이 특별한 기능을 봉사하기 위해서 교회에서 별도로 세움을 입었다. 그리고 이 임무는 우선권이 주어지고 강조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래야만 한다. 인간의 진정한 필요를 깨닫고 거기에 다한 유일한 해결책을 아는 순간, 이러한 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된다.

3 인류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기관들

세상에는 인류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기관이 있다. 의료기관, 정부, 다른 여러 교훈들과 정치기구, 심리학, 심지어는 타종교까지 포함한다. 이상의 것들은 모두 인간의 조건을 도와주어 일시적으로 생기 있게 하고, 또한 생활의 고통과 문제를 안전하게 하고, 더 큰 규모로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그것들을 전혀 쓸모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선을 행할 수 있고 많은 유익을 준다. 이런 문제들을 다소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원초적인 고통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 그뿐 아니라 그것들이 그들 나름의 모든 일을 해냈을 때 또는 교회까지도 그 차원으로 내려가서 그 차원에서만 활동하여 일을 완수하였을 때라도 원초적인 고통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최우선적인 임무가 사람을 교육하는 것도, 사람을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치료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한다 해도 그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본적인 명제로 잡아놓으려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 사람을 교육하고 육체적, 심리적 치료가 사람을 선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구원에 수반하는 것들이다. 교회가 진정한 임무를 수행할 때 알게 모르게 사람들을 교육하고 지식과 정보를 주게 되며, 사람들을 행복으로 인도하고 또한 사람들을 본래 상태보다 훨씬 선하게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요지는 그런 것들이 교회의 1차적인 목표는 아니라는 것이다.

Ⅱ 교회의 1차적인 목표

교회의 1차적인 목표는 사람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이끌어주고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점은 현시점에서 반드시 강조될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점이 현대가 속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진수이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교회의 임무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사람의 생활을 조정하고 사람들이 빠져 있는 환경으로부터 해방시켜 그들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증상을 완화하고 임시적으로 평안하게 하는 것만은 사실이나 근본적인 고통을 걷어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병의 증세를 완화시키는 것은 분명히 옳고 선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증상들을 완화시키거나 사람들을 생기 있게 하는 것, 그 자체로는 악하지 않고 악할 수 없다 할지라도 인간과 인간의 필요에 대한 성경적 이해의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나타난 증상을 완화시킴으로써 진정한 병원(病原)은 덮어둘 수 있다는 면에서 그것은 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점이 오늘날 우리의 문제에 대한 치명적인 부분에 속한다.

이 점은 오늘날 기독교회가 직면한 문제 중 하나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풍요한 사회’는 사람들을 마취시켜 그들로 하여금 모든 것이 잘 되어 있다고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생활은 풍족하고 모두가 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을 멈추고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부딪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피상적인 평안과 충족감은 실제 상태에 대한 진실되고 근본적인 이해를 막아버린다.

물론 현대에 있어서 많은 매개체에 의해서 악화된다. 현대는 광적인 오락열에 젖어 있고 안방엔 곧바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있다. 그 결과 자기의 진정한 위치를 의식하지 못해 자기의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 맞부딛쳐 보지 않는다. 나는 교회가 자기의 제1차적인 임무를 망각하고 한눈을 팔고 있는 동안 이러한 여러 사회 매개체들 같은 유의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는 악하지 않으면서도 진정한 필요를 숨겨버림으로써 악하게 되고 참으로 해를 끼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하는 일인 교회의 임무는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도출해내어 근본적인 방식으로 그것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오직 교회만이 유일하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종교들이나 심리학자들, 또 다른 사회기관, 정치, 사회가 어떻게 말하든 간에 교회는 그런 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 않다. 교회는 특수하고 전문가적인 기관이므로 이상의 일은 교회만이 수행할 수 있는 일이다.

복음의 사회적용에 대한 관심과 사상

사회복음을 주장하는 사회복음주의자들의 주장은, 구식의 복음전도는 너무 개인적이고 단순해서 사회문제와 사회조건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자유주의자, 현대주의자, 고등비평가가 하는 일이다. 예수는 완전한 사람으로서 위대한 선생이요, 정치 운동가요, 개혁가며 위대한 모범가다. 그는 선한 일을 하러 오셨고, 산상설교는 법령이나 법률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완벽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1914년 이전의 구자유주의이다. 그것은 오늘날 새것이라 간주되고 있고, 교회의 1차적인 임무로 간주되고 있는 것으로 이미 20세기 전반기 대부분을 통해 시도된 것이다.

교회생활과 교회 할동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여러 다른 사회매개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접근방식으로 추대되고 있는 소위 ‘제도적 교회(Institutional Church)’라고 불리우는 것에 의해 실제화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괄목할 만큼 철저하게 행해졌다. 교회 내에 모든 종류의 문화클럽이 있게 되었다. 여러 종류의 대회와 클럽이 조직되었다. 이 모든 것은 1914년 전시대에 있어서 가장 철저히 시도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무엇을 해냈는지, 또한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 지 분명히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대한 해답은 그것은 실패했으며, 실패한 것이 입증되었다. 영국교회를 텅비게 한 책임은 대부분이 “사회복음적” 설교와 제도적 교회가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교회의 임무가 정말 어느 모양으로든지 간에 정치, 사회개혁과 평화주의를 설교하는 것이라면 교회는 그렇게 절실히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교회가 아니라도 그런 것들은 정치기루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런던에 교회의 정치-사회적 관심에 대한 위대한 대변자 두 사람

이 사람들은 이 방법이 세상 사람을 얻는 길이며 세상 사람을 도와주어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영국에서 이 교훈에 가장 큰 공헌자인 이 두 사람이 봉직하는 교회에 주일날마다 적은 숫자만이 모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치연설을 들으러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의 제1차적인 임무를 떠나서 다른 어떤 일을 할 때 동기야 아무리 순순하고 훌륭하다 할지라도 결과는 뻔하다.

현대의 사회상태에 대한 대부분의 책임은 교회가 말씀 전파의 임무를 떠난데 있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복음이 없는 도덕심과 윤리를 강론하려고 애써 왔다. 즉 경건 없는 도덕을 가르쳐 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절대로 쓸모가 없을 것이다. 그 결과 교회는 자기의 진정한 임무를 포기해 버림으로 품위를 잃어버려 끝내 방임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사회, 정치조건에 대한 관심, 개인의 행복에 관한 관심 등은 언제나 기독교 내에 개혁과 부흥, 참된 말씀 전파가 일어날 때 가장 효과적으로 다루어졌다. 현대인은 역사에 대해 무지하다. 병원이 교회로 말미암아 유래된 것을 알지 못한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빈민구호법 제의와, 가난에 시달리고 있던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준 것도 교회이다. 교회가 자기의 1차적인 임무를 수행할 때 다른 것들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문제의 영역

사람들의 주장은 설교를 듣는 회중은 개별적인 문제들과 고통을 안고 있는 개개인들이 앉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설교는 좀 덜하고 대인적인 일과 상담, 대화를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한 나의 태도는 여전히 설교를 최우선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참된 설교는 개인적인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며 그럼으로써 그만큼 설교자의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단에서의 복음전도는 성령에 의해 설교를 듣는 회중들에게 적용되어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되었다.

Ⅲ 설교의 대체불가적 사역에 대한 반론들


1 “시대가 변하지 않았는가?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것은 20년 전이나 아니 100년 전에서나 통하는 소리다. 우리가 사는 새로운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당신의 방법은 옳은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셨으며 사람도 변하지 않았다. 물론 외면적인 변천은 인정한다. 의상이 다르고 한 시간에 4마일밖에 여행할 수 없었던 것이 이제는 4백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전혀 변하지 않고 인간의 요구는 언제나처럼 정확히 동일하다.

오늘날의 가장 중추적인 기만성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20세기에 살고 있으니 우리는 전혀 새로운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사상이 전후시대, 과학시대, 원자시대, 후기기독교시대라는 명목을 가지고 교회의 전체 영역과 교회의 사고방식에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 사람은 타락 이래로 언제나 정확히 그대로이며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정말이지 오늘날보다 더 위대한 말씀 증거의 기회가 있었던가?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환멸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2 “지금 사람은 확실히 교육을 받아 많이 알게 되었으니 책과 신문 잡지를 통해서,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토론을 통해서 그것은 잘 될 수 있지 않는가?”

물론 독서가 도움을 줄 수 있고 다른 매개체들처럼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바는 그것들이 정말 어느 정도까지 그 상황을 개선해 주고 대처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나는 그 결과가 절망적이라고 주장한다. 첫째로는, 접근방식이 틀렸다는 것이다.

교회는 선교동체이다. 그리고 전교회가 복음과 복음진리, 복음의 말씀에 증인이라는 신분의 개념을 포착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함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즉 이 모든 것이 독서나 텔레비전 시청만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회생활의 신비로운 요소를 그만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모임은 단순한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계시는 모임이다. 이 점은 교회의 위대한 신비를 듣기 위해 함께 모인 그리스도인의 집회 분위기 속에 있는 무엇이다.

*무당회심이야기

“내가 예배당으로 들어와서 사람들 사이에 앉는 순간 나는 하나의 권세를 의식했습니다. 그 권세는 내가 무당들의 모임에서 느끼곤 하던 것과 조금은 유사한 무엇이었지요.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의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인도하는 예배에 있는 권세는 분명한 권세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로운 요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있는 성령의 임재이다. 혼자서 방에 앉아 독서를 함으로써는 얻을 수 없는 무엇이다. 특별히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설교자에 의해 더욱더 고조되는 동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 증거의 자리에 독서나 텔레비전 시청, 또는 그 외의 다른 활동이 들어와 앉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인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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