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설교내용과 전달행위
Ⅰ 세 번째 반론
“그 모든 것이 그룹토의에 의해서 더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는가? 구태여 설교여야만 하는가? 설교가 끝날 무렵 더 많은 문제를 내놓고 교회 안에서 이제까지 그 설교를 들어온 모든 사람들과 설교한 목사가 대화를 나누어서는 안될까?” 이렇게 하는 것이 훌륭한 전도방법일 뿐 아니라 성경의 메시지를 인식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며, 그 방법이 현대에 있어서는 설교하는 것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개인적인 회고담
1942년 그 당시 유명했던 조우드 박사(Dr. C. E. M. Joad)와 종교문제에 대한 공개토론을 옥스퍼드 대학의 ‘토론협회’에서 청탁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초청장을 반송하고 그 토론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통고했다. 그러자 내가 나쁘다느니, 복음전도나 설교할 수 있는 그런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느냐느니, 또한 조우드 박사 명성 그 자체가 매력을 끌어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그 토론에 귀를 기울일텐데...그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내가 전도의 기회를 거절하고 놓친 것이라고 느꼈다.
공개토론의 초청에 응하지 않은 이유
첫째로, 하나님은 토론되거나 논박될 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계신 분이며 자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불신자는 그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진리이다. 불신자들이 동의하든 안하든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시다.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임무이다. 우리가 그런 입장을 취하고 하나님이 토론이나 변론이나 검증의 대상이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나의 이 주장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것이다(출 3:1-6). 모세는 갑자기 떨기나무가 타는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 놀라운 광경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가까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문득 그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바로 이 말씀이 전체 문제를 지배하는 원리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더 중요하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언제나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기쁘시게 할 분이시고,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이다(히 12:28-29).
이것은 사활을 좌우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거드름을 피우면서 안락의자에 앉아 담배나 파이프를 물고서 인과논법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논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철학적인 미지수(X)나 어떤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엄위와 영광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 분이시다. 다른 사람이야 어쨌든 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철학적인 명제로 착각하여 하나님에 관해 토론하는 처지로 빠져들어가서는 안 된다.
두 번째 이유는, 이런 문제를 토론하는 데서 우리는 생의 가장 심각하고 가장 중대한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다루게 될 것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우리와 관계되는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도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주제의 성격과 본질 자체가 가장 심각하고 숙고하기에 알맞은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고는, 하나의 경박한 정신과 변론정신을 가지고는 그 일에 손을 대어서는 안되는 것이 확실하다. 그것을 토론하는 것을 흥밋거리로 여겨서는 더욱 안된다.
셋째로, 영적으로 무식한 자연인, 즉 비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러한 토론이나 논쟁, 또는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말은 자연인이 영적인 일에 소경으로 어두운 상태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14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다. 비그리스도인은 영적 이해의 문외한이다. 그러므로 불신자가 이런 일을 할 수 없으니 그런 사람과 토론할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 다음은 자연인이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겸손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비그리스도인과 무엇을 할 수 있기 전에 꼭 필요한 것이다. 자연인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는 그의 오만함에 있다. 이 문제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후반부에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지혜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육에 속한 자연인은 먼저 교만을 꺾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모든 사람은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아는 모든 것, 그들의 모든 됨됨이, 그들의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그들이 행한 모든 것이 이 점에서 볼 때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전적인 파탄(破綻)을 깨닫게 되어,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는 한 그들에겐 아무 소망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토론하거나 변론하지 말 것이며, 해서는 안된다. 그런 일을 한다면 최상의 기독교의 전제를 부인하는 것이다. 실로 우리 주님은 그것에 대해 강력하게 말씀하신다.
(마 11:25-27, 개정)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진리는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조명을 통해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진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거나 토론, 논쟁하고자 하는 모든 견해는 바로 그 복음 자체의 성격과 본질에 반대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더 큰 논증과 반론
그것은 소위 이론상으로는 흠잡을 데 없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들으러 오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참다운 설교가 전해질 때 사람들은 모이게 될 것이다. 이미 나는 역사적으로 볼 때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이 언제나 그래왔다는 증거를 끌어냈던 것이다. 그 점은 오늘날도 역시 같다고 주장한다. 나는 교회 역사상 말씀 증거에 대한 기회와 필요성이 고통당하는 현대보다 더 절실했던 시대가 거의 없었음을 주장한다.
Ⅱ 설교란 무엇인가?
그러면 설교(Sermon)은 무엇인가? 내가 설교라고 할 때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어떠한 정의이든지 그것이 진정한 설교의 정의가 되려면 반드시 설교단에 선 사람은 거기서 하나님의 메시지, 곧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한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의 사신(使臣)”이다. 그 점이 그 사람의 신분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이다. 그는 보냄을 받았으며 임명받은 사람이요, 그가 강단에 서 있는 것은 그들에게 그저 담화하거나 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설교자와 듣는 자 사이의 하나의 거래이다. 설교는 인간 영혼과 전인격, 전인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한다. 설교는 듣는 사람의 문제를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으로 다루어 주는 것이다.
“나는 목사님의 이 산상설교 연구에 대해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의 산상설교 강해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학식 있는 목사들과 교수들로부터 많은 책을을 추천받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들 책에 대해 느낀 것은 언제나 자기들끼리만 아는 소리였지 나에게는 무엇인가를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것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설교에는 언제나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서 생사문제와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져야 한다. 설교는 단순한 지식의 분배가 아니다. 그보다 더 큰 무엇이다. 만일 우리가 이 점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설교는 실패할 것이다.
설교란 전인을 다루는 것이고, 듣는 이가 감복하게 되어 이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루시고 계시며 자기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그 설교를 듣는 자 안에서 일어나고 무엇인가가 체험되며 그렇게 되어 설교가 전 인생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Ⅲ 설교의 두 가지 요소
1 설교의 내용, 혹은 메시지-즉 말하는 내용이다.
2 설교행위이다. 즉 “전달”, 혹은 흔히 말하는 “전파”이다.
나는 메시지와 메시지의 분배 혹은 메시지의 전달 사이에 진정한 구분을 강조하고 싶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구분을 하는지 영국의 번마우스(Bourne-mouth)의 존스박사가 한 말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어떤 곳에서 설교를 하고 목회자와의 만남의 자리에 질문에 답을 하게 된다.
“나는 내가 설교를 들은 사람중에 누가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던가를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들은 설교중 가장 훌륭한 설교는 존 휴턴씨의 설교였습니다.”
이 대답은 치명적으로 중요한 설교와 전달행위사이의 구분을 아주 잘 부각시켜 주고 있다. 가장 위대한 설교자가 누구냐는 너무 포괄적인 문제로 설교자의 인격, 그의 성품, 설교 내용 등 전부를 포함해야 하므로 확실하게 규정짓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전파행위, 즉 메시지의 전달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Ⅳ 메시지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의 설교, 곧 메시지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특정한 점에 대해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아주 훌륭한 성경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을 때 베드로가 한 말이다. 그들은 갑작스레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한 불구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사람은 무엇을 얻을까 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았다. 그는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동냥을 받았다. 세상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그를 치료할 수는 없었지만 생존하도록 도울 수는 있었고, 그럼으로써 무엇인가 그의 생활을 낫게 하고 어느 정도의 위안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대하는 것을 받지 못했다. 베드로는 말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1-6).
베드로의 진술은 우리로 하여금 메시지의 내용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우선적으로 메시지나 설교는 단순히 시사적인 내용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간에 일어난 사건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정치적인 일이나 기타 좋아하는 사건들 등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겐 메시지가 하나의 일반적 정신함양이나 일종의 심리학적 요법이다. 그런 메시지가 설혹 기독교적 용어로 표현되었다 할지라도 그 용어의 진정한 의미를 빼버리고 사용된 것이다. 소위 “적극적 사고방식”유의 어떤 것들 말이다. 그것은 20세기에 굉장한 인기를 모았다.
그 다음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다 지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을 생각해 보라. 깊은 명상, 사상을 가미한 철학운동과 활동, 현대인의 수준에서 현대인을 만나려는 시도, 원자(原子)시대에 사는 인간들에게 합당한 메시지를 찾아내려는 노력 등등 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그릇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설교단에 선 사람의 할 일이 아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금과 은의 범주 안에 넣으려고 한다. 세상은 그렇게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메시지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의 효과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해둔다. 설교는 반드시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해야 한다. 내가 강조했듯이 설교는 전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생겨나는 효과나 결과는 부수적인 것이며, 메시지 전달과정에서 나온 결과요 추이(推移)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메시지의 요지를 나타내는 것과 시사성있는 설교를 전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시사(時事)에 적용시키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고 결과적인 것이지 원초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 시사적인 일은 윤리적, 철학적, 사회적, 정치적 모임이나 단체 안에서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 일을 하라고 부름을 받지 않았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게 있는 것으로”라는 말 속에 있다. 사도바울은 그 점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바울이 자주 사용한 다른 말은 “사신(대사)”이란 말이다. 사신은 자기의 생각이나 견해, 자기 소원을 말하지 않는다. 사신의 신분에 있어서 가장 진수가 되는 점은 그가 다른 사람 대신 말하라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것이다. 그는 반드시 그 일을 해야 한다. 다른 말로 설교내용은 신약에서 “말씀”(the Word)이라 칭한 것이다. “말씀을 강론하다”, “복음을 전하다.” 또 그것을 해석하면 “성경의 메시지”를 의미한다.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받은 바요 가지고 있는 바다-“내게 있는 것.” 우리는 이것을 받았고 그것은 내게 맡긴바 되었다. 나는 내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나타내지 않으며,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생각하고 추측하는 것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받은 바를 전해준다. 나는 매개체요 통로요 도구요 대리자이다.
케리그마와 디다케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두 가지 주요 항목으로 나눠져야 한다. 성경의 메시지 가운데 이 두 항목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첫째, 구원의 메시지라 할 수 있는 케리그마로서 전도설교를 결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교훈적인 면으로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정립시켜 주는 것인 디다케, 즉 성도의 덕성함양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언제든지 그어놓아야 하는 구분이다. 이것은 우리가 설교를 준비할 때 하나의 중요한 지배요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첫째, 구원의 메시지, 복음전도 설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데살로니가전서의 단 두 절 말씀 속에서 이에 대한 완벽한 요약이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기가 처음 그들 가운데로 왔을 때,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전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데살로니가에 생긴 교회에 전한 말씀은 이러하다.
(살전 1:9-10, 개정)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바울은 그것의 또 다른 요약을 그가 예루살렘으로 떠나려 할 때 그를 전송하러 나온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별인사로 말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그에 대한 아름다운 기사(記事)가 나와 있다. 그는 그들에게 자기의 말씀 강론의 성격을 상기시켰다. 그는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전전하면서 “강론하며 눈물로” 가르쳤다. 그가 가르친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행 20:17-21)이다. 이것이 자기 자신이 전한 메시지에 대한 사도의 요약이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이 설교형식은 맨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선언한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이름 있는 전도설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사심과 능력과 영원에 대한 선언으로 이어져 나간다. 이것은 신약 어디서나 그 점을 발견하실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바울이 아덴에서 행한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알리리라.” 누구를? “하나님을” 우상과 대조하여 하나님에 대해 설파했고 우상이 허무함과 아무것도 아님을 파헤쳤다.
그 다음 율법을 말하게 된다.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의 율법을 얘기하게끔 한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전체 관계, 이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여 그들을 회개하도록 인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 다음에 오직 유일하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해 주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구원의 메시지이다. 그것이 소위 전도설교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요한복음 3:16에 나와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또 다른 면이 있는데 그것은 “성도들을 견고히 세워주는 교훈”이다. 나는 이것을 두 항목으로 나누려 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더욱 체험적인 면에 치중한 것과 순전히 교화적인 설교를 뜻하는 것이다.
모든 설교는 사실상 최소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질 수 있다는 것이다. 원초적으로 전도적인 설교는 일주일에 최소한 한 번은 있어야 한다. 주로 체험적인 것으로 교훈을 주는 설교를 나는 주로 주일 아침에 전했다. 그리고 보다 순수한 교훈적인 설교가 있는데, 주간의 어느 한 날 밤을 택하여 그 설교를 했다.
Ⅰ 세 번째 반론
“그 모든 것이 그룹토의에 의해서 더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는가? 구태여 설교여야만 하는가? 설교가 끝날 무렵 더 많은 문제를 내놓고 교회 안에서 이제까지 그 설교를 들어온 모든 사람들과 설교한 목사가 대화를 나누어서는 안될까?” 이렇게 하는 것이 훌륭한 전도방법일 뿐 아니라 성경의 메시지를 인식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며, 그 방법이 현대에 있어서는 설교하는 것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개인적인 회고담
1942년 그 당시 유명했던 조우드 박사(Dr. C. E. M. Joad)와 종교문제에 대한 공개토론을 옥스퍼드 대학의 ‘토론협회’에서 청탁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초청장을 반송하고 그 토론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통고했다. 그러자 내가 나쁘다느니, 복음전도나 설교할 수 있는 그런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느냐느니, 또한 조우드 박사 명성 그 자체가 매력을 끌어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그 토론에 귀를 기울일텐데...그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내가 전도의 기회를 거절하고 놓친 것이라고 느꼈다.
공개토론의 초청에 응하지 않은 이유
첫째로, 하나님은 토론되거나 논박될 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계신 분이며 자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불신자는 그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진리이다. 불신자들이 동의하든 안하든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시다.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임무이다. 우리가 그런 입장을 취하고 하나님이 토론이나 변론이나 검증의 대상이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나의 이 주장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것이다(출 3:1-6). 모세는 갑자기 떨기나무가 타는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 놀라운 광경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가까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문득 그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바로 이 말씀이 전체 문제를 지배하는 원리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더 중요하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언제나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기쁘시게 할 분이시고,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이다(히 12:28-29).
이것은 사활을 좌우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거드름을 피우면서 안락의자에 앉아 담배나 파이프를 물고서 인과논법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논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철학적인 미지수(X)나 어떤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엄위와 영광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 분이시다. 다른 사람이야 어쨌든 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철학적인 명제로 착각하여 하나님에 관해 토론하는 처지로 빠져들어가서는 안 된다.
두 번째 이유는, 이런 문제를 토론하는 데서 우리는 생의 가장 심각하고 가장 중대한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다루게 될 것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우리와 관계되는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도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주제의 성격과 본질 자체가 가장 심각하고 숙고하기에 알맞은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고는, 하나의 경박한 정신과 변론정신을 가지고는 그 일에 손을 대어서는 안되는 것이 확실하다. 그것을 토론하는 것을 흥밋거리로 여겨서는 더욱 안된다.
셋째로, 영적으로 무식한 자연인, 즉 비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러한 토론이나 논쟁, 또는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말은 자연인이 영적인 일에 소경으로 어두운 상태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14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다. 비그리스도인은 영적 이해의 문외한이다. 그러므로 불신자가 이런 일을 할 수 없으니 그런 사람과 토론할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 다음은 자연인이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겸손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비그리스도인과 무엇을 할 수 있기 전에 꼭 필요한 것이다. 자연인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는 그의 오만함에 있다. 이 문제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후반부에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지혜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육에 속한 자연인은 먼저 교만을 꺾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모든 사람은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아는 모든 것, 그들의 모든 됨됨이, 그들의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그들이 행한 모든 것이 이 점에서 볼 때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전적인 파탄(破綻)을 깨닫게 되어,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는 한 그들에겐 아무 소망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토론하거나 변론하지 말 것이며, 해서는 안된다. 그런 일을 한다면 최상의 기독교의 전제를 부인하는 것이다. 실로 우리 주님은 그것에 대해 강력하게 말씀하신다.
(마 11:25-27, 개정)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진리는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조명을 통해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진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거나 토론, 논쟁하고자 하는 모든 견해는 바로 그 복음 자체의 성격과 본질에 반대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더 큰 논증과 반론
그것은 소위 이론상으로는 흠잡을 데 없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들으러 오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참다운 설교가 전해질 때 사람들은 모이게 될 것이다. 이미 나는 역사적으로 볼 때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이 언제나 그래왔다는 증거를 끌어냈던 것이다. 그 점은 오늘날도 역시 같다고 주장한다. 나는 교회 역사상 말씀 증거에 대한 기회와 필요성이 고통당하는 현대보다 더 절실했던 시대가 거의 없었음을 주장한다.
Ⅱ 설교란 무엇인가?
그러면 설교(Sermon)은 무엇인가? 내가 설교라고 할 때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어떠한 정의이든지 그것이 진정한 설교의 정의가 되려면 반드시 설교단에 선 사람은 거기서 하나님의 메시지, 곧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한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의 사신(使臣)”이다. 그 점이 그 사람의 신분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이다. 그는 보냄을 받았으며 임명받은 사람이요, 그가 강단에 서 있는 것은 그들에게 그저 담화하거나 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설교자와 듣는 자 사이의 하나의 거래이다. 설교는 인간 영혼과 전인격, 전인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한다. 설교는 듣는 사람의 문제를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으로 다루어 주는 것이다.
“나는 목사님의 이 산상설교 연구에 대해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의 산상설교 강해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학식 있는 목사들과 교수들로부터 많은 책을을 추천받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들 책에 대해 느낀 것은 언제나 자기들끼리만 아는 소리였지 나에게는 무엇인가를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것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설교에는 언제나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서 생사문제와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져야 한다. 설교는 단순한 지식의 분배가 아니다. 그보다 더 큰 무엇이다. 만일 우리가 이 점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설교는 실패할 것이다.
설교란 전인을 다루는 것이고, 듣는 이가 감복하게 되어 이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루시고 계시며 자기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그 설교를 듣는 자 안에서 일어나고 무엇인가가 체험되며 그렇게 되어 설교가 전 인생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Ⅲ 설교의 두 가지 요소
1 설교의 내용, 혹은 메시지-즉 말하는 내용이다.
2 설교행위이다. 즉 “전달”, 혹은 흔히 말하는 “전파”이다.
나는 메시지와 메시지의 분배 혹은 메시지의 전달 사이에 진정한 구분을 강조하고 싶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구분을 하는지 영국의 번마우스(Bourne-mouth)의 존스박사가 한 말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어떤 곳에서 설교를 하고 목회자와의 만남의 자리에 질문에 답을 하게 된다.
“나는 내가 설교를 들은 사람중에 누가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던가를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들은 설교중 가장 훌륭한 설교는 존 휴턴씨의 설교였습니다.”
이 대답은 치명적으로 중요한 설교와 전달행위사이의 구분을 아주 잘 부각시켜 주고 있다. 가장 위대한 설교자가 누구냐는 너무 포괄적인 문제로 설교자의 인격, 그의 성품, 설교 내용 등 전부를 포함해야 하므로 확실하게 규정짓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전파행위, 즉 메시지의 전달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Ⅳ 메시지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의 설교, 곧 메시지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특정한 점에 대해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아주 훌륭한 성경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을 때 베드로가 한 말이다. 그들은 갑작스레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한 불구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사람은 무엇을 얻을까 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았다. 그는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동냥을 받았다. 세상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그를 치료할 수는 없었지만 생존하도록 도울 수는 있었고, 그럼으로써 무엇인가 그의 생활을 낫게 하고 어느 정도의 위안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대하는 것을 받지 못했다. 베드로는 말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1-6).
베드로의 진술은 우리로 하여금 메시지의 내용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우선적으로 메시지나 설교는 단순히 시사적인 내용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간에 일어난 사건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정치적인 일이나 기타 좋아하는 사건들 등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겐 메시지가 하나의 일반적 정신함양이나 일종의 심리학적 요법이다. 그런 메시지가 설혹 기독교적 용어로 표현되었다 할지라도 그 용어의 진정한 의미를 빼버리고 사용된 것이다. 소위 “적극적 사고방식”유의 어떤 것들 말이다. 그것은 20세기에 굉장한 인기를 모았다.
그 다음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다 지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을 생각해 보라. 깊은 명상, 사상을 가미한 철학운동과 활동, 현대인의 수준에서 현대인을 만나려는 시도, 원자(原子)시대에 사는 인간들에게 합당한 메시지를 찾아내려는 노력 등등 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그릇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설교단에 선 사람의 할 일이 아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금과 은의 범주 안에 넣으려고 한다. 세상은 그렇게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메시지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의 효과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해둔다. 설교는 반드시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해야 한다. 내가 강조했듯이 설교는 전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생겨나는 효과나 결과는 부수적인 것이며, 메시지 전달과정에서 나온 결과요 추이(推移)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메시지의 요지를 나타내는 것과 시사성있는 설교를 전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시사(時事)에 적용시키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고 결과적인 것이지 원초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 시사적인 일은 윤리적, 철학적, 사회적, 정치적 모임이나 단체 안에서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 일을 하라고 부름을 받지 않았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게 있는 것으로”라는 말 속에 있다. 사도바울은 그 점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바울이 자주 사용한 다른 말은 “사신(대사)”이란 말이다. 사신은 자기의 생각이나 견해, 자기 소원을 말하지 않는다. 사신의 신분에 있어서 가장 진수가 되는 점은 그가 다른 사람 대신 말하라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것이다. 그는 반드시 그 일을 해야 한다. 다른 말로 설교내용은 신약에서 “말씀”(the Word)이라 칭한 것이다. “말씀을 강론하다”, “복음을 전하다.” 또 그것을 해석하면 “성경의 메시지”를 의미한다.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받은 바요 가지고 있는 바다-“내게 있는 것.” 우리는 이것을 받았고 그것은 내게 맡긴바 되었다. 나는 내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나타내지 않으며,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생각하고 추측하는 것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받은 바를 전해준다. 나는 매개체요 통로요 도구요 대리자이다.
케리그마와 디다케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두 가지 주요 항목으로 나눠져야 한다. 성경의 메시지 가운데 이 두 항목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첫째, 구원의 메시지라 할 수 있는 케리그마로서 전도설교를 결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교훈적인 면으로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정립시켜 주는 것인 디다케, 즉 성도의 덕성함양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언제든지 그어놓아야 하는 구분이다. 이것은 우리가 설교를 준비할 때 하나의 중요한 지배요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첫째, 구원의 메시지, 복음전도 설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데살로니가전서의 단 두 절 말씀 속에서 이에 대한 완벽한 요약이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기가 처음 그들 가운데로 왔을 때,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전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데살로니가에 생긴 교회에 전한 말씀은 이러하다.
(살전 1:9-10, 개정)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바울은 그것의 또 다른 요약을 그가 예루살렘으로 떠나려 할 때 그를 전송하러 나온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별인사로 말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그에 대한 아름다운 기사(記事)가 나와 있다. 그는 그들에게 자기의 말씀 강론의 성격을 상기시켰다. 그는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전전하면서 “강론하며 눈물로” 가르쳤다. 그가 가르친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행 20:17-21)이다. 이것이 자기 자신이 전한 메시지에 대한 사도의 요약이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이 설교형식은 맨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선언한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이름 있는 전도설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사심과 능력과 영원에 대한 선언으로 이어져 나간다. 이것은 신약 어디서나 그 점을 발견하실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바울이 아덴에서 행한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알리리라.” 누구를? “하나님을” 우상과 대조하여 하나님에 대해 설파했고 우상이 허무함과 아무것도 아님을 파헤쳤다.
그 다음 율법을 말하게 된다.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의 율법을 얘기하게끔 한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전체 관계, 이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여 그들을 회개하도록 인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 다음에 오직 유일하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해 주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구원의 메시지이다. 그것이 소위 전도설교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요한복음 3:16에 나와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또 다른 면이 있는데 그것은 “성도들을 견고히 세워주는 교훈”이다. 나는 이것을 두 항목으로 나누려 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더욱 체험적인 면에 치중한 것과 순전히 교화적인 설교를 뜻하는 것이다.
모든 설교는 사실상 최소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질 수 있다는 것이다. 원초적으로 전도적인 설교는 일주일에 최소한 한 번은 있어야 한다. 주로 체험적인 것으로 교훈을 주는 설교를 나는 주로 주일 아침에 전했다. 그리고 보다 순수한 교훈적인 설교가 있는데, 주간의 어느 한 날 밤을 택하여 그 설교를 했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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