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회심에 나타난 성령 사역의 결과
회심에 나타난 성령 사역의 위대한 결과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에 잘 요약되어 있다.
1. 회심과 함께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경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회심할 때, 그리스도와 연합된다고 선언한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 영적인 몸의 한 지체가 되는 것이다. 이 연합으로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되며 그리스도는 그와 함께 거하시게 된다.
이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그도 함께 죽은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사망에서 부활하셨을 때 그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이다. 죄인의 죄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간주되고 그리스도의 의는 그의 것으로 전가된다. 이 연합의 법적인 결과들은 칭의와 죄의 사면, 그의 전인(全人)의 영접, 하나님의 양자 됨, 그리고 최종적인 천국 입성 등이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위하여 주신 모든 특권과 약속들을 수여받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대한 결과는 그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그의 전인이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생명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모든 백성들은 이 기름부음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5-16).
성경에서는 이러한 진리를 다른 비유로 묘사하고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이며, 이것으로 인해 모든 회심한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연합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혹은 우리가 어떻게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당할 수 있느지에 대해 질문한다면,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답을 얻게 될 것이다. 믿음은 죄인을 구세주와 연합시킨다. 그 어떠한 불신자도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그 어떠한 신자도 그리스도 밖에 있을 수 없다.
명목적이며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는 지상교회의 조직과 구조 속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그러한 사람들의 경우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요15:2).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는 바로 믿음이 없는 명목적 신자를 가리킨다. 비근한 예로, 육신적 가지인 유대인 그들은 하나님의 가견적 교회의 구성원들이었으나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포도나무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롬11:24). 이에 반해 돌감람나무의 가지들이며 참포도나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던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당하였다. 믿음은 가장 강력한 연합을 의미하는 동맹임을 알 수 있다.
2. 새로운 창조로서의 회심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이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다시 말하면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새 창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 성경 구절을 대조함으로써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6:15)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이 두 구절을 대조해 보면 첫 번째 구절의 ‘새로 지으심’이란 단어가 바로 두 번째 구절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즉,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란 죄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회심하고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죄인의 영혼에 조성된 새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살게 만드는 살아 있고 활동적인 믿음이다. 이것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
사랑이란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이며, 모든 받으실 만한 순종의 원천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사랑은 믿음에 의해 움직이며, 육체와 영혼의 모든 기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만드는 원천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가슴에 각성된 사랑의 반응이 생기지 않고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랑의 메시지로서의 복음을 결코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반드시 사랑해야만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그분의 사랑으로 인하여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복음의 메시지는 이 강력한 원리를 시행하기에 충분한 메시지이다. 복음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곳마다 복음의 완성, 온 율법의 완성을 보게 된다. 우리는 완전함의 보증인 사랑을 산출하는 믿음을 볼 것이며, 그 사랑을 통해 모든 의의 열매들을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죄인의 인격은 철저하게 변화될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려면 먼저 위대한 변화가 죄인의 마음에 발생해야 한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큰 인상을 받고 과거의 더러운 습관들을 끊어 버리고자 하는 결심을 하여 실제로 외면적인 개선과 개혁의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적 개선의 노력조차도 함정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새로운 창조는 오직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창조는 그것으로부터 도덕적 개선이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도덕적 삶의 참회와 개선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새 창조는 지성과 마음의 변화로 구성되어 있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골3:9-10). 그것은 오직 참된 의의 열매들이 계속해서 자라갈 수 있는 뿌리가 되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예의 바른 삶, 즉 단순한 도덕적 삶은 법이나 정책, 그리고 사리분별과 교육, 다른 사람의 모범이라는 많은 뿌리로부터 파생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덕은 오직 신앙의 열매이자 결과이다. 열매의 본질은 그 나무의 본질에 의해 좌우된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먼저 좋은 나무가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회심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발생하는 이 위대한 변화의 본질과 범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1)회심의 첫 번째 결과-새로워진 관계
죄인은 이제 새로운 상태에 진입했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다. 즉,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철저하게 변화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과거에 그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었다(롬1:18). 그러나 이제 평강의 상태에 진입해 있다(롬5:1). 전에 그는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있었다(롬8:7). 그러나 이제 그는 화해의 상태에 진입해 있다(골1:21-22). 따라서 그는 사망에서 떠나 생명으로 옮겼고, 사탄의 종 되었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를 누리를 자리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
2)회심의 두 번째 결과-새로워진 지식
죄인은 이제 성령 하나님의 교훈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삶(자신의 본질과 삶의 허무와 짧음, 불확실성 등), 세상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이해(세상의 화려함과 멸망, 사악함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정욕들 등)를 소유했기에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는 진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진다. 오랫동안 익숙하게 읽고 들어왔던 말씀들이 이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진리의 신적 위엄과 확실성, 그리고 진리의 고결함과 자신의 영혼과 관계된 중요성을 보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본성, 완전하신 성품, 위대한 사역들, 섭리하시는 방법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들이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이전에는 이 모든 것들이 그의 눈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그가 가장 자주 묵상하고 생각하는 주제가 되며, 자신의 영에 경이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되었다.
이제 ‘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된다. 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 자신의 영혼과 관계되는 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과거와 같이 죄를 가볍게 취급하는 대신 그 죄를 마음에 짐으로 여긴다. 입 안에서 맛나게 굴리는 한 알의 사탕처럼 생각하는 대신 쓴 뿌리로 여기는 것이다.
3)회심의 세 번째 결과-새로워진 감정
그 죄인은 이제 새로운 감정을 덧입었기 때문에, 아니 자신의 모든 감정이 새롭고 가치 있는 대상을 향하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다. 전에는 감정들이 세속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감정을 가진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이러한 사랑의 감정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증거와 하나님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더 강화된다.
4)회심의 네 번째 결과-새로워진 소망
신자의 감정의 대상이 새로워졌다는 것은, 곧 그의 소망과 목표가 새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에는 자신의 욕망과 목적이 전적으로 세상 중심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으로 바뀌었다. 이제 그의 목적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그분을 즐거워하며, 그 하나님과 교제를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그분의 임재하심의 달콤함을 더 많이 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을 따르게 되며,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가기를 원하게 된다(시4:6-7, 63:8, 63:1-2).
5)회심의 다섯 번째 결과-새로워진 기쁨
신자는 이제 새로운 기쁨을 소유했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 기쁨은 신자의 은혜로운 감정 작용으로부터 흘러 나오게 된다. 이 기쁨은 신자의 지성에 파고든 새로운 견해와 지식으로부터 흘러 나오며 그가 받은 축복의 특권과 사명으로부터 흘러 나오고,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내적 평강의 달콤함으로부터 흘러 나온다. 또한 하나님과 함께하는 안락한 교제로부터 흘러 나오며 하나님 앞에 화목된 자로 서 있는 그의 새로워진 삶의 모든 국면으로부터 흘러 나온다.
따라서 이제 신자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알고 즐거워한다. 양심의 평강으로 인해 기뻐하고, 모든 이해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자신의 모든 죄악이 용서되었음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는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잠3:17)라는 것을 아는 자가 된 것이다.
6)회심의 여섯 번째 결과-새로워진 행실
전에는 하나님의 뜻과 모순 되었던 습관이 이제는 새로워졌기에 그는 전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다. 과거의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 있었다면 무엇이든지 즉시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인생의 나침반은 더 이상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된다. 바로 틀림없고 무오하신 하나님의 법칙이 그의 전 인생을 통제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무엇을 행하여야 하오리까?”라고 외치는 것이 그의 심정이 된다.
7)회심의 일곱 번째 결과-새로워진 기대
신자는 새로운 기대와 소망을 소유했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는 이제 단순히 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기 위해 예비하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을 소망하게 된다. 그는 복음의 메시지가 던지는 빛을 통해 이러한 새생명과 영생을 인식하고, 그것이 참되고 확실한 것임을 확인한다.
8)회심의 여덟 번째 결과-새로워진 경험
신자는 새로운 경험, 특별히 자신의 영혼 안에서 새로운 갈등과 전투를 경험하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갈등과 동일한 전투이다. 즉, 신자의 지체 속에서 하나의 법과 신자의 마음의 법이 싸우는 것이다.
물론 회심하지 않은 죄인에게도 의식할 수 있는 갈등이 있다. 그것은 죄와 양심의 갈등이다. 그러나 죄인이 거듭나면 새로운 전투가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죄와 의지와의 전투이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점은 전적으로 의지가 어느 편에 서 있느냐 하는 것에 있다. 회심하지 않은 죄인의 경우, 의지는 죄의 편에 서서 죄와 함께 양심을 반대하고 공격한다. 그러나 거듭난 죄인의 경우에는 의지가 양심의 편에 서서 의지와 양심이 한 편이 되어 죄를 반대하고 공격하게 된다. 즉, 회심한 죄인은 의도적으로 양심의 편에 서지만 회심하지 않은 죄인은 고의적으로 죄의 편에 선다. 의지가 그 위치를 변경하게 될 때, 즉 의지가 죄와의 동맹을 끊고 양심과 하나님의 편에 서게 될 때, 바로 그때가 위대한 변화가 발생하는 때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갈등과 전투는 계속된다. 그것은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우기 때문’이다(롬7:23 참고). 그래서 어쩌면 우리의 인생을 전투하는 인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투는 매우 극심하고 고통스러우며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기 때문에 종종 신자로 하여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외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투, 즉 우리 안에 있는 의지가 하나님과 거룩의 편에 서고자 하는 경향을 가진 것은 ‘우리가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이러한 전투는 새로운 피조물에게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이다.
이제 여러분은 성경 말씀이 ‘모든 것이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지, 모든 것이 완전하게 되었다라고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변화가 시작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연약하여서 계속해서 성장하고 강해져야 하는 갓 태어난 아이와 같은 새로운 피조물을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죄와 사망의 몸에 둘러싸인 새로운 피조물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직도 여전히 죄가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죄가 폭군처럼 신자의 마음을 전적으로 통치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마음을 대적하는 매국노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스파이처럼 치밀하게 신자의 마음을 노리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우리 주님께서 이러한 영적 전투에서 우리를 완전하게 해방시켜 주실 때까지, 그리고 우리를 당신의 영원하신 나라로 완전히 옮겨 주실 때까지 죄를 경계해야 하며, 그것을 대적하고 그것과 맞서 싸울 수 있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3. ‘나는 정말 새로운 피조물인가?’
그러하다면 모든 사람이 질문해야 할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삶과 죽음에 있어서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화목되어 죄를 용서받고 용납된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 즉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것을 의미하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유업을 이을 자,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 즉 중생받고 거룩해지며, 영광에 이를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신이 과연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당신은 이제까지 설명한 변화를 경험했는가? 당신의 생각이 변했는가? 당신의 감정의 대상이 바뀌었는가? 당신을 압도했던 욕구들이 바뀌었는가? 당신이 가장 즐거워하는 기쁨의 원천이 바뀌었는가? 당신의 외적인 습관들과 내적인 경험이 변화되었는가? 성경이 ‘새로운 피조물’과 ‘거듭남’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상응하는 변화를 경험했는가?”
2부. 성경에 나타난 회심의 실례
【루디아의 회심】-행16:13-15
성경에 기록된 모든 회심 사건에는 우리가 반드시 진지하게 고찰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적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통상적으로 회심의 수단이 되는 진리의 말씀을 모든 참된 회심자의 마음에 적용하심으로써 기독교 신앙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1. 루디아의 놀라운 회심
루디아의 이야기는 너무나 짧게 기록되어 있지만, 회심과 세례 이전의 그녀의 상태와 인격에 대해 이 사건은 몇 가지 암시를 포함하고 있다. 루디아는 유대인 신앙으로 개종한 자였으며, 참되고 살아 계신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신자였다. 이방인 태생인 루디아는 두아디라 출신이었으며, 빌립보에 와서 자주(紫紬 자주빛 나는 명주) 장사를 시작했다. 또한 루디아는 정말 경건한 자로서 기도의 영에 사로잡힌 여인이었다. 루디아는 모세의 율법을 따라 안식일을 준수했을 뿐만 아니라, ‘늘상 하던 기도를 하기 위해 문밖 강가의 기도처’로 나갔던 자였다(행16:13 참고).
회심의 순간에 이 경건한 루디아는 습관을 따라 몇몇 여인들과 함께 강변에서 모인 공중 ‘기도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이렇게 기도하는 적은 무리의 여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 주었다는 사실 역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그들이 기도와 말씀 청종에 매진하고 있는 동안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셨던 것’이다. 이것은 그녀의 마음이 여전히 예수 안에 있는 진리의 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닫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은혜로우신 성령의 특별한 역사하심이 아니고서는 복음의 메시지가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것도 확실히 증거해 주는 말씀이다.
중생받지 못한 자들은 복음의 빛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이해와 지각의 기능이 닫혀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마치 소경처럼 그 마음이 닫혀서 보지 못했던 유대인들과 같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3:14).
그들의 마음은 강퍅해져서 진리의 말씀이 개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 가운데는 무지의 장애물(행28:26),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을 거부하는 불신앙의 장애(롬8:7), 교만이라는 장애(시10:4), 낙담과 절망이라는 장애(렘2:25), 반항이라는 장애(요5:40), 세속적 마음이라는 장애(막4:19), 게으름이라는 장애(잠6:10), 사악한 욕망과 타락한 습관이라는 장애가 있다. 이러한 장애의 영향과 유사한 방해 때문에 사람의 마음이 진리의 말씀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닫혀진다. 그들은 참으로 소경처럼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처럼 듣지를 못한다.
만일 루디아가 경건하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인이었다면, 과연 그녀의 마음이 하나님의 진리를 수용하지 못할 만큼 닫혀 있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일까? 아무리 참된 경건의 소유자들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의 비추심이 없다면, 여전히 많은 무지와 근거 없는 선입견에 둘러싸여 복음을 영접하지 못할 수도 있다.
2. 루디아의 회심의 수단으로서의 성령과 말씀
루디아의 회심을 낳은 수단들을 잘 살펴보면, 이 사건에는 그 어떠한 이적적인 요소도 동반되지 않았으며, 단지 모든 참된 회심자의 경험에 발생하는 요소만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의미심장한 이 진술은 죄인의 회심에 없어서는 안 될 두 가지 본질적인 요소를 제시한다. 하나는 ‘중재자’로서의 성령의 사역이고, 다른 하나는 ‘수단’으로서의 말씀사역이다.
우선 루디아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격적 사역이 있다. 성령께서는 위에 언급했던 장애들, 즉 진리의 지식을 수용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들을 제거하신다.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신 분은 바울이 아니다. 바울은 다만 설교를 했을 뿐이다. 마음을 열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이처럼 성령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위대한 변화가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 말씀이 포함하고 있는 진리를 통해서이다. 이 말씀을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벧전1:23).
3. 루디아의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이렇게 변화되어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그녀의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었다. 이것은 새로 창조된 모든 영혼이 소유하는 믿음이다. 왜냐하면 루디아가 곧이어 받은 ‘세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녀의 믿음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례를 받자마자 사도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했다. 그녀의 믿음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종들을 위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었으며, 그리스도의 목적과 사역을 위하여 거룩한 열정을 생산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믿음이었다. 만일 그녀의 마음에 믿음과 사랑의 원리가 참되게 심겨졌다면, 그녀 역시 세례 받은 이후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모든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었을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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