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설교자
지금까지 설교하는 일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그 다음에 논리적으로 오는 물음은 ‘누가 이런 일을 하는가? 누가 설교하는 자인가?’ 또는 성경에 있는 데로 하면 ‘누가 이런 일을 감당하겠느냐?’가 될 것이다.
1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을 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평신도 설교(lay-preching)는 비성경적이다.
이는 100여년 동안 아주 일반적으로 실제화되었다. 그전만 해도 이런 일은 비교적 드문 일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신학적인 데서 기원했었다는 것이다. 평신도 설교의 상승추세에 부채질을 한 것은 지난 세기동안의 신학적인 변동, 개혁적인 칼빈주의자적 자세로부터 주로 알미니아으로의 변동이다. 그것의 원인과 결과를 볼 때 궁극적으로 알미니안은 비신학적이라는 것이다.
평신도 설교에 현대적 관점은 감리교와 형제교회의 가르침에서부터 크게 발생하였는데 설교자는 그의 직업이나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가를 이용하여 설교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예외적인 환경이 있다. 내가 시험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든지 설교할 수 있다거나 그래야 한다는 견해이다. ‘새로운 자에게 할 일을 주라. 그리고 설교하고 간증하도록 그를 보내라.’ 대부분이 찰스 피니와 무디의 영향에 기인할지도 모른다. 무디는 새로운 개심자들에게 일거를 주어야 한다는 사상에 아주 열심이었다.
1 비평적 성경적 근거
벧전3:15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는 말씀과,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씀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차이가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설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사도행전 8:4-5에 가장 흥미롭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여기서 전했다란 말을 두 번이나 대하게 된다. 그러나 원문에는 이 두 절에 똑같은 어휘가 사용되지 않았다. 이는 아주 중대한 구별이다. 여러 곳으로 간 ‘사람들’이 행한 것을 번역한다면, 말씀을 “소문내다(퍼뜨리다, gossip)이다. 그것은 대화형식의 얘기로 나눈 것이었다. 반면에 빌립이 행한 것은 좀 달랐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고(herald) 있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4절에 자시된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5절에서 지시된 일에는 몇몇 사람들만이 소명을 받았다.
신약에는 이러한 구분이 아주 명확히 그어져 있다. 어떤 사람들만이 메시지를 전하도록 별도로 소명을 받은 것이다. 바로 그 행위는 장로들에게 한정되어 있으며 그것은 그들 가운데 몇몇에게만 국한된다. 가르치는 장로, 즉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장로들인 목사와 교사들을 말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설교하는 일이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전도인들과 이와 같은 유의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2 평신도에 설교에 대한 궁극적 비판
소명에 대한 전반적인 관점이 완전히 틀려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부업으로 행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설교에 대한 그릇된 접근방법이며 그릇된 태도이다.
Ⅱ 설교자(전도자)로 부름을 받았는지 점검하고 확증하라
1 소명은 어떤 사람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형태로 출발한다.
어떤 압력이 자기의 심령에 가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고 영계에 어떤 혼란이 일어나는 느끼게 된다. 그런데 마음이 전도해야 한다는 모든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그 사람은 그것을 일부러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소명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다루고 계시는 것이다. 그의 성령으로 그 사람에게 역사하는 것이다.
2 영계에서 일어나는 있었던 것이 그 사람에게 말하며 질문들을 던지는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통해서 확실하게 되고 드러나 보이게 된다. 많은 사람의 전기에 보면 말씀을 증거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젊은 사람이 장로나 교회사람 중에서 영적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들에게 “자네는 복음전도자로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3 다른 사람들에 대한에 관심으로 발전되어 나간다. 나는 이것을 목회에 종사하는 것을 하나의 직업이나 하나의 ‘생업’으로 생각하는 피상적인 사상에 대조시키고 있다. 진정한 소명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걱정, 즉 그들의 타락을 뼈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하며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말하고 구원의 길을 알려 주어야 겠다는 소원을 포함하게 된다. 이것이 소명의 진수부분이다.
4 감각-설교외에 다른 일은 할 수 없다는 느낌이 있는가?
“만일 여러분들이 다른 일을 할 수 있거든 그것을 하십시오.” -스펄젼의 말
5 머뭇거리는 마음, 부족하다는 마음, 적합지 못하다는 생각
고전2장에 바울이 “약함과 두려움과 떨림으로” , 고후 2:16에서 반복한다.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이 특별사역에의 하나님의 소명에 관한 바울이 교훈을 필연적으로 질문에 당도하게 된다. 그는 그 점을 이렇게 표현한다.
(고후 2:14-16, 개정)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그것은 역시 평신도도 설교할 수 있다는 사상에 대처한 나의 최종적인 논증이다. 자기 자신을 설교자로 추켜세워 설교단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고 서서 말씀을 증거하고, 자기의 여가를 이용하여 설교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그가 “약함과 두려움과 떨림”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겠는가?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은 사람은 그가 부름받은 일이 무엇인가를 감지하고 그 일의 두려움을 너무나 느낀 나머지 그것에 위축되는 사람이다.
(롬 10:13-15, 개정)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설교자는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의미에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과 우리가 스스로 지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것은 신약의 교훈으로 설교뿐만 아니라 교회의 여러 직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도행전 6장에 집사에 관한 자격이 부여된다. 교회는 주어진 원리 밑에서 이 집사들을 선택한다. 목회서신들 가운데서도 똑같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장로들과 집사들에 관한 자격이 주지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기 전에 그의 인품이 교회에 의해 확증되어야 한다. 반드시 그것은 교회에 의해서 입증되어야 한다.
Ⅲ 소명에 관한 실수 줄이기
교회사나 설교자의 역사는 때로 교회가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아주 명백히 보여준다. 교회가 너무나 여러 번 그렇게 하였고, 하나님에게 분명히 소명을 받은 것이 그들의 기록으로 입증된 사람들을 배척한 일이 있었다 캠벨 몰간(G. Cambell Morgan)이 영국 감리교회에서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이다.
1 더욱 일반적인 경우는 소명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소명받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것을 살펴보고 상황을 조정하는 것은 교회의 임무이다. 나는 언제나 어느 사람이 와서 자기는 전도자(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할 때, 내 주요 임무는 그의 길에다 갖다 놓을 수 있는 모든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이라고 느껴왔다. 더 나아가서 그의 인품과 지능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판단을 가지고 있는지 검토해 본다.
#스펄전에 관한 유명한 일화
어떤 사람이 주일 저녁예배가 끝난 뒤 그에게 와서 하는 말이 “스펄전씨, 성령이 내게 다음 목요일에 이 예배당에서 내가 설교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요? 그것 참 재미있는 일이군요. 그런데 그 성령이 제게는 말씀하시지 않다니 이상합니다.” 그것은 매우 건전한 논리이다. 만일 성령이 이 사람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성령은 스펄전에게도 똑같이 스펄전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셨을 것이다. 성령은 언제나 질서 있게 일하신다.
2 사람의 천성, 야망, 특정 직임에 대한 욕망 등이 사람의 마음속에 설교자가 되어야겠다는 욕망을 조장할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게 된다. 목회자가 직면한는 가장 고통스런 일은 그런 식을 찾아오는 사람을 주저앉히는 일이다. 어떤 근거로 목사는 그 사람을 주저앉히는 것인가? 반드시 적용해야 할 몇 가지 시금석이 있는데 이것은 교회에서 똑같이 적용된다.
Ⅳ 소명에 대한 증거-유별난 점이 있는가?
분명코 교회는 그 사람 안에 유별난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물론 그리스도인이어야 하지만 그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과 동시에 부가적인 무엇이 있어야 한다.
1 사도행전 6장에서 재정과 구제를 전담하는 집사를 세우는 일조차도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어야 했다는 것을 아실 것이다. 그것은 제일되고 최대의 자격이다. 비상한 수준의 영성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점은 그 일의 본질로 보아서 가장 우선해야 한다.
2 그에 덧붙여 진리에 대한 그의 지식과 그것과의 관계성을 확신하는 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만일 그가 스스로 분열되어 문제를 안고 씨름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진리를 발견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이라면, 혹은 확신이 없어서 최근에 읽은 책에 영향을 받기 일쑤이고, “교리에 모든 풍조에 동요”하고 모든 새로운 신학의 물결에 부화뇌동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실 자체가 목회자로 부름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3 설교자는 반드시 경건한 자라야 한다. 그리고 지혜로운 자여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딤후 2:24).
(딛 2:6-8, 개정) 『[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7]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8]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4 사람들과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가?
이상이 우리가 구비하고 있어야 하며, 살펴보아야 하는 일반적인 자질과 특징들이다.
5 재능의 문제는 그러한 자질을 강조하고 나서만 오는 것이다. 재능의 문제를 맨 처음에 놓은 경향은 내가 보기에 현대교회의 비극 중 하나이다. 그것은 처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단계에서만 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그래야 된다.
# 어느 젊은이가 내게 찾아와 자기는 목회에 대한 분명한 소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실상 그 불쌍한 친구는 설교자가 되기에 필요한 지능이 모자란 사람이었다. 그는 결코 예비시험에 합격되지 못할 사람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제 천성적인 지능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사람이려면 그 능력이 있어야 한다. 설교하는 일이 우리가 서술한 식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고 조직신학과 정확한 해당본문의 의미 사이의 관계를 내포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분명히 어느 정도의 지력을 필요로 한다.
6 그 다음에 “말의 재능”을 첨가하려 한다. 설교란 어떠한 사람인가? 분명히 그는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 지망자가 말하는 은사를 받지 않았다면 다른 어떤 것을 가졌다할지라도 설교자는 될 수가 없다. 위대한 신학자가 될 수도 있고 개인적인 조언이나 상담을 하는 데 있어서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규정에 의하여 그 사람이 말하는 소질이 없다면 설교자가 될 수는 없다.
7 이러한 소명에 대한 실수는 스스로에 의해서 야기되기보다는 너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불어넣고 그렇게 하도록 종용하는 목사나 장로들에 의해서 더 많이 야기된다.
# 주일밤에 찾아온 젊은이가 나에게 기독교인 정신과 의사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내 경험상으로 볼 때 기독교 신자인 정신과 의사의 이름을 물으러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의학적인 치료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정신과 의사에게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혼란을 겪고 있고 당황해 있으며 당신이 해낼 수 없다고 느낀 바로 그 사실이 당신이 제정신을 차려 건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신과 의사를 찾아야 했던 때는 당신이 그 전도자의 말을 듣고 대학으로 갔을 때이다. 당신은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다. 가서 제빵업을 다시 하시오. 그리고 노래를 부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성가를 부를 소질을 주신 것입니다. 당신은 목회의 소명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고 당신이 할 수 있을 하십시오.’
이상은 소명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교회가 테스트하는 방식이다. 내가 말하는 의도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 자신을 통해서나 교회의 소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둘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은 같은 분이다. 그 둘 사이의 의견상의 일치를 보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소명이라고 가정해 보는 것이 옳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알아낼 수는 없다. 또한 단지 교회의 압력으로도 목회에 부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Ⅴ 훈련과 준비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
1 어느 정도의 삶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다. 중생도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교자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만약에 이 사람이 이것을 맞추지 못했다면 그의 설교에서 너무 지적이고 이론적인 경향이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앉아있는 사람들의 문제보다도 자기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강단에 서서 그것을 다룰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서 있는 것은 그들에게 설교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려고 거기 서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사사로운 문제들과 고민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려고 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짓을 안하기 위한 안전책은 설교자가 어느 정도의 생활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심령의 훈련의 중요성.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가 훌륭한 지능을 가질 수 있으나 그것은 훈련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각하는 법과 조직적이고 논리적으로 주장을 전개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설교자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를 받쳐주고 입혀주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설교를 더 쉽게 따라가며 더 쉽게 이해하게 할 것이다.
3 좀 더 전문적인 훈련에 들어가게 된다. 맨 먼저 성경지식과 성경의 메시지에 대한 지식이다. 이 방면에 부족한 사람은 참된 설교자가 될 수 없다. 나는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뜻’을 강조한 바 있다. 전반적인 체계와 주요 계획 그리고 ‘조직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성경의 전반적인 지식, 성경을 꿰뚫고 흐르는 것에 대한 지식, 즉 성경의 메시지를 알지 못하고서는 그 일을 할 수가 없다.
4 신학공부. 그저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서 성경신학의 진수를 얻어내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립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다. 설교자는 자기의 모든 설교를 그것의 통제를 받게 하는 데 아주 익숙해 있어야 한다.
5 교회사 연구.
1> 여기서 나는 이단에 빠질 위험성을 배우는 것이 중요함을 특별히 강조하려고 한다.
어느 사람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일 수도, 커다란 체험을 가질 수도, 그래서 그 이상은 필요가 없는 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있고 자기 안에 하나님의 성령을 모시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는 잘한다 생각하고 결국은 자기는 아주 안전하여 모든 것이 잘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야 이단으로 낙인이 찍혀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어 아연실핵하게 되는 일이 있다. 이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한 안전책은 이단에 관한 것을 배워 과거에 이단들이 주로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것도 훌륭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났다는 것이 어찌된 일인가?를 아는 일이다.
2> 아울러 교회사는 교회역사상 있었던 커다란 부흥에 관한 사실을 말해준다. 내 경험상으로 볼 때 나에게 원기를 북돋우는데 있어서 부흥의 역사만큼 내게 힘이 되고 도움을 준 것은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보십시오. 얼마나 용기를 잃고 있는 시대입니까? 자기가 믿는 성경을 펴서 읽고 성령을 모시고 살고 있는 사람마저도, 용기를 잃고 깊은 절망속으로 빠져 들어가 버리는 시대입니다.
프랑스 소설가 프랑스(Anatole France)에 관한 것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그는 위축감이나 절망으로 피로하여 지쳐 있을 때마다 “나는 결코 기분전환이나 쉬기 위하여 시골에 가지않는다. 그 대신 나는 늘 18세기로 간다”고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내가 용기를 잃거나 과로하여 지쳐 있을 때마다 나는 예외없이 18세기로 갑니다. 조지 휫필드가 나의 용기를 일깨우지 않은 적이 없다. 18세기로 가십시오! 다시 말하면 18세기에 있었던 성령운동과 그 커다란 부흥의 조류를 읽으십시오!.
6 끝으로 설교학이다. 이것은 내게 있어서 거의 증오거리에 가깝다. <설교작성의 기술>, <설교예화의 기술> 등의 제목을 붙인 책들이 많이 있다. 내가 볼 때 그것은 매춘해위이다. 설교자란 반드시 언제나 꾸밈이 없어야하고 자기를 의식하지 않아야 한다.
그럼 젊은 설교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른 설교자들이 설교하는 것을 듣도록 하라. 그는 그들로부터 부정적인, 긍정적인 많은 배우게 될 것이다. 또한 설교문을 읽으라. 그러나 1900년 이전에 출판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라. 스펄전, 휫필드, 에드워즈 등 모든 위인들의 설교를 읽으라는 말이다.
설교학의 과제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영혼에 대한 사랑이고, 진리에 대한 앎이요,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이시다. 만일 설교자가 그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하나님을 위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진리를 안다면, 그 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설교(전도)할 것이다. 그것이 커다란 문제이다.
지금까지 설교하는 일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그 다음에 논리적으로 오는 물음은 ‘누가 이런 일을 하는가? 누가 설교하는 자인가?’ 또는 성경에 있는 데로 하면 ‘누가 이런 일을 감당하겠느냐?’가 될 것이다.
1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을 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평신도 설교(lay-preching)는 비성경적이다.
이는 100여년 동안 아주 일반적으로 실제화되었다. 그전만 해도 이런 일은 비교적 드문 일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신학적인 데서 기원했었다는 것이다. 평신도 설교의 상승추세에 부채질을 한 것은 지난 세기동안의 신학적인 변동, 개혁적인 칼빈주의자적 자세로부터 주로 알미니아으로의 변동이다. 그것의 원인과 결과를 볼 때 궁극적으로 알미니안은 비신학적이라는 것이다.
평신도 설교에 현대적 관점은 감리교와 형제교회의 가르침에서부터 크게 발생하였는데 설교자는 그의 직업이나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가를 이용하여 설교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예외적인 환경이 있다. 내가 시험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든지 설교할 수 있다거나 그래야 한다는 견해이다. ‘새로운 자에게 할 일을 주라. 그리고 설교하고 간증하도록 그를 보내라.’ 대부분이 찰스 피니와 무디의 영향에 기인할지도 모른다. 무디는 새로운 개심자들에게 일거를 주어야 한다는 사상에 아주 열심이었다.
1 비평적 성경적 근거
벧전3:15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는 말씀과,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씀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차이가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설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사도행전 8:4-5에 가장 흥미롭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여기서 전했다란 말을 두 번이나 대하게 된다. 그러나 원문에는 이 두 절에 똑같은 어휘가 사용되지 않았다. 이는 아주 중대한 구별이다. 여러 곳으로 간 ‘사람들’이 행한 것을 번역한다면, 말씀을 “소문내다(퍼뜨리다, gossip)이다. 그것은 대화형식의 얘기로 나눈 것이었다. 반면에 빌립이 행한 것은 좀 달랐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고(herald) 있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4절에 자시된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5절에서 지시된 일에는 몇몇 사람들만이 소명을 받았다.
신약에는 이러한 구분이 아주 명확히 그어져 있다. 어떤 사람들만이 메시지를 전하도록 별도로 소명을 받은 것이다. 바로 그 행위는 장로들에게 한정되어 있으며 그것은 그들 가운데 몇몇에게만 국한된다. 가르치는 장로, 즉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장로들인 목사와 교사들을 말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설교하는 일이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전도인들과 이와 같은 유의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2 평신도에 설교에 대한 궁극적 비판
소명에 대한 전반적인 관점이 완전히 틀려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부업으로 행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설교에 대한 그릇된 접근방법이며 그릇된 태도이다.
Ⅱ 설교자(전도자)로 부름을 받았는지 점검하고 확증하라
1 소명은 어떤 사람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형태로 출발한다.
어떤 압력이 자기의 심령에 가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고 영계에 어떤 혼란이 일어나는 느끼게 된다. 그런데 마음이 전도해야 한다는 모든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그 사람은 그것을 일부러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소명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다루고 계시는 것이다. 그의 성령으로 그 사람에게 역사하는 것이다.
2 영계에서 일어나는 있었던 것이 그 사람에게 말하며 질문들을 던지는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통해서 확실하게 되고 드러나 보이게 된다. 많은 사람의 전기에 보면 말씀을 증거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젊은 사람이 장로나 교회사람 중에서 영적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들에게 “자네는 복음전도자로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3 다른 사람들에 대한에 관심으로 발전되어 나간다. 나는 이것을 목회에 종사하는 것을 하나의 직업이나 하나의 ‘생업’으로 생각하는 피상적인 사상에 대조시키고 있다. 진정한 소명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걱정, 즉 그들의 타락을 뼈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하며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말하고 구원의 길을 알려 주어야 겠다는 소원을 포함하게 된다. 이것이 소명의 진수부분이다.
4 감각-설교외에 다른 일은 할 수 없다는 느낌이 있는가?
“만일 여러분들이 다른 일을 할 수 있거든 그것을 하십시오.” -스펄젼의 말
5 머뭇거리는 마음, 부족하다는 마음, 적합지 못하다는 생각
고전2장에 바울이 “약함과 두려움과 떨림으로” , 고후 2:16에서 반복한다.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이 특별사역에의 하나님의 소명에 관한 바울이 교훈을 필연적으로 질문에 당도하게 된다. 그는 그 점을 이렇게 표현한다.
(고후 2:14-16, 개정)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그것은 역시 평신도도 설교할 수 있다는 사상에 대처한 나의 최종적인 논증이다. 자기 자신을 설교자로 추켜세워 설교단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고 서서 말씀을 증거하고, 자기의 여가를 이용하여 설교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그가 “약함과 두려움과 떨림”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겠는가?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은 사람은 그가 부름받은 일이 무엇인가를 감지하고 그 일의 두려움을 너무나 느낀 나머지 그것에 위축되는 사람이다.
(롬 10:13-15, 개정)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설교자는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의미에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과 우리가 스스로 지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것은 신약의 교훈으로 설교뿐만 아니라 교회의 여러 직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도행전 6장에 집사에 관한 자격이 부여된다. 교회는 주어진 원리 밑에서 이 집사들을 선택한다. 목회서신들 가운데서도 똑같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장로들과 집사들에 관한 자격이 주지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기 전에 그의 인품이 교회에 의해 확증되어야 한다. 반드시 그것은 교회에 의해서 입증되어야 한다.
Ⅲ 소명에 관한 실수 줄이기
교회사나 설교자의 역사는 때로 교회가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아주 명백히 보여준다. 교회가 너무나 여러 번 그렇게 하였고, 하나님에게 분명히 소명을 받은 것이 그들의 기록으로 입증된 사람들을 배척한 일이 있었다 캠벨 몰간(G. Cambell Morgan)이 영국 감리교회에서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이다.
1 더욱 일반적인 경우는 소명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소명받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것을 살펴보고 상황을 조정하는 것은 교회의 임무이다. 나는 언제나 어느 사람이 와서 자기는 전도자(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할 때, 내 주요 임무는 그의 길에다 갖다 놓을 수 있는 모든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이라고 느껴왔다. 더 나아가서 그의 인품과 지능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판단을 가지고 있는지 검토해 본다.
#스펄전에 관한 유명한 일화
어떤 사람이 주일 저녁예배가 끝난 뒤 그에게 와서 하는 말이 “스펄전씨, 성령이 내게 다음 목요일에 이 예배당에서 내가 설교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요? 그것 참 재미있는 일이군요. 그런데 그 성령이 제게는 말씀하시지 않다니 이상합니다.” 그것은 매우 건전한 논리이다. 만일 성령이 이 사람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성령은 스펄전에게도 똑같이 스펄전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셨을 것이다. 성령은 언제나 질서 있게 일하신다.
2 사람의 천성, 야망, 특정 직임에 대한 욕망 등이 사람의 마음속에 설교자가 되어야겠다는 욕망을 조장할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게 된다. 목회자가 직면한는 가장 고통스런 일은 그런 식을 찾아오는 사람을 주저앉히는 일이다. 어떤 근거로 목사는 그 사람을 주저앉히는 것인가? 반드시 적용해야 할 몇 가지 시금석이 있는데 이것은 교회에서 똑같이 적용된다.
Ⅳ 소명에 대한 증거-유별난 점이 있는가?
분명코 교회는 그 사람 안에 유별난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물론 그리스도인이어야 하지만 그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과 동시에 부가적인 무엇이 있어야 한다.
1 사도행전 6장에서 재정과 구제를 전담하는 집사를 세우는 일조차도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어야 했다는 것을 아실 것이다. 그것은 제일되고 최대의 자격이다. 비상한 수준의 영성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점은 그 일의 본질로 보아서 가장 우선해야 한다.
2 그에 덧붙여 진리에 대한 그의 지식과 그것과의 관계성을 확신하는 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만일 그가 스스로 분열되어 문제를 안고 씨름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진리를 발견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이라면, 혹은 확신이 없어서 최근에 읽은 책에 영향을 받기 일쑤이고, “교리에 모든 풍조에 동요”하고 모든 새로운 신학의 물결에 부화뇌동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실 자체가 목회자로 부름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3 설교자는 반드시 경건한 자라야 한다. 그리고 지혜로운 자여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딤후 2:24).
(딛 2:6-8, 개정) 『[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7]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8]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4 사람들과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가?
이상이 우리가 구비하고 있어야 하며, 살펴보아야 하는 일반적인 자질과 특징들이다.
5 재능의 문제는 그러한 자질을 강조하고 나서만 오는 것이다. 재능의 문제를 맨 처음에 놓은 경향은 내가 보기에 현대교회의 비극 중 하나이다. 그것은 처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단계에서만 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그래야 된다.
# 어느 젊은이가 내게 찾아와 자기는 목회에 대한 분명한 소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실상 그 불쌍한 친구는 설교자가 되기에 필요한 지능이 모자란 사람이었다. 그는 결코 예비시험에 합격되지 못할 사람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제 천성적인 지능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사람이려면 그 능력이 있어야 한다. 설교하는 일이 우리가 서술한 식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고 조직신학과 정확한 해당본문의 의미 사이의 관계를 내포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분명히 어느 정도의 지력을 필요로 한다.
6 그 다음에 “말의 재능”을 첨가하려 한다. 설교란 어떠한 사람인가? 분명히 그는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 지망자가 말하는 은사를 받지 않았다면 다른 어떤 것을 가졌다할지라도 설교자는 될 수가 없다. 위대한 신학자가 될 수도 있고 개인적인 조언이나 상담을 하는 데 있어서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규정에 의하여 그 사람이 말하는 소질이 없다면 설교자가 될 수는 없다.
7 이러한 소명에 대한 실수는 스스로에 의해서 야기되기보다는 너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불어넣고 그렇게 하도록 종용하는 목사나 장로들에 의해서 더 많이 야기된다.
# 주일밤에 찾아온 젊은이가 나에게 기독교인 정신과 의사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내 경험상으로 볼 때 기독교 신자인 정신과 의사의 이름을 물으러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의학적인 치료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정신과 의사에게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혼란을 겪고 있고 당황해 있으며 당신이 해낼 수 없다고 느낀 바로 그 사실이 당신이 제정신을 차려 건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신과 의사를 찾아야 했던 때는 당신이 그 전도자의 말을 듣고 대학으로 갔을 때이다. 당신은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다. 가서 제빵업을 다시 하시오. 그리고 노래를 부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성가를 부를 소질을 주신 것입니다. 당신은 목회의 소명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고 당신이 할 수 있을 하십시오.’
이상은 소명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교회가 테스트하는 방식이다. 내가 말하는 의도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 자신을 통해서나 교회의 소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둘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은 같은 분이다. 그 둘 사이의 의견상의 일치를 보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소명이라고 가정해 보는 것이 옳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알아낼 수는 없다. 또한 단지 교회의 압력으로도 목회에 부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Ⅴ 훈련과 준비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
1 어느 정도의 삶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다. 중생도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교자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만약에 이 사람이 이것을 맞추지 못했다면 그의 설교에서 너무 지적이고 이론적인 경향이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앉아있는 사람들의 문제보다도 자기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강단에 서서 그것을 다룰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서 있는 것은 그들에게 설교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려고 거기 서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사사로운 문제들과 고민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려고 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짓을 안하기 위한 안전책은 설교자가 어느 정도의 생활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심령의 훈련의 중요성.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가 훌륭한 지능을 가질 수 있으나 그것은 훈련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각하는 법과 조직적이고 논리적으로 주장을 전개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설교자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를 받쳐주고 입혀주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설교를 더 쉽게 따라가며 더 쉽게 이해하게 할 것이다.
3 좀 더 전문적인 훈련에 들어가게 된다. 맨 먼저 성경지식과 성경의 메시지에 대한 지식이다. 이 방면에 부족한 사람은 참된 설교자가 될 수 없다. 나는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뜻’을 강조한 바 있다. 전반적인 체계와 주요 계획 그리고 ‘조직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성경의 전반적인 지식, 성경을 꿰뚫고 흐르는 것에 대한 지식, 즉 성경의 메시지를 알지 못하고서는 그 일을 할 수가 없다.
4 신학공부. 그저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서 성경신학의 진수를 얻어내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립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다. 설교자는 자기의 모든 설교를 그것의 통제를 받게 하는 데 아주 익숙해 있어야 한다.
5 교회사 연구.
1> 여기서 나는 이단에 빠질 위험성을 배우는 것이 중요함을 특별히 강조하려고 한다.
어느 사람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일 수도, 커다란 체험을 가질 수도, 그래서 그 이상은 필요가 없는 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있고 자기 안에 하나님의 성령을 모시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는 잘한다 생각하고 결국은 자기는 아주 안전하여 모든 것이 잘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야 이단으로 낙인이 찍혀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어 아연실핵하게 되는 일이 있다. 이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한 안전책은 이단에 관한 것을 배워 과거에 이단들이 주로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것도 훌륭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났다는 것이 어찌된 일인가?를 아는 일이다.
2> 아울러 교회사는 교회역사상 있었던 커다란 부흥에 관한 사실을 말해준다. 내 경험상으로 볼 때 나에게 원기를 북돋우는데 있어서 부흥의 역사만큼 내게 힘이 되고 도움을 준 것은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보십시오. 얼마나 용기를 잃고 있는 시대입니까? 자기가 믿는 성경을 펴서 읽고 성령을 모시고 살고 있는 사람마저도, 용기를 잃고 깊은 절망속으로 빠져 들어가 버리는 시대입니다.
프랑스 소설가 프랑스(Anatole France)에 관한 것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그는 위축감이나 절망으로 피로하여 지쳐 있을 때마다 “나는 결코 기분전환이나 쉬기 위하여 시골에 가지않는다. 그 대신 나는 늘 18세기로 간다”고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내가 용기를 잃거나 과로하여 지쳐 있을 때마다 나는 예외없이 18세기로 갑니다. 조지 휫필드가 나의 용기를 일깨우지 않은 적이 없다. 18세기로 가십시오! 다시 말하면 18세기에 있었던 성령운동과 그 커다란 부흥의 조류를 읽으십시오!.
6 끝으로 설교학이다. 이것은 내게 있어서 거의 증오거리에 가깝다. <설교작성의 기술>, <설교예화의 기술> 등의 제목을 붙인 책들이 많이 있다. 내가 볼 때 그것은 매춘해위이다. 설교자란 반드시 언제나 꾸밈이 없어야하고 자기를 의식하지 않아야 한다.
그럼 젊은 설교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른 설교자들이 설교하는 것을 듣도록 하라. 그는 그들로부터 부정적인, 긍정적인 많은 배우게 될 것이다. 또한 설교문을 읽으라. 그러나 1900년 이전에 출판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라. 스펄전, 휫필드, 에드워즈 등 모든 위인들의 설교를 읽으라는 말이다.
설교학의 과제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영혼에 대한 사랑이고, 진리에 대한 앎이요,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이시다. 만일 설교자가 그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하나님을 위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진리를 안다면, 그 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설교(전도)할 것이다. 그것이 커다란 문제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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