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스크랩] 로이드존스 목사와 설교 제7장 회중

강대식 2016. 11. 9. 14:47
제7장 회중

새로운 회중의 움직임- 강단을 조정하려는 시도들

설교는 회중석과 강단사이의 관계이다. 이는 이 시점에서 아주 새로운 측면에서 볼 때 아주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이 관계성에 대한 옛 전통적인 생각은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다. 어느 면으로 보든지 그것은 매우 문제시되고 의문시되고 있다.

불트만의 복음서의 비신화화에 대한 기본적인 논증은 현대인, 즉 과학적인 뒷받침과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이적적인 요소로 얽매여 있는 복음서를 믿으리라고 기대하지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그 자체를 표현하는 방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1 이러한 태도는 ‘보통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층에 접근하여 자신을 나타낸다.

오늘날 사람들은 논리가 정연한 진술은 생각하거나 따라갈 수 없다고들 말하는 이들의 소리를 듣는다. 또한 그들은 신문이나 TV, 영화 같은 것에 의해 산출된 모종의 사고방식이나 정신에 너무나 젖어있기 때문에 논리적인 논증을 추종하기 불가능하다고들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들에게 영화나 슬라이드를 보여주고 영화배우들이 말할 수 있도록 하고, 인기가수들이 노래하게 하고, ‘간단한 메시지’와 간증을 하되 복음의 말씀을 한 마디만 가미하여서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2 또 다른 형태는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적 전문용어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칭의나 성화나 영화 같은 용어는 그들에게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용어들은 현대적이 못되고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고쳐야 하는데 그것은 성경의 새 번역과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설교체와 모든 종교의식 가운데서 그렇게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회중을 강단을 조정하는 무엇으로 여기는 현대적 견해가 보통 사람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이다.

3 그 다음에 지식층으로 가보면 이렇다.

그들은 이제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진화론과 3차원 세계를 무색케 하는 완전한 과학적 전망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성경만이 구원과 신앙적 체험과 삶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명백히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과 자연(과학자에 의해 파헤쳐진)이 서로 보완적이고 동등한 계시의 권위 있는 모양임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 사회의 지식인들을 방해하게 되어 복음을 듣기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에 행했던 바와 같은 식의 세상과 사람, 타락과 기적, 역사 안에 있는 초자연적 역사 등에 관한 말을 그만두고 종교적인 메시지에만 관심을 집중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새로울 것이 없다. 리츨(Ritschl)이 100전에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새로운 형태로 되돌아왔다.



4 그들에게 아주 친밀한 어휘로 말씀을 전달할 수 없다면 그들에게 어떤 감화를 끼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상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설교자가 주일날을 준비하는 방법으로 기도나 간구는 더 이상 필요 없고, 오직 ‘토요일 저녁 명화극장’ 과 ‘현대인의 정신구조’를 이해하는 것, 그것뿐이라고 한다.

5 목회자들의 훈련에 있어서 이 새로운 견해는 실천적인 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이 일정한 공장 경험이 없는 사람은 산업세계에 전도하기가 적합지 않다. 설교자들은 직공들의 언어를 이해해야 하며 자기를 어떤 식으로 나타내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이런 것을 체험하지 않고서 그들에게 설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론

이 문제에 대해 이상의 새로운 사상은 전적으로 그릇됨을 주장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 입장은 그릇되었다. 사실과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틀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황을 이해하는 전체적인 심리가 잘못되어 있다.

# 옥스퍼드 대학교 학장 부인 이야기

5, 60년 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설교 후 학장 부인이 달려와 “목사님 아십니까? 오늘이야말로 이 예배당에서 겪은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납니다. 내가 이 예배당에서 겪었던 많은 목사님들 가운데 우리를 죄인으로 보고 설교하신 분은 목사님 한뿐이셨어요. 여기에 오시는 설교자는 다 한결같이 지적인 설교를 준비하느라고 많은 고생을 하신 것이 분명했습니다.”

# 노동자사역하던 목사가 도시로 청빙받았지만...

설교에 대한 그의 그릇된 태도 때문에 그는 건강을 잃어 급기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었다. 그렇게 지적인 설교를 하는 것이 사람들이 원하는 바도 아니고 기대하고 필요 하는 바도 결코 아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교, 그것도 특별히 긴 설교를 들을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나는 1년 전 앓아누운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여러 통의 서신을 받았다. 현대적인 표준에 따르면 나의 설교관은 모두 틀렸다고 말해야 한다. 나는 설교가 긴 편이다. 40-50분 정도이다.

# 12살 난 소녀의 편지

그 편지는 12살 난 어린 소녀로부터 온 것인데 그 소녀는 두 남동생과 함께 써 보냈다. “우리는 목사님이 건강을 회복하기를 기도하고, 다시 설교단에 서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목사님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설교를 하시는 오직 한분밖에 없는 분이거든요.”

현대사상이나 현대이론에 의하면 나는 쉬운 설교자가 아니라 너무 지나친 교사이고, 내 설교에는 너무 많은 논리와 논증이 있다. 그래서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럴듯하나 어린아이가 하는 소리는 그것이 아니고 “목사님만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설교를 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여러 지적 수준과 이해도와 지식과 교양 정도가 다른 사람들이 섞인 청중들에게 설교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감화 아래 그들에게 필요한 것과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1 언어나 용의 문제에 대한 반론

나는 지체하지 않고 우리가 언제나 가능한 가장 완벽한 번역이 나오길 추구해야 함을 전적으로 인정한다.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패쇄적이어서는 안된다. 번역자들이 가장 좋은 번역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대인에게 복음을 전달하려면 하나님을 ‘Thee’보다 ‘You’로 불러야 한다는 사상 뒤에 있는 진정한 요점이 아니다. 그 사상 뒤에 숨어 있다고 하는 그런 기본적인 가정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그에게 기도하지 않으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고어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만 바로잡아 놓으면 모든 상황은 달라질 것이며 현대인이 하나님과 복음을 믿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후기 기독교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칭의나 성화와 영화같은 용어를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에 대한 대답은 단순히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언제는 사람들이 그 말을 이해했었느냐? 언제 비신자들이 이러한 언어를 이해했었느냐?라고 묻는 것이다. 결코 없었다. 이 용어들은 복음에만 있는 특유하고 고유한 말들이다.

우리의 일이란 이러한 용어들의 의미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이 설교되어야 하며 또한 어떻게 설교되는지를 결정하거나 정하지 못한다. 계시와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이는 우리이고 이것을 이해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도 우리이다. 사람들이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구원과 관련된 말 즉 칭의 같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사이에는 엄숙한 차이가 있다.

성경과 설교가 그 나라 국민의 언어로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옳다. 그러나 유별난 구원의 어휘를 이해하는 문제는 전혀 그것과 상관이 없다. 이것은 선교하는 일에 속한 특별사업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이해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버레이 교수(Prof. J. H. S. Burleigh)의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 관한 강좌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사론에서 성 어거스틴은 한 사람의 마음에서 다른 사람으로 진리가 전달되는 복잡한 과정을 부석하였다. 말하고 듣는 육신적인 과정 외에 거기에는 역시 영적인 과정이 있다. 말해지거나 쓰여지거나 간에 말은 이해를 돕는 독립적인 기관이다. 그러나 말은 이해를 하는 데 있어서 원인이다. 말씀은 진리를 지시하고 있으며, 진리가 포착되는 것은 오직 그 마음이 진리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에 동화된 자신의 내적 교사를 가짐으로서이다. 내적인 귀에 말하기 때문이다”

2 참되게 설교할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사람들의 정확한 상태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거짓 주장에 대한 반론

이것은 내가 볼 때 가장 괴이하고 망측스러운 주장이다. 왜냐하면 만일 이것이 진리라면 그리고 이것이 논리적 귀결이라면 여러분의 훈련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술고래에게 설교하려면 6개월 동안 술집과 바(bar)에 가서 지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모든 다양한 직업, 모든 전문직을 돌아가면서 6개월간을 각각 보내야 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설교할 준비가 될 것이다.

또한 비지식인들을 위해서 따로, 지식인들을 위해 또 하나의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고, 공장 노동자나 전문가적인 사람들이나 그 밖에 끝없이 많은 여러 계획을 위해서도 각각 다른 예배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 결과는 교회에 있는 회중들을 갈라놓고 세분화시켜 놓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결코 하나의 공적인 예배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라는 신약의 대 기본원리를 전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야만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도 다 차별이 없습니다.” 나는 덧붙인다. “거기에는 지식인도 비지식인도 공장 노동자도 전문가이든 그 외 무엇이든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죄와 타락과 절망에서 하나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면에서 하나입니다.”

3 현대적인 접근 방식은 거짓된 사상과 그릇된 신학에 기인한다.

또한 죄의 참다운 본질과 죄가 문제이지 죄과들이 문제가 아님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죄의 특별한 양태와 표증을 너무 특수화시키는 것은 당치않은 일이며 시간 낭비하는 일이다.

전세기에 걸친 기독교회 역사상 있었던 설교는 이 주장을 입증한다. 복음에 대한 평범한 설교는 특정 경우마다 성령에 의해 특정하게 적용된다. 남녀 모두 그들의 공통적인 근본요구를 알기의해서 모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성령의 의해 같은 방식으로 중생하고 회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녀가 함께 한 교회 내에 속해 있는 것이다.

교회의 영광이란 교회가 이런 다양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러한 공통적인 생활을 누리기 때문에 함께 모이고 똑같은 설교를 즐길 수 잇는 것이다.

4 그러면 고린도전서 9:19-23절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고전 9:19-23, 개정)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이것을 피상적으로 보면 회중에 의해 설교자가 좌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오늘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일 것이다. 겉으로는 사도가 마치 말씀 증거를 듣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게 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도가 여기서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그의 말씀 증거보다 그의 일반적인 행위와 태도라고 하는 것이 옳다. 분명히 사도의 논증인즉 실제적인 설교 전달양식에 있어서는 탄력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할 것은 이 원리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5 현대적인 방법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인간심리에 대한 무지와 인간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막연초 겁쟁이로 알려진 영국국교 교구목사이야기

스튜더트 케네디라는 이름을 가진 이 사람은 군목으로서 자기의 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연초’를 피웠다. 그래서 ‘막연초 겁쟁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병들이 욕설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노렸고 자기도 그렇게 했다. 욕하기 원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들을 얻기 원한다면 그들의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모든 면에서 그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취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견해가 그를 속물로 만들어버렸다. 이에 대한 결과는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이다.

신약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완전한 허위이다. 우리 주님이 죄인들의 마음을 끈 것은 그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죄인들이 그에게 가까이 온 까닭은 그들이 그에겐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7장에서 보는 저 불쌍한 여자 죄인은 바리새인들에게 접근하지 않았고 오직 주님 안에 있는 무엇을 감지하였던 것이다. 주님의 숨결, 주님의 거룩, 그의 사랑-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도 언제나 우리들이 다르기를 바라고 있다.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과 거의 같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기독교 신앙으로 이끌어 들이려는 생각은 신학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볼 때 하나의 깊고 넓은 실책이다.

이 같은 원리가 이 시대에 더 넓게 적용되고 있다. 로마카톨릭 신자들을 얻는 길은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우리와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개신교도가 있다. 이 현대적인 생각은 신학적으로 뿐 아니라 심리학적으로도 틀려있다.

이러한 체계로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이 ‘하나님 아래’ 있어야 하며, 그 모든 일이 ‘경외함과 두려움으로’ 행해져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결정하지 못한다. 우리가 담당하고 조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것이 그분에 대한 예배이다. 그는 ‘경외함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접근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가벼운 오락이나 친근감이나 익살은 본래 모든 인간의 영혼상태의 심각함, 타락하여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위험을 안고 있어 구원이 필요한 것을 인식하는 것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라 그러한 방법들이 진리를 나타낼 수 없다.

6 신약의 교훈은 비신자는 전부 틀려있다는 것이다.

단지 연극이나 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이 틀려 있다는 것이다. 법칙은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이다. 만약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는” 대신 다른 것에 강조점을 둔다면 애초부터 실패를 맡아둔 것이 된다.

7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 일은 결단코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죄에 있어서 하나이다.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영적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고전 9:15-27에 있는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지고 있는 것은 우리가 최선을 대해 우리 자신들이 분명하고 명백한 이해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선입견이나 결점으로, 단지 그 메시지에만 유일한 것을 다른 메시지에 가미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만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현대적 사고방식은 진정한 성령과 그의 능력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심리학적 이해에 있어서나, 사람들을 여러 그룹으로 즉 심리학적, 문학적, 민족적 차원 등으로 나누는데 전문가가 되어 한 사람에게 옳은 것이 모든 사람에게는 옳지 않는 결과에 이른다. 그래서 급기야는 복음을 부정하는 죄를 짓게 된다.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야만인이나 미개인이나 종이나 자유자가 없습니다. 오직 한 복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모든 세상을 위하여 모든 인간을 위함이다. 인류는 하나이다. 우리는 진리를 회피하고, 때로는 메시지를 외면하고, 우리에게 전하라는 특권이 부여된 메시지와 일치하도록 조화되지도 않는 방법들을 정당화하는 데까지 현대의 심리학상 이론을 받아들이는 중대한 오류에 빠져 버렸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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