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스크랩] 로이드존스 목사와 설교 제8장 영권권위를 회복하라!

강대식 2016. 11. 11. 09:07
제8장 설교자의 영적 권위를 회복하라


회중석과 강단 혹은 청중과 설교자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최대로 중요한 것에 속할 것이다. 이 문제를 함의하는 고린도전서 9장에서 사도의 교훈을 살펴보았으므로 하나의 결론을 내려 보자. 결코 회중석이 강단을 좌우하거나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해 놓으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가 청중의 상태와 지위를 평가하여, 그것을 메시지 준비와 전달과정에서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함을 동등하게 강조하려 한다.

나는 이 주장을 함에 있어서 성경적인 뒷받침을 제시하려 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 초두에서 말한 것을 예로 들어 보자.

(고전 3:1-3, 개정)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는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를 감안하여 행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말은 그들 교인들이 그를 이래라 저래라 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들을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이 평가가 그가 그들에게 어떻게 설교할 것인지를 부분적으로 결정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예를 들어보자. 히브리서 5:11의 처음에 있는 말씀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우리 주님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으로 언급하고 있다.

(히 5:11-14, 개정)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기자는 그들에게 대제사장 되신 주님에 관하여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겠다고 느낀 것은 그들이 아직 그것을 받을 능력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점은 가르치는 일과 관련하여 볼 때 주요 요소가 되는 점이다. 교사는 어떤 체제 가운데에서라도 그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학생이든지 제자이든지 간에 그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일이다. 이 기본적인 법칙은 설교자의 의중에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한다. 특히 젊은 설교자의 큰 실수는 그들을 그들대로 보지 않고 어떠한 사람이 있으려니 하는 식으로 설교를 한다. 설교자가 자기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수준을 평가해야 함은 정말로 중요하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나 히브리서가 둘 다 교훈하고 있는 원리이다.

Ⅰ 설교자가 직면하는 주요 위험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모든 이들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인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인인 것이라고 가정하는 일이다. 이것은 사활을 좌우하는 가장 치명적인 실책이다. 교회의 구성원이니까 그들은 그리스도인일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모든 예배에 기성신자에게 적합하게 설교하는 방향으로 치우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의 설교는 항상 교훈적이어서 복음전도적인 요소와 요점은 무시되어 거의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로이드 존스의 경험

나는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는데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도 교회의 회원이었으며 교회에 출석하고 정규적인 예배에 참석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설교자들처럼 어느 누구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는 거짓된 단정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의 상태에 대한 진정한 진단이 아니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죄를 확신시키고 내가 필요한 것을 무엇인가 말해주는 설교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설교를 들은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1 우리는 어떻게 거짓된 판단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지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성경의 말씀의 능력 아래로 가 본 적이 한 반도 없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 같다. 그들은 한 번도 말씀의 능력을 체험한 적이 없고 순전히 지적인 교훈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들은 죄에 대한 일종의 수치감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와는 다른 것이다. 진정한 신자는 언제나 말씀의 능력을 느끼고 그것으로 깨달을 수 있다.

나는 매주 마다 교회에서 한 번의 전도예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제언하며 주장한다.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절대적인 법칙으로 삼으려 한다.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말했듯이 이런 혼동이 모든 나라의 교회들 안에 있는 주요한 난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2 복음 설교에 대한 반감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는 설교에 반감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사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겐 그런 설교가 필요한데도 그러하다. 새로 온 목사에게서 약 1년간 설교를 들은 뒤에 예배에 참석치 않는 한 부인을 있었다. 그 부인이 말하는 이유는 이렇다. “그분은 우리가 마치 죄인들인 것처럼 우리에게 설교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가공한 일이다. 그녀는 편안하지 못하게 되고 시험하게 되고 자신을 진정으로 알게끔 인도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싫었다. 그녀는 거의 30년 동안을 그 교회에 출석했었다.

그러나 진리가 개인적으로 정면으로 도전해 올 때 그 진리를 적대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저 일반적인 성경강해나 좋아했고, 신자들을 위한 성경말씀에 입각한 설교를 좋아했다. 그 설교들은 그녀를 찌르지 못했고 괴롭게도 못했다. 그리고 그녀를 시험해 보지도 죄를 깨닫게 하지도 못했다. 그녀가 죄에 빠져 있는데도 설교가 자기를 향해 부닥쳐 올 때 그 설교를 싫어했다.

Ⅱ 청중을 복음의 능력아래 인도하려면

1 복음이란 그저 단지 지적인 것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가령 우리의 설교가 언제나 강해나 하고 덕성을 고취하고 교훈만을 주는 것이라고 하면 딱딱하고 냉랭한 교인들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거칠고 자기만족에 빠지고 마는 교인들만을 낼 것이다. 그것보다 더 쉽게 바리새인 회중을 만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러한 잘못된 태도의 좀더 심한 결과는 매주마다 그런 사람들만이 참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일에 한번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더 이상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위 “1회 교인”(oncer)들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정말 비통한 일이다. 내가 강조하려는 첫째 요점은 그것이 설교자나 회중들 자신이 회중들을 그릇 되이 평가한 데서 근원되었다는 것이다. 그 진단에 동조함으로 회중들은 자기들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게 할 만한 형태의 설교를 결코 듣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수정하는 길은 일주일에 한 번씩은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전도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2 우리는 교회의 모든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 중요성을 인식시켜야 한다. 모든 예배에! 어째서? 첫 번째 대답은 만일 그들이 매 예배마다 참석치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기들이 참석치 않은 이는 날 정말 괄목할 일이 일어났음을 잘 알 수 있다.

이것은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야기 시킨다. 이것은 우리들의 예배에 무엇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과 관련시켜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부분이다. 만일 설교자가 언제 무엇이 일어날지 정확하게 안다면 그는 설교단에 서지 않을 것이다. 목회의 모든 영광은 무엇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의 강좌에서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으며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할 때는 경우가 다르다. 갑작스럽게 예측할 수 없다. 이 별다른 요소가 결정적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즉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에 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개인이나 단체에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일디. 그러므로 나는 “1회 신자들”에게 말한다. 만일 여러분들이 매 예배마다 참석치 않으면 언젠가 여러분들이 참석치 않았던 어느 주일 오전 또는 주일밤 예배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을 사람들로부터 듣게 되는 날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주의 앞으로부터 유쾌하게 되는 날”(행 3:19)을 놓쳐버리는 위험을 보여주어야 한다.

3 그 다음에는 반드시 다음 질문으로 연결시켜야 하다. 왜 어떤 그리스도인이고 자기가 충분히 얻을 수 있는 만큼을 갈망하지 않는가? 이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고, 비성경적임에 틀림없다. 시편 84편 기자가 자기가 다른 이들과 같이 주의 전에 나아갈 수 없는 자기의 비참과 슬픔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살펴보라.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분명히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 안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교회라는 목장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갈망하지 않으면서 자기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은 어떤 이든지 간에 영적으로 잘못된 사람이다.

4 여러 많은 자료를 기초로 회중들 사이에 설교길이까지 설교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경향이 증가한다는 말을 듣는다. 왜 이 모양인가? 다른 일을 할 때는 시간을 재지 않는다. 그것을 즐기고 좋아해서 더욱 더 길었으면 한다. 나는 단지 그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단정해 버리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예배, 특히 설교를 향해 소원하는 것이 고작 얼른 끝나는 것이 되어야 하나?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결론만이 있다. 이 사람들은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영성이 결핍해 있으며, 영적인 마음과 사고방식 그리고 영적인 이해가 부족하다.

이것은 단순히 견해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 모범인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와 그들을 비교함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이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날마다-날마다!-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여기에 우리는 매일 설교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과 교훈하는 일을 맞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을 본다. 주일날 뿐 아니라, 이는 주일날 한 번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에서 집에 모여서 열심을 다 내었다. 그것이 짧기를 바라거나, 설교가 짧아야 한다고 설교자를 귀찮게 구는 일도 없었다. “날마다” “계속해서 힘쓰니라.” 그들이 무엇보다 원했고 즐거웠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참된 기독교 내에서는 필연적인 일이다.

5 사도 베드로가 그 점을 이렇게 표현했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아이는 정말 순전한 말씀의 젖을 갈망한다. 본래적으로 필요한 영양분을 위해 보채게 되어 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 증거를 싫어하고 그것을 기뻐하지도 즐거워하지도 않고 마땅히 얻을 수 있는 만큼을 원하지 않는다면 병들거나 쇠약해 있거나 아니면 “이들이 그리스도인일까?” 의심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자연(自然)의 역(逆)이다. 그들은 신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과 맞지 않는다. 신약에 나오는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에 심취되고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며, 또한 그들은 찬양을 드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집회에 기계적으로 참석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일종의 의무감으로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없다.

6 신약의 설교자(전도자)들인 사도들은 집을 심방하면서 예배에 참석하라고 사람들을 강권하지 않았다. 사도들에게 직면되는 어려움은 그들을 집으로 보내는 일이다. 그들은 나머지 시간을 이런 분위기로 있기를 원했다. 그들은 받으면 받을수록 더많이 받기를 원한다. “날마다!” “힘쓰니라!” 여러분은 이 말을 떼내 버릴 수 없다.

이것은 모든 개혁시대나 부흥운동시대에 있어서 교회의 특징이다. 요한 칼빈은 제네바에서 매일 말씀을 강론했었다. 날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설교나 다른 사람들의 설교를 듣기를 갈망했다. 이것은 마틴 루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어느 시대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능을 진정으로 수행하고 있을 때의 교회생활에 있었던 사실이었다. 내가 말하는 의도는 사람들이 예배당에 나오지 않는 것은 그릇된 설교형태를 유발하는 그릇된 평가 때문이라는 것이다. 설교가 나쁘든지 듣는 사람이 틀렸든지 간에 둘 다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Ⅲ 설교자의 권위를 회복하라!

불신자가 자기가 커다란 곤경에 봉착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를 갔다고 생각해보라. 만일 거기에 모인 적은 인원밖에 보지 못하고 가련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목사가 설교하기를 시작 하여금 흥미를 느끼게 되고 모든 일을 자세히 유의해 보기 시작했는데도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그 사람은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사람들로 가득 찬 교회로 들어가, 예상했던 어떤 분위기를 의식하게 되고 사람들이 열심히 무엇인가를 찾는 것을 보면 그는 “여기엔 무엇인가 있구나. 무엇이 이들을 이곳으로 이끌었을까?”라고 말할 것이다. 큰 무리의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있다는 것은 바로 그 상황은 흔히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식과 회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되어진다.

1 이 모든 일이 말하는 바는 설교단에서 필요한 것은 권위, 위대한 권위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 최대로 필요한 것은 설교자에게 이 권위를 회복시켜 주는 일이다. 이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우리는 여기서 매우 주의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전에 자주 문제화되었고 그릇된 길에 봉착된 일이 흔히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의 옥스퍼드 운동(Tractarian Movement)이 그런 경우였다. 그들은 이 권위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교회강단이 권위를 잃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그것을 복구하는 길을 모색하기 그러나 그들은 프로테스탄트 입장에서 볼 때 완전히 그릇된 보조를 취했다. 권위를 회복하는 길은 설교자나 목회자를 회중들로부터 멀리 떼어놓는 것이고, 이 일을 하는 방법은 그의 직무의 사제적이고 신비적인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장식이 달린 예복을 입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세기에 있어서 비국교파 교회도 마찬가로 거짓된 움직임을 보였다. 그들은 설교자의 권에 대한 열쇠가 학위(學位)라고 믿었다. 현재도 학위는 분명히 큰 가치가 있고 중요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설교단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2 설교자에게 있어 최고 최상의 필요는 “영적 권위”이다. 나는 이미 사람이 유능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좋은 설교자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한 바 있다. 지식과 문화는 말할 수 없이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종(從)이나 하녀로 사용되다는 조건에서 이다. 그 자체로는 어떠한 권위를 주지 못한다.

그러면 설교자에게 진정한 영적 권위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

설교자에게 권위를 주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그가 “성령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전체 교회역사, 특별히 지난 백년간의 역사는 내가 말하고 있는 바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3 나는 현대 지식인들, 강단의 권위에 오히려 반대하며, 몇 마디의 해설을 붙여주고 단지 성경을 읽는 것과 토론을 원하는 그들 지식인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말이 있음을 역설한다. 강단에 선 사람이 거기에 있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그가 유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른 이들에게 주시지 않은 어떤 특별한 은사를 그에게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거기에 있는 것은 이 “소명”, 즉 교회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은 이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인들은 자기들이 설교자와 어깨를 겨루고 있다고 느껴서도 안되고, 자기들도 그 사람만큼 알고 있고 그가 읽을 수 있는 책은 읽을 수 있다고 자기들에게 설교하는 설교자의 권위를 의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이 아주 사실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이 더욱 능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보다 더 많이 알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이 사람은 여전히 구별되었다. 그의 천성적인 은사 때문만이 아니라 특별히 하나님께서 주신 것 때문이다. 그에게 준 권위는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재능이 있고 학식이 있고 지식이 있다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의 설교를 들을 준비가 안된 사람이라면 나는 그가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서슴지 않고 의심해 보겠다. 그것은 영권 권위의 문제이지 지식이나 교양적인 권위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이들은 이것을 깨닫고 그럼으로써 설교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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