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설교행위
참된 설교의 필요한 요소들
1 설교자의 전인적 품격이 반드시 수반된다는 것이다
필립 브룩스(Phillips Brookes)의 유명한 정의가운데서 나타난다. “설교는 설교자의 품격(인격)을 통해서 존재되는 진리이다.” 설교자의 모든 기능이 설교하는 일에 관계되며 전인이 관계된다는 것이다. 나는 신체까지도 설교에 수반다고 생각한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가 웅변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태도”라고 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러면 두 번째로 큰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태도입니다.” “그럼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역시 태도입니다.” 이 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효과적인 연설은 태도를 수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인 설교자의 품격이 반드시 설교에 수반되어 나타나기 마련임을 강조하는 바이다.
2 권위로서 청중을 압도하고 진행해 나가는 지각력이다
설교자는 결코 변명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마치 회중들의 양해를 얻어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결코 안 된다. 어떤 추측이나 생각을 실험삼아 말하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정말 설교자가 취할 자세가 아니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확실한 일을 “선언”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사명을 띠고 권위로 서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자기는 보냄 받은 사자(使者)로서 회중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 자신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가 고린도에 갔을 때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전 2:3)고 말했다. 그 말은 설교자가 변명조로 말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행하하고 있는 일의 엄숙함과 심각함 그리고 중대함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하지만 설교자는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다.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명백하고 분명해야 한다. 설교자가 회중에게 압도당하지 말고 설교자가 회중에게 도전하고 압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자연스러움
나는 이 점에 대해 매우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설교내용이 앞에서 말한 방식대로 주의 깊게 준비되었다 할지라도 설교자는 반드시 설교를 수행할 때 설교를 전하는 데 있어서 자유스러워야 한다. 자기가 준비한 것에 너무 매이지 않아야 한다. 이 점은 죽고 사는 문제처럼 중대한 문제이다. 이 점은 설교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진수가 되는 정곡(正鵠)이다.
나는 그저 설교단에 원고를 가지고 올라가는 문제만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원고를 가지고 있지 않고도 얽매일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설교자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자유로움은 순간적인 영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이다.
설교하는 일이란 성령의 감화와 능력을 뒷받침한 행위이고 설교준비란 것이 설교내용의 준비를 끝마쳤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점을 강조해 한다. 주목할 만한 일들 중의 하나는 설교자가 한 말 중에서 가장 훌륭한 말이 미리 생각하지도 않고 설교준비를 할 때까지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실제로 설교를 하는 동안에 얻은 말이라는 것을 흔히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4 설교하는 중에 회중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끌어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중가운데는 영적인 사람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그 기회에 어떤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설교에는 상호교환의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이 점은 수필과 강좌가 설교와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5 진지함(Seriusness)
설교자는 반드시 진지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결코 설교한다는 것이 가볍거나 피상적인, 또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설교자는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문제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필연적으로 주어야 한다는 개관적인 진술만을 해둔다.
설교 중에 무엇이 이루이지고 있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설교자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에 관해서 그들의 조건과 그들의 영혼상태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것과 그들이 영위하고 있는 생의 특징은 하나님에게 범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일러주며 그들 앞에 놓인 가공할 만한 영벌(永罰)에 대한 경고를 하는 것이다.
어는 경우에서든지 설교자는 이 생의 허무함을 모든 사람들보다 가장 잘 인식해야만 한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일과 사업과 세상 열락과 허망한 자랑에 너무 깊이 빠져있어서 그들이 부단히 생각하는 일은 덧없는 생의 성격이다. 그러므로 리차드 벡스터(Richard Baxter)의 유명한 말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설교할 때 마다 그것을 마지막 설교로 알고 설교하였고, 한 죽어가는 사람이 다른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입장에서 설교하였다.”
여러분들은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맥체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가 강단에 서면 한 마디 말도 하기 전에 사람들이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왜인가? 바로 이 심각함의 요소 때문이다. 그 사람을 보면 그가 금방 하나님의 존전에서 나와 하나님에게서 받은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바로 그점이 그가 입을 열기 전인데도 사람들에게 그러한 감화를 주었던 것이다.
5 박력
심각함이 진지한체하는 것을 뜻하지도, 슬픈 기색을 뜻하지도, 침울한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설교자는 반드시 생기에 넘쳐있어야 한다. 박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진지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결코 흐리멍텅하거나 지루해서는 안된다. 내가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내가 자주 듣게 되고 나를 크게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6 열정
열정이라 말할 때 그 의미는 설교자는 반드시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에 자기 스스로 붙잡힘을 당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자기가 그것에 붙잡히지 못하였으면 아무도 그 진리에 붙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점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설교자는 반드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붙잡힘을 당하고 끌려있다는 사실로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한다. 그는 그 문제로 충만해져서 그것을 나눠주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야 한다.
# 어느 촌 교회 설교자 이야기
설교자는 예레미야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뼈에 불같다”고 말한 위대한 본문으로부터 설교를 시작했다. 나는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아주 괴이한 것을 목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설교자는 마치 빙산에 앉아 있는 것처럼 불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 초연하고 냉담한 자세로 불이라는 주제를 말하고 있었다. 자기가 말하는 바로 그 일을 줄기차게 부인하고 있었다.
그 설교는 설교구성이나 준비 면에서 훌륭한 설교내용이었다. 그 일을 하느라 상당한 준비를 기울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것을 정학하게 서술했던 것도 분명했다. 그러나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었는데 불이었다.
7 뜨거움(Warmth)
설교자는 결코 냉담해서는 안 된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거의 옳고 정말 완벽하다. 그러나 그것이 인상적이지 않고 살아있지 못하며 차갑고 감동이 없는 것은 자기 스스로 감동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래서는 안된다. 만일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것으로 감동을 받기 마련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뜨거움’을 유발한다.
사도 바울은 “눈물로써” 말씀을 전파했노라고 말한다. 그는 사도행전 20장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그 점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가 빌립보서 3장에서 어떤 거짓 전도자들을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굉장한 지성인이었고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말할 때나 설교할 때 자주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주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되었다. 위대한 지성이라고 해서 아무런 감정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어떤 근거에서 나오는 것인가? 그 얼마나 우습과 어리석은 일인가? 이런 일로 감동받지 않은 사람은 이런 일을 참으로 이해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한 인간은 공허한 지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전인격이다. 인간은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도 가지고 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6:17에서 그 점을 어떻게 서술하였는지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만일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가 정말 그의 머리로 이해되었는지 어떤지를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루고 있는 진리의 성격 그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모든 시대의 위대한 설교들에게 해당되었던 바이다.
# 휫필드 이야기
휫필드가 설교하고 있을 때문 눈물이 그의 얼굴에 거의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 모두 이 점에서 책망을 받고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고백한다. 과거에 위대한 설교를 항상 특징지웠던 설교에 있어서 열정은 어디에 있는가? 어째서 현대의 설교자들은 과거의 위대했던 설교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자주 감동되지 못하고 마는 것일까? 진리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진리를 믿고 ‘그 놀라운 사랑과 찬양의 깊은 경지에 빠지기까지’ 고양되었는가?
8 긴박감(Urgency)
사도 바울은 전도자(설교자)는 언제나 ‘끊임없이 근신’하고 있어야함을 디모데에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저 단순히 지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영혼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으로 가고 있는 순례자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생에서의 생과 사의 문제뿐 아니라 영원한 운명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절실하고 급한 것이 없다.
# 1840년경 스코틀랜드의 부흥의 윌리암 차머스 번즈(William Chalmers Burns)의 말
그는 어느 날인가 동료 목회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여보게, 우리는 서둘러야 되네”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가 이 긴박감에 대한 것을 알지 못하면 참된 설교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강의는 할수도 연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변화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과목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는 연기될 수 없다. 하루마저도 살아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의 한 가운데서 죽음에 맞부딪혀 있다. 만일 설교자가 이 긴박감, 즉 자기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시간과 영원 사이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면 그는 설교단에 서 있을 필요가 없다. 이런 문제들에는 조용하고 냉정하고 과학적이고 초연한 척 여유를 부릴 수 없다. 철학자의 경우에는 그런 것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자에게는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전체적인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9 설득력
분명히 이 설교행위의 전체 목적은 청중들을 설득시키는 것이다. 설교자는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진리를 그들에게 설득시키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는 그들이 진리를 알기 소원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려고 노력하며 그들에게 감화를 주려고 노력한다.
그는 한 본문에 대한 수준 높은 논문을 제시하고 있지 않으며 자기 자신이 아는 것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살아있는 영혼들을 다루고 있고 그 영혼들을 움직여 진리로 그들을 이끌어주기를 원한다. 그것이 그의 모든 목적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 요소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 주의!! 정념(情念; Pathos)
만일 내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크게 책임추궁을 당해야 할 것이 있다면 아마 이 점이 내 목회사역에 있어서 가장 부족했었다고 고백해야만 했을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초에 걸친 인물로서 성공회 목사 리차드 세실(Richard Cecil)은 우리 모두 생각할 만한 문제를 말했다.
“설교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과 우리들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아주 별개의 문제이다.”
만일 여러분이 사람들을 향한 이 연민의 요소를 결핍한다면, 모든 참된 설교에 있어서 극히 치명적으로 중대한 정념 역시 결하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무리들을 바라보시면서 “목자없는 양같이 여기시시면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면 설교단에 서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정념의 요소는 모든 시대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설교자 중 하나인 휫필드가 한 설교의 특징이었다. 18세기의 위대한 배우 데이빗 개릭(David Garrick)은 휫필드가 행한 그대로 ‘메소포타미아’란 말을 발음할 수 있기를 원한다고까지 말했다. 또한 그는 “오!”라는 말을 휫필드가 했던 것과 꼭같은 정념으로 말할 수 있기만 한다면 100기니를 기꺼이 주겠노라고 말했다.
현대의 현학적인 사람은 이것을 비웃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한 설교자가 되는 것은 사람을 녹여주는 이 능력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기 시작할 때에만 가능하다. 물론 어떤 효과를 내려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은 배우가 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구역질나는 위선자이다. 그러나 휫필드의 정념 속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한 사람’의 가슴속에 부어질 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 된다.
이 정념과 감격의 요소는 내게 있어서 아주 사활적으로 중대한 것이다. 현세기에 있어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결핍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특별히 개혁파를 따라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우리는 균형을 잃는 경향이 있다. 과도하게 지적이 되어 정말 감정과 느낌의 요소를 거의 경멸하는 추세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말한 바처럼 이러한 것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감동되지 않고 지나치는 수가 결코 없었다. 로마서 9, 10, 11장에서 바울이 어떻게 유대인의 특징문제를 다루어 나가는가를 기억하실 것이다. 그들이 차지할 곳은 어디인가.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나 기타 그가 말해온 바에 의하여 비추어 볼 때 그들의 위치는 무엇인가?
그는 이 문제를 거론해서 논증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해 낸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의 대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감격해 한다.
(롬 11:33-36, 개정)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는 기쁨에 찬 큰 감격이다. 나는 감격을 말하는 것이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시기 바란다. 사람들의 피상적이고 외면적인 감동을 충동하려고 일부러 애쓰는 사람보다 더 구역질나는 것은 없다. 내 의도는 사람이 그가 믿으라고 부르짖는 그 진리를 진정으로 이해할 때 그는 틀림없이 그 진리에 감동된다는 것이다.
10 말씀의 능력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한 가지만으로도 한 부분을 차지할 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권능)이 없으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결국 참된 설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설교는 사람이 지껄여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쓰이심을 받는다. 그는 성령의 세력 아래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에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하였다”고 한 말이 그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1:5에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의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되어 있다.
참된 설교는 이 두 요소, 즉 설교내용과 설교를 전하는 행위가 많은 비율로 결합되어 이루어진다. 이 “행위”는 설교내용에 첨가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른 설교이다. 두 가지 다 강조되어야 한다.
# 웨일즈에 나이 많은 비평가
그는 매우 유능하고 훌륭한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매우 예리한 비평가였다. 어느 기회에 그는 두 사람이 강사로 되어 있는 어느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두 사람 다 신학교수들이었다. 처음에 한 강사가 설교했다. 이 노인 비평가는 “빛만 있지 열은 없군”하고 말했다. 두 번째 강사가 설교를 마쳤을 때 “열만 있고 빛은 없군”하고 말했다.
설교자는 반드시 빛과 뜨거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뜨거움이 없는 빛은 결코 어떤 사람도 감동시키지 못하고, 빛이 없는 뜨거움은 영구한 가치가 없다. 지나가는 비처럼 당분가 화끈하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진정하게 회중들을 돕지 못하고 그들을 세워주지도 다루어 주지도 못한다.
제임스 헨리 손웰(James Henry Thornwell) 18세기 미국 남 장교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 위대한 설교자, 웅변가로 로이든 존스는 소개한다
는 설교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는지 들어보자.
“설교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며 설교가 어떻게 수행되야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큰 일입니다. 효과적인 설교내용은 연구와 훈련, 기도, 특별히 성령의 감동의 필연적인 열매입니다. 그 설교들은 전달을 위해 의도된 설교를 구성하는 모든 다른 부분의 특징적인 장점들과 결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성실성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하나님의 인애하심을 힘입어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설교내용에만 매달려 보십시오. 그러면 세상에 보잘것없는 설교밖에는 안됩니다. 우리가 설교를 직업적으로 전하는 많은 목사들의 자질을 고려해 볼 때, 세상에서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것이 폐하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은혜와 신적 능력에 속한 신비입니다. 직업적인 방식으로 일을 수행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합니다. 나는 내 생애에 있어서 한 편의 설교도 작성하지 않습니다. 다소 전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절망하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여러분에게 더 많은 지식과 은혜를 주시고 목적에 성실할 수 있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참된 설교의 필요한 요소들
1 설교자의 전인적 품격이 반드시 수반된다는 것이다
필립 브룩스(Phillips Brookes)의 유명한 정의가운데서 나타난다. “설교는 설교자의 품격(인격)을 통해서 존재되는 진리이다.” 설교자의 모든 기능이 설교하는 일에 관계되며 전인이 관계된다는 것이다. 나는 신체까지도 설교에 수반다고 생각한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가 웅변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태도”라고 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러면 두 번째로 큰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태도입니다.” “그럼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역시 태도입니다.” 이 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효과적인 연설은 태도를 수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인 설교자의 품격이 반드시 설교에 수반되어 나타나기 마련임을 강조하는 바이다.
2 권위로서 청중을 압도하고 진행해 나가는 지각력이다
설교자는 결코 변명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마치 회중들의 양해를 얻어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결코 안 된다. 어떤 추측이나 생각을 실험삼아 말하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정말 설교자가 취할 자세가 아니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확실한 일을 “선언”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사명을 띠고 권위로 서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자기는 보냄 받은 사자(使者)로서 회중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 자신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가 고린도에 갔을 때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전 2:3)고 말했다. 그 말은 설교자가 변명조로 말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행하하고 있는 일의 엄숙함과 심각함 그리고 중대함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하지만 설교자는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다.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명백하고 분명해야 한다. 설교자가 회중에게 압도당하지 말고 설교자가 회중에게 도전하고 압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자연스러움
나는 이 점에 대해 매우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설교내용이 앞에서 말한 방식대로 주의 깊게 준비되었다 할지라도 설교자는 반드시 설교를 수행할 때 설교를 전하는 데 있어서 자유스러워야 한다. 자기가 준비한 것에 너무 매이지 않아야 한다. 이 점은 죽고 사는 문제처럼 중대한 문제이다. 이 점은 설교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진수가 되는 정곡(正鵠)이다.
나는 그저 설교단에 원고를 가지고 올라가는 문제만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원고를 가지고 있지 않고도 얽매일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설교자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자유로움은 순간적인 영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이다.
설교하는 일이란 성령의 감화와 능력을 뒷받침한 행위이고 설교준비란 것이 설교내용의 준비를 끝마쳤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점을 강조해 한다. 주목할 만한 일들 중의 하나는 설교자가 한 말 중에서 가장 훌륭한 말이 미리 생각하지도 않고 설교준비를 할 때까지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실제로 설교를 하는 동안에 얻은 말이라는 것을 흔히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4 설교하는 중에 회중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끌어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중가운데는 영적인 사람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그 기회에 어떤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설교에는 상호교환의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이 점은 수필과 강좌가 설교와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5 진지함(Seriusness)
설교자는 반드시 진지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결코 설교한다는 것이 가볍거나 피상적인, 또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설교자는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문제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필연적으로 주어야 한다는 개관적인 진술만을 해둔다.
설교 중에 무엇이 이루이지고 있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설교자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에 관해서 그들의 조건과 그들의 영혼상태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것과 그들이 영위하고 있는 생의 특징은 하나님에게 범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일러주며 그들 앞에 놓인 가공할 만한 영벌(永罰)에 대한 경고를 하는 것이다.
어는 경우에서든지 설교자는 이 생의 허무함을 모든 사람들보다 가장 잘 인식해야만 한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일과 사업과 세상 열락과 허망한 자랑에 너무 깊이 빠져있어서 그들이 부단히 생각하는 일은 덧없는 생의 성격이다. 그러므로 리차드 벡스터(Richard Baxter)의 유명한 말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설교할 때 마다 그것을 마지막 설교로 알고 설교하였고, 한 죽어가는 사람이 다른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입장에서 설교하였다.”
여러분들은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맥체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가 강단에 서면 한 마디 말도 하기 전에 사람들이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왜인가? 바로 이 심각함의 요소 때문이다. 그 사람을 보면 그가 금방 하나님의 존전에서 나와 하나님에게서 받은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바로 그점이 그가 입을 열기 전인데도 사람들에게 그러한 감화를 주었던 것이다.
5 박력
심각함이 진지한체하는 것을 뜻하지도, 슬픈 기색을 뜻하지도, 침울한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설교자는 반드시 생기에 넘쳐있어야 한다. 박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진지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결코 흐리멍텅하거나 지루해서는 안된다. 내가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내가 자주 듣게 되고 나를 크게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6 열정
열정이라 말할 때 그 의미는 설교자는 반드시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에 자기 스스로 붙잡힘을 당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자기가 그것에 붙잡히지 못하였으면 아무도 그 진리에 붙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점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설교자는 반드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붙잡힘을 당하고 끌려있다는 사실로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한다. 그는 그 문제로 충만해져서 그것을 나눠주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야 한다.
# 어느 촌 교회 설교자 이야기
설교자는 예레미야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뼈에 불같다”고 말한 위대한 본문으로부터 설교를 시작했다. 나는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아주 괴이한 것을 목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설교자는 마치 빙산에 앉아 있는 것처럼 불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 초연하고 냉담한 자세로 불이라는 주제를 말하고 있었다. 자기가 말하는 바로 그 일을 줄기차게 부인하고 있었다.
그 설교는 설교구성이나 준비 면에서 훌륭한 설교내용이었다. 그 일을 하느라 상당한 준비를 기울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것을 정학하게 서술했던 것도 분명했다. 그러나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었는데 불이었다.
7 뜨거움(Warmth)
설교자는 결코 냉담해서는 안 된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거의 옳고 정말 완벽하다. 그러나 그것이 인상적이지 않고 살아있지 못하며 차갑고 감동이 없는 것은 자기 스스로 감동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래서는 안된다. 만일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것으로 감동을 받기 마련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뜨거움’을 유발한다.
사도 바울은 “눈물로써” 말씀을 전파했노라고 말한다. 그는 사도행전 20장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그 점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가 빌립보서 3장에서 어떤 거짓 전도자들을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굉장한 지성인이었고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말할 때나 설교할 때 자주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주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되었다. 위대한 지성이라고 해서 아무런 감정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어떤 근거에서 나오는 것인가? 그 얼마나 우습과 어리석은 일인가? 이런 일로 감동받지 않은 사람은 이런 일을 참으로 이해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한 인간은 공허한 지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전인격이다. 인간은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도 가지고 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6:17에서 그 점을 어떻게 서술하였는지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만일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가 정말 그의 머리로 이해되었는지 어떤지를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루고 있는 진리의 성격 그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모든 시대의 위대한 설교들에게 해당되었던 바이다.
# 휫필드 이야기
휫필드가 설교하고 있을 때문 눈물이 그의 얼굴에 거의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 모두 이 점에서 책망을 받고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고백한다. 과거에 위대한 설교를 항상 특징지웠던 설교에 있어서 열정은 어디에 있는가? 어째서 현대의 설교자들은 과거의 위대했던 설교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자주 감동되지 못하고 마는 것일까? 진리는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진리를 믿고 ‘그 놀라운 사랑과 찬양의 깊은 경지에 빠지기까지’ 고양되었는가?
8 긴박감(Urgency)
사도 바울은 전도자(설교자)는 언제나 ‘끊임없이 근신’하고 있어야함을 디모데에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저 단순히 지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영혼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으로 가고 있는 순례자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생에서의 생과 사의 문제뿐 아니라 영원한 운명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절실하고 급한 것이 없다.
# 1840년경 스코틀랜드의 부흥의 윌리암 차머스 번즈(William Chalmers Burns)의 말
그는 어느 날인가 동료 목회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여보게, 우리는 서둘러야 되네”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가 이 긴박감에 대한 것을 알지 못하면 참된 설교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강의는 할수도 연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변화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과목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는 연기될 수 없다. 하루마저도 살아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의 한 가운데서 죽음에 맞부딪혀 있다. 만일 설교자가 이 긴박감, 즉 자기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시간과 영원 사이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면 그는 설교단에 서 있을 필요가 없다. 이런 문제들에는 조용하고 냉정하고 과학적이고 초연한 척 여유를 부릴 수 없다. 철학자의 경우에는 그런 것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자에게는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전체적인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9 설득력
분명히 이 설교행위의 전체 목적은 청중들을 설득시키는 것이다. 설교자는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진리를 그들에게 설득시키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는 그들이 진리를 알기 소원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려고 노력하며 그들에게 감화를 주려고 노력한다.
그는 한 본문에 대한 수준 높은 논문을 제시하고 있지 않으며 자기 자신이 아는 것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살아있는 영혼들을 다루고 있고 그 영혼들을 움직여 진리로 그들을 이끌어주기를 원한다. 그것이 그의 모든 목적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 요소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 주의!! 정념(情念; Pathos)
만일 내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크게 책임추궁을 당해야 할 것이 있다면 아마 이 점이 내 목회사역에 있어서 가장 부족했었다고 고백해야만 했을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초에 걸친 인물로서 성공회 목사 리차드 세실(Richard Cecil)은 우리 모두 생각할 만한 문제를 말했다.
“설교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과 우리들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아주 별개의 문제이다.”
만일 여러분이 사람들을 향한 이 연민의 요소를 결핍한다면, 모든 참된 설교에 있어서 극히 치명적으로 중대한 정념 역시 결하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무리들을 바라보시면서 “목자없는 양같이 여기시시면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면 설교단에 서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정념의 요소는 모든 시대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설교자 중 하나인 휫필드가 한 설교의 특징이었다. 18세기의 위대한 배우 데이빗 개릭(David Garrick)은 휫필드가 행한 그대로 ‘메소포타미아’란 말을 발음할 수 있기를 원한다고까지 말했다. 또한 그는 “오!”라는 말을 휫필드가 했던 것과 꼭같은 정념으로 말할 수 있기만 한다면 100기니를 기꺼이 주겠노라고 말했다.
현대의 현학적인 사람은 이것을 비웃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한 설교자가 되는 것은 사람을 녹여주는 이 능력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기 시작할 때에만 가능하다. 물론 어떤 효과를 내려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은 배우가 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구역질나는 위선자이다. 그러나 휫필드의 정념 속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한 사람’의 가슴속에 부어질 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 된다.
이 정념과 감격의 요소는 내게 있어서 아주 사활적으로 중대한 것이다. 현세기에 있어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결핍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특별히 개혁파를 따라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우리는 균형을 잃는 경향이 있다. 과도하게 지적이 되어 정말 감정과 느낌의 요소를 거의 경멸하는 추세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말한 바처럼 이러한 것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감동되지 않고 지나치는 수가 결코 없었다. 로마서 9, 10, 11장에서 바울이 어떻게 유대인의 특징문제를 다루어 나가는가를 기억하실 것이다. 그들이 차지할 곳은 어디인가.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나 기타 그가 말해온 바에 의하여 비추어 볼 때 그들의 위치는 무엇인가?
그는 이 문제를 거론해서 논증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해 낸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의 대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감격해 한다.
(롬 11:33-36, 개정)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는 기쁨에 찬 큰 감격이다. 나는 감격을 말하는 것이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시기 바란다. 사람들의 피상적이고 외면적인 감동을 충동하려고 일부러 애쓰는 사람보다 더 구역질나는 것은 없다. 내 의도는 사람이 그가 믿으라고 부르짖는 그 진리를 진정으로 이해할 때 그는 틀림없이 그 진리에 감동된다는 것이다.
10 말씀의 능력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한 가지만으로도 한 부분을 차지할 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권능)이 없으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결국 참된 설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설교는 사람이 지껄여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쓰이심을 받는다. 그는 성령의 세력 아래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에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하였다”고 한 말이 그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1:5에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의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되어 있다.
참된 설교는 이 두 요소, 즉 설교내용과 설교를 전하는 행위가 많은 비율로 결합되어 이루어진다. 이 “행위”는 설교내용에 첨가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른 설교이다. 두 가지 다 강조되어야 한다.
# 웨일즈에 나이 많은 비평가
그는 매우 유능하고 훌륭한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매우 예리한 비평가였다. 어느 기회에 그는 두 사람이 강사로 되어 있는 어느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두 사람 다 신학교수들이었다. 처음에 한 강사가 설교했다. 이 노인 비평가는 “빛만 있지 열은 없군”하고 말했다. 두 번째 강사가 설교를 마쳤을 때 “열만 있고 빛은 없군”하고 말했다.
설교자는 반드시 빛과 뜨거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뜨거움이 없는 빛은 결코 어떤 사람도 감동시키지 못하고, 빛이 없는 뜨거움은 영구한 가치가 없다. 지나가는 비처럼 당분가 화끈하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진정하게 회중들을 돕지 못하고 그들을 세워주지도 다루어 주지도 못한다.
제임스 헨리 손웰(James Henry Thornwell) 18세기 미국 남 장교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 위대한 설교자, 웅변가로 로이든 존스는 소개한다
는 설교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는지 들어보자.
“설교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며 설교가 어떻게 수행되야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큰 일입니다. 효과적인 설교내용은 연구와 훈련, 기도, 특별히 성령의 감동의 필연적인 열매입니다. 그 설교들은 전달을 위해 의도된 설교를 구성하는 모든 다른 부분의 특징적인 장점들과 결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성실성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하나님의 인애하심을 힘입어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설교내용에만 매달려 보십시오. 그러면 세상에 보잘것없는 설교밖에는 안됩니다. 우리가 설교를 직업적으로 전하는 많은 목사들의 자질을 고려해 볼 때, 세상에서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것이 폐하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은혜와 신적 능력에 속한 신비입니다. 직업적인 방식으로 일을 수행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합니다. 나는 내 생애에 있어서 한 편의 설교도 작성하지 않습니다. 다소 전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절망하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여러분에게 더 많은 지식과 은혜를 주시고 목적에 성실할 수 있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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