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비판

[스크랩] 뉴에이지 기독교인, 기독교 쿤달리니, 혼합 영성/ 레이 윤겐(신비주의 강의안)

강대식 2016. 11. 28. 16:28

뉴에이지 기독교인?

 

관상 기도가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뉴에이지 운동의 한 요소이다. 뉴에이지 심리 치료사인 재클린 스몰의 말이다.

일종의 기독교적인 명상, 그리고 수련자들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내면의 상징에 초점을 맞추도록 훈련을 받는다-- 수련자들이 이런 명상법에 깊이 빠지면, 자기 최면과 비슷한 깊은 황홀한 상태에 들어간다.

 

뉴에이지 저널의 편집자들이 위로 그리고 아래로라는 책을 엮었다. 이 책은 편집자의 세계관에 따르면 영적인 갱신으로 가는 길에 대한 안내서였다. 샤머니즘, 여신숭배 그리고 통전적인 건강에 대한 장들에 이어서 관상 기도에 대한 장이 나온다. 이들은 과감하게 선언한다.

초월명상을 수련한 사람들은 기독교가 오랜 세월에 걸쳐 내려온 자체의 만트라 명상이 있는 것을 알면 놀랄지도 모른다-- 만트라에 의존하는 전통은 기독교 안의 신비 경전에서 오랜 역사를 두고 있다.

 

뉴 에이지 저자 타브 스파크스는 다양한 신비 사상 그리고 동방의 수련법들에서, ‘영적인 기독교라고 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 기독교의 어떤 형태가 영적인 능력과 함께 살아 있는 것들이 있음은 좋은 소식이다.”

 

워싱턴 D.C.에 자리잡은 명망 높은 샬렘 연구소의 설립자 틸덴 에드워즈는 그의 책 영적인 친구에서, 관상 기도를 수행하는 사람들과 영적인 발전에서 역동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신비운동가 로베르토 아사기올리의 책, ‘정신 합치의 내용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기독교인들을 이 기도의 유형으로 끌어들이길 바란다. 그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영적 발전을 기독교인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한다. “이 신비주의 흐름(관상기도)은 서구를 극동의 영성에 연결하는 교량이다.”

 

의도는 좋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막 교부들과 그 영적 후배들의 시도에 대한 답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찰스 스펄전의 깊이 있는 관찰을 보자.

인간의 지혜는 십자가 교리를 손질해서 타락한 본성의 변질된 기호에 좀 더 부드럽게 다가가고 잘 맞는 체계가 되게 하길 좋아한다. 그러나 육적인 지혜는 복음을 증진하기는커녕 복음을 오염시킨다. 아니 다른 복음이 되게 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진리가 아닌 것이 되게 한다. 여호와의 말씀을 어떤 형태로든 변경하고 수정하는 것은 오염이고 수욕이다.

 

기독교 쿤달리니

 

쿤달리니는 힌두교 영성에 저류로 흐르는 신비한 능력 혹은 힘이라는 용어이다. 힌두교에서 쿤달리니는 보통 뱀의 힘을 말한다. 약물중독 전문 상담가이고 열성있는 가톨릭 평신도 사목위원인 성 로메인은 쿤달리니 에너지와 기독교 영성이라는 책을 썼고, 그는 정신을 개입한 기도를 비생산적인것으로 매도하면서 마음의 작용을 끊고, 자신이 정신적인 수동성이라고 지적한 상태로 기도를 정의한다. 그가 맞부딛친 변화는 냉수를 들이킨 심정으로 우려하게 만든다.

그때 빛이 내게로 왔다! 그 순간 금빛 소용돌이가 더 심하게 치는 것을 보았다.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나를 사로잡아버린 형상으로 금빛 소용돌이는 변했다-- 이런 소용돌이가 언제나 네다섯번 일어났다.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하나가 쏟아졌다. 빛은 더 밝아지고 눈이 부셨다. 나는 한참 동안 침묵에 잠겼다.

 

이런 일이 일어난 후 성 로메인은 지혜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고, “다른 이에게서 메시지를 받고 있는자신을 보았다. 또한 이 침묵의 기간에 신체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정수리가 따끔거렸고그때 에너지가 쑤욱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이런 감각은 며칠 동안 계속 됐다. 성 로메인이 체험한 신비 경험의 극치는 불 보듯 뻔하다. 당신이 기독교 요가 혹은 기독교 선을 하면 성 로메인처럼 기독교 사마디로 끝날 것이다. 성 로메인은 이렇게 선언한다.

더 이상 소외감은 없었다. 내 존재가 그리로 흘러들어가는 대지와 모든 창조의 실제는 같기 때문이다. 세계 모든 종교의 신비가들은 이 변화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성 로메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아마 이 작업의 중요성은 기독교와, 뉴에이지 영성으로 대표되는 동양적인 신비주의의 형태 사이의, 대화에 기여하는 가능성에 있다.

 

많은 사람은 성 로메인이 경건한 기독교인이라고 믿는다 성 로메인은 자신이 예수를 사랑하고 구원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교회에서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다. 그러나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 로메인의 감각이다. 그는 말한다.

내면의 충고자의 승낙 없이 나는 어떤 결정도 나 자신을 위해 내릴 수 없다. 충고자의 목소리는 내가 필요할 때 너무도 또렷하게 내게 말한다.-- 어떤 내면의 눈이 내 두 눈을 통해 보고 있는듯한 느낌이 또렷하게 든다.

 

성 로메인은 내면의 충고자를 정녕 하나님과 연결하는 것인가? 이러한 기도 방법이 기독교계 전반에 널리 퍼져 있는 실정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마땅히 던져야 한다. 이러한 수련은 이미 가톨릭과 개신교 주류 교단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리고 이제는 영역을 넘어 보수적인 교단에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로메인은 사명감을 느끼고 있다.

진정한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난 자들이 어떤 면에서 이 전체 여정이 어떻게 될지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나를 찾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에게 세상은 얼마나 놀라운 곳인지. 그러나 그럴려면 문화를 재구성해야 한다. 나는 우리가 겨우 이런 사명을 깨닫기 시작한 단계라고 믿는다.

 

초월 지식 입문: 초월 지식 이해 안내라는 책은 뉴에이지 운동의 기본 법칙과 원리를 이렇게 요약 소개한다.

당신은 신과 하나다. 온 인류와도 하나다-- 온 세상은 다른 만물과 하나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 신성의 표현으로서 에너지를 온 세상 안으로 스며들게 한다.

 

성 로메인의 진술은 이렇다. “내 존재가 흘러나온 근본()은 모든 창조의 실체와 똑같다.”

이 두 견해가 일치한다! 성 로메인은 선, 요가가 아니라 이런 수련의 기독교 형태인 보통의 관상 기도를 통해 이러한 견해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빛은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독교 저술들은 요가에서 말하는 것과 유사한 경험의 에피소드를 언급하고 있다. 초기 사막 신비가 중 하나인 성 엔소니는 기도 중에 자주 낯선, 때로는 위협적인 정신 물리학적인 힘에 사로잡히곤 했다.

 

유감이지만 이 경험은 성 앤소니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수 세기에 걸쳐 이 경험은 신비한 깨달음으로 가는 일반적인 절차가 됐다. 한 신비 수련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불교 수행자들, 힌두교 구루들, 기독교 신비가들, 원시적인 무당들, 수피교의 수장들 그리고 히브리 신비가들이 진술하는 고전적인 깨달음의 경험은 발광하는 빛과 창조세계와 합일하는 경험이라는 두 가지 보편적 요소로 특징지어진다.

 

신비주의적인 연결이 없으면 합일이 일어날 수 없다. 합일은 언제나 신비주의적인 연결에 포함된다. 여기에 신비 종교의 핵심이 있다. 영적인 지도자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많은 개인이 복음주의적인 교회를 점점 더 많이 찾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 다수가 신비 기도의 메시지를 가르친다.

 

혼합 영성

 

관상 기도의 최종적인 결과는 혼합적인 영성이다. 혼합 영성의 배후에 있는 전제는 신성이 온 세상 안에 들어 있고, 신의 임재는 모든 종교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온 세상은 서로 연결돼 있다. 그리고 신비 사상(명상)을 통해 이런 신성의 상태를 느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전제는 한 사람을 성경의 건전한 가르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로 연결하는 일종의 자기 최면적인 황홀경 상태에 근거를 두고 있을뿐더러, 그 경험에 의해 유지된다.

 

뉴에이지 전도사였던 브라이언 플린은 역풍을 맞으며 달리기라는 책에서 혼합 영성을 신비주의라는 공통의 실마리를 통한 세계 종교의 연합으로 설명하고 있다. 디즈데일이 혼합 영성이란 세계 종교 가운데 존재하는 영적인 공통분모다라고 한 말을 인용한다. 디즈데일은 보편적인 교회에 대해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교회 또한 인류의 화해에 교량 역할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성령은 힌두교도, 불교도, 무슬림, 시크교도, 자이니교도, 도교도, 유교도, 그리고 토착 신앙인 모두에게 문을 여는 시대의 표상을 통해 교회에 영감을 붓고 있다. 모체(하나의 결합체)로서 교회는 다른 전통의 신봉자들을 더 이상 교회 밖의 존재로 보지 않는다. 교회는 이 전통에 대한 연구를 촉진하고, 공통되는 근거와 나란히 통찰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존 맥아더목사는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신앙에서 말한다.

지난 20년 동안 복음주의자들의 합의는 명백하게 달라졌다. 전체적으로 우리의 메시지는 교리에 대해서는 짧아지고 경험에 대해서는 길어졌다. 사고가 감정보다 점점 덜 중요해지고 있다-- 언제나 복음주의의 특징으로 손꼽히던 건전한 가르침에 대한 열정은 눈 씻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게 됐다. 여기에 신비주의의 약물을 투여하라. 그러면 불치의 영적 재앙을 만드는 공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처음부터 선명했다. 하나님이 구세주를 보냈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신비 기도 실천 등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은 완전한 헛수고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문제는 많은 선의의 사람들이 내재신론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너무나 좋게 들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좀 덜 완고한 분으로 보이게 된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 모두를 신과 연결한다. 이 메시지에는 큰 매력이 있다. 그렇지만 성경은 인간에게 보편 구원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와 반대로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7:13~14)

 

그리스도가 전하시는 메시지는 내재신론이 말하는 구원론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사마디, , 쿤달리니 혹은 관상적인 침묵이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이다!

미국인들이 실제로 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놀랄만한 결과가 나왔다. ‘영성과 건강이라는 잡지에서 이름난 여론조사 기관과 계약을 맺고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4퍼센트가 신이 어디 누군에겐가가 아니라 어디에나 그리고 모든 것 안에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 말은 이제는 내재신론이 좀 더 인기 있는 신관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다가 이런 신비주의 혁명이 득세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이런 시각이 그토록 퍼져 나갔는가? 답은 이렇다. 지난 30년 혹은 40년 전에 몇몇 저자들이 기독교계의 수많은 독자와 구도자들에게 심금을 울리는 작품을 내놓았다. 이 저자들은 이제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의 생활을 더 깊이 있게만들어 주는 유일한 방법으로까지 보고 있는 관조적인 견해를 드러냈고 동시에 퍼뜨렸다. 신비주의 운동은 사람들이 관상적인 수련에 빠져들도록 부추겼다. ‘내면의 충고자를 경험하도록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그들의 메시지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4,15) 81P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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