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스크랩] 로이드존스 목사와 설교 10장 설교의 준비

강대식 2016. 12. 5. 13:30


제10장 설교의 준비


우리가 설교준비로 시선을 돌릴 때 우리는 즉시 내가 서론 부분에서 이미 개괄적으로 언급했던 큰 결정에 우리 자신이 직면하게 된 것을 발견합니다. 어떤 유형의 설교여야 하는가? 무엇이 복음적인 설교(전도)인가? 교회 기성신자의 건덕과 위안과 강건함을 위해서 하는 설교인가? 그렇지 않으면 성경의 메시지 가운데서 보다 보편적인 교훈형태의 설교인가? 등의 문제입니다.

어떤 유형의 설교를 할 것인가를 결정한 다음에 실제적인 준비라고 하는 아주 실천적인 문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 문제에 있어서 절대적인 법칙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내 자신의 이해와 체험에 기초해서 몇 개의 시험적인 제안을 제시할 뿐입니다.

설교하지 않아야 하는 것들

1 지난 2차 대전 동안 어느 미국 군목이 영국에 머무는 동안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는 어느 시골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그가 출석하는 교회로부터 주일 설교를 청탁받았습니다. 그는 내게 말했습니다. “내가 관찰한 것을 토대로 이신칭의에 관한 설교를 해야겠다고 결정했어요.”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진 결과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주제들에 관한 일련의 설교내용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칭의의 관한 설교 한 편, 성황에 관해서 한 편, 영화에 대해서 한편, 종말에 대해서 한 편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그것에 관계된 하나의 본문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가 행하고 있었던 일은 “이신칭의”나 그 밖의 등등에 관한 강의였습니다. 바로 그것은 내가 의미하는 바 주제들에 관한 설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2 교리문답설교
그 이유는 그것이 진리에 대해 이론적인 태도와 지나치게 지적인 자세를 산출할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교리문답집을 가르치는 것을 신빙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 견해는 이것이 다른 기회에 다른 방식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화(講話)의 항목 밑에 집어넣오 일련의 강의로서 취급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사람들 스스로가 교리문답집을 읽어 연구하도록 하고 토론회로 모여서 숙구하게 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또한 내가 지적해 온 바와 같이 설교에 있어서 메시지는 언제나 성경에서 직접 나오는 것이지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형식화한 것에서 나오지 않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조직화한 사람들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렇습니다. 교리문답서의 기능이란 궁극적으로 설교의 정확함을 보좌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그들의 성경해석의 올바른 진로를 표시하는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바로 그것이 신조와 교리문답서의 주요 기능이므로 여러분 앞에 늘 열려진 성경 자체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직접 증거하지 않고 거듭해서 교리문답서에 의존하여 설교하는 것은 분명히 그릇된 것입니다.

설교의 형태

1 특별한 구절이나 문단설교

19세기에 가장 위대했던 설교자들 중 한 사람인 스펄전은 이 문제에 있어서 아주 강한 노선을 고수하였습니다. 그는 연결되어 나가는 일련의 연속설교를 신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연관된 설교를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어딘지 주제넘은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들은 설교자에게 주어지게 되어있다고 주장하고 자기는 이 일로 주님을 찾으며 인도해 주실 것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집하기를 설교자는 결정해서는 안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도해야 하며, 이 일에 자신을 굴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는 어느 특정 본문이나 진술에 인도함을 받아서 그것을 설교형태로 발전시킨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은 그 주장을 고수하는 전통에서 자랐습니다. 결코 우리는 성경의 한 책이나 한 책의 일부 또는 어떤 테마에 관한 시리즈로 된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2 연속설교

그러나 그 주장과는 반대로 연속설교를 청교들은 분명히 신빙합니다. 스펄전이 청교도들의 책을 그렇게 읽었고 그들에게 큰 감명을 받았으면서도 이 점에선 그들과 완전히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 있습니다.

내가 볼 때 이 일에 고집을 부려 너무 꽉 들어박힌 법칙을 내세우는 아주 그릇되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성령이 성경의 한 구절이나 한 책에 입각한 연속설교는 어느 특정 본문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인도하지 않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이 점에서 난 스펄전과 완전히 동감입니다-우리가 “성령의 자유하심”을 고수해야 하고 그것을 다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끼어들지 말아야 하며 냉정하게 결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휴가를 마친 시즌초에 몇 달 동안 해 나갈 본문 목록을 작성하며, 그 기간 동안 매 특정 주일에 무엇을 설교할까를 정해 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철저하게 혐오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일이 불가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감히 내가 어떻게 성령의 자유로운 인도하심을 예측하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기” 때문입니다(요 3:8).

우리는 성령이 언제나 어느 한 특정한 일에 역사하심에 틀림없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떤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설정하는 것은 분명히 성령의 주권과 인도하심에 재한을 가하는 것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과 우리가 실제로 그에게 순종하고 있는지 유심히 확인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한때는 따로 떨어진 본문에 입각해 설교하게도 하시고 어떤 경우에는 연속된 설교를 하게도 하신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나는 내 체험에서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었음을 겸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영적침체” 연속설교

내가 어떻게 해서 연속설교를 하게 되었는지를 들어보시면 이 일을 예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나는 실제로 에베소서를 가지고 연속설교를 시작해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인도함을 받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내 자신의 결정이었습니다-그것이야 어쨌든, 어느 날 아침, 옷을 차려입고 있는데 갑자기 무엇이 짓누르듯이 하나님의 성령이 나에게 “영적침체”에 대한 연속된 설교를 하라고 명하는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 정말 글자 그대로 내가 옷을 입고 있는 동안에 내 심중에 설교순서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메모 용지에 여러 개의 본문과 그런 식으로 떠오른 순서를 적어 놓았습니다. “영적침체”에 대해서 일련의 설교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이러한 일도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왔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렇게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크게 집중시킵니다. 그것은 다른 것과는 달리 매우 놀랍고 영광스러운 체험입니다. 그리고 나는 감히 그런 식으로 내게 오는 아주 뚜렷한 주입(注入)이라고 느끼는 것을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 연속설교가 성령님 자신에 의해 지시된 것으로 확신합니다.

3 특별한 절기 설교

나는 이점에서 감히 청교도들을 비평해야겠습니다. 나는 성탄절이나 강림절 동안에 특별한 설교를 전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고난주일이나 부활주일, 성령강림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정당화시킵니까? 왜 청교도들은 그것을 반대했습니까? 물론 그에 대한 대답은 그들이 로마 카톨릭에 대한 강한 반감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우리 주님의 탄생 축하를 미사(Mass)로 돌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반감을 일으켜 너무 극단적인 반동의 경향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특별한 날들을 배려하는 것까지 반대했던 것입니다.

내가 그 점을 말하는 이유는 우리들 거의가 직면한 위험은 기독교 신앙의 적용과 완성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신앙의 진수와 신앙의 근본 자체를 망각하기 쉽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약의 서신서들에 눈을 돌릴 때 사도들이 기독교 신앙에 기본적인 사실을 뒤돌아보지 않고는 결단코 어떤 주제를 다룰 수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 경우에서든지 사실성과 역사성을 상기시켜 주는 사복음서가 있습니다.

분명히 오늘날 커다란 위험, 어떤 교파들에 있어서의 위험은 과도한 사유(思惟)화입니다. 나는 자주 교인들에게 보다 지적(知的)이 될 것을 설득시켰고 기독교 신앙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감상주의에 빠지지 말라고 권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나는 지나치게 이지적으로 되어 우리의 신앙의 기초인 역사적 사실성과의 접촉을 잃어버렸음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음을 확신합니다. 어는 그리스도인이든지 간에 예수 탄생에 대한 설교를 듣고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평가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여러분 스스로가 설교자로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상의 주님의 죽음에 대한 사실과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취급하는 설교에 여전히 감동을 받을 수 없다면, 또는 여러분이 전에는 그것을 전에는 설교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느끼지 못한다면, 또한 만일 여러분이 전에처럼 그 설교로 감동을 받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근본을 시험해 보는 것이 좋음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특별한 절기가 그런 면에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절기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의 모든 운명의 초석이 된 이러한 사건들을 재음미하게 하고 되돌아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4 신년설교

나는 어떠한 특별 절기든지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이용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언급했던 절기와 더불어 신년 첫 주를 늘 유용하게 사용했습니다. 여러분은 “1월 1일과 12월 31일이 어떻게 다른가?”하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묻는 여러분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지적인 태도입니다.

그렇게 보면 모든 날들이 같습니다. 그러나 보통사람에겐 다릅니다. 새해! 결심을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물론 그것은 난센스이며 아무것에도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한 주일간마저도 그들의 결심을 간직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회중들과 교인들을 평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인간 존재로 취급해야 합니다. “영혼을 얻는 자는 지혜롭다”고 하는 말을 기억하고서 사람들에게서 복음진리를 명심시켜 줄 것은 무엇이든지 이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새해가 시작될 때는 인생의 덧없이 흘러감을 깨우쳐 주는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는 신학적이고 지적이고 철학적인 큰 문제들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죽을 것이라는 것은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업이다, 오락이다, 가정이다 하여 그런 일에 파묻히다 보면 “이 생의 일들의 덧없음을” 역시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에게 이 모든 일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과 지금 어떤 이론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가장 중차대한 것을 다루고 있음을 상기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필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종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과, 최후 심판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줄 수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는 설교자는 어리석어 강단에 서기에 적합지 않은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갑자기 일어나는 일,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언제가 이용해야 하는 것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2백년 전에 살았던 위대한 성도 미들리의 존 플래처(John Fletcher of Medeley)의 전기 중에 한 사건이 기억납니다. 그는 영국 스태포드 현의 미들리 교구목사였습니다. 갑자기 시번(severn)강에 큰 재난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홍수에 떠내려갔습니다. 이 혼란은 존 플래처로 하여금 그가 그렇게 자주 말했던 비극적 사건에 대해 말해주어 엄청난 결과를 가졍올 뛰어난 설교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초기에는 자비하시고 매우 은혜로우셔서 설교본문을 주시고 설교내용을 주시고 때로는 완전한 설교내용까지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간 다음에는 내가 지적한 방식대로 본문을 연구하고 땀과 노력을 쏟아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실제적인 설교 준비

1 정직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해당 본문의 의미를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 면에서 하나의 황금률, 하나의 절대적 요청은 정직입니다. 여러분은 해당 본문에 대해 정직해야 합니다. 내가 말하는 의미는 여러분을 즐겁게 하는 한 사상만을 잡아내어 그것을 여러분 스스로 다루기 위해 본문을 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 부정직한 행위입니다.

제니스에서 어떤 유명한 설교자의 설교를 들은 첫 시간을 기억합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십자가의 장소를 동산으로 바꾸는 것에 관해서 설교하려 합니다.” 누구나 그러네 제목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있을까 하고 금방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곧이어 요한복음 19:40에 있는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라는 말씀에서 본문을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설교는 고뇌의 장소를 동산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 본문 안에는 그렇게 바꾸는 것이 없었습니다. 거기 동산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앞에 동산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동산을 만들어낸 십자가는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간에 병고로 고통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시련에 어떻게 대응할까를 다루는 아주 감상적인 설교를 전할 기회를 스스로 갖기 위해서 그는 그 본문에 억지를 부렸던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 시련을 아름다운 정신으로 극복하여 연약해지지 않고 불평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장소를 동산으로 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한 시간 반 중에서 25분 동안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감흥적이고 감상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것에 대한 할 말은 오직 하나-그것은 전혀 부정직한 것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며, 그 성경본문에는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택한 본문에 정직해야 합니다. 본문을 언제가 문맥 가운데서 다루어야 합니다. 그것은 절대법칙입니다. 그 점에 관심도 없고 오직 “아이디어”만을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하나의 제목과 아이디어에 대해 철학화를 시도하여 자기들 생각이나 도덕률을 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모욕하는 처사입니다.

2 영적 의미

첫째는 정확해야 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궁극적으로 해당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결정짓는 것은 학적인 것이 아니라 그 구절에 대한 영적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은 학식있는 권위자들까지 서로 상반된 경우가 있다는 것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궁극적으로 그 의미는 어떤 정확한 학문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영적 지각력 내지 영적 이해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이 요한일서 2:20, 27에서 언급한 “기름부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본문에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우라!

이 작업은 해당 본문의 메시지의 급소에 이르도록 합니다. 이 급소에 도달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택한 본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왜 그는 그렇게 말할까? 어째서 그는 그것을 이런 독특한 방식으로 말했을까?
그는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 그의 목표와 목적은 무엇인가?

설교자가 맨 처음 배워야 할 일 중 하나는 본문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여러분에게 말하고 여러분은 본문에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중에게는 질문을 던지십시오. 이것은 가장 유익하고 좋은 것을 자국해 주는 절차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분이 택한 본문에 무리를 가하지 마십시오. 하나의 사상이 여러분에게 떠오를 수도 있고 그것이 여러분을 흥분시키고 감동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들이 그것을 특정 본문에 짜맞추기 위해서 무리를 가한다든지 조작한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러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본문을 깍아버리기보다는 차라리 훌륭한 설교를 희생해야 합니다. 이 일 후에 또는 이러한 일을 하는 동안 원어사전이나 주석들을 참고하여 얻은 본문에 대한 이해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알려주고 싶은 관점은 해당 본문이나 진술의 주요 메시지와 주요 핵심, 요점을 얻으려 한다는 것을 확실히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취급하는 본문의 주요 메시나 핵심에 도달하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인도하게 하고 여러분을 가르치게 하십시오. 본문이 말하는 바를 듣고 무슨 의미인지 본문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런 다음에 그것이 여러분 설교의 핵이 되게 하십시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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